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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중제1주간토요일(100116.토)

도구 Ludovicus 2010. 1. 16. 09:32

<연중 제1주간 토요일>(2010. 1. 16. 토)

 

<편 가르지 마라.>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왜 죄인들과 어울리느냐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기들이 죄인으로 규정한 사람들과는

어울리지도 않았고, 음식을 함께 먹지도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까마귀 노는 곳에 가지 않는 백로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의인과 죄인으로 구분해서 편을 가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처했고,

죄인들은 아예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편 가르기를 무너뜨리셨습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잘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의인과 죄인의 구별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죄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뽑을 때에도 출신 같은 것은 보지 않으셨습니다.

사도들 중에는 어부 출신도 있고, 세리 출신도 있고,

바리사이파 율법학자 출신도 있고, 열혈당 출신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편 가르기를 하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것을

‘대죄’로 규정하셨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다 형제이고 자매입니다.

 

그런데 그 형제와 자매를 바보나 멍청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업신여기고 멸시하는 행동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옛날 일이 생각납니다.

제가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신학교 총학생회 회장은 부제반에서 맡고 있었고,

회장 선출은 부제들끼리 알아서 했습니다.

 

그러다가 총학생회 회장을 전체 신학생의 투표로 선출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4.13 조치, 6월 항쟁, 6.29 선언 등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학생회 총회 때 회장 직선제가 안건으로 올라왔고,

긴 시간 동안 심각하게 격론을 벌였습니다.

 

그때 부제 중의 한 사람이 이런 발언을 했습니다.

“부제들은 성직자이고, 다른 신학생들은 평신도이다.

그런데 어떻게 평신도가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투표를 할 수 있느냐?”

 

그 한 마디에 신학생들이 모두 입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그 안건은 그냥 부결되고 말았습니다.

그게 그 당시의 신학교 분위기였습니다.

부제는 성직자이고, 그래서 부제는 하늘처럼 높은 사람들이고...

 

평신도가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투표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얼핏 듣기에는 그럴듯한 말입니다.

그 당시에는 저도 분위기에 휩쓸려서 판단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부제의 말은 아주 잘못된 말이었습니다.

총학생회 회장은 전체 신학생을 대표하는 사람이지

부제들을 대표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몇 년 후였는지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총학생회장을 부제가 아니라 5학년에서 맡는 것으로 회칙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졸업할 때까지 직선제는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그 말,

“어찌 감히 평신도가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투표할 수 있는가?”

물론 천주교라는 종교에서 그런 투표는 없습니다.

 

천주교에서 투표로 선출하는 자리는 유일하게 교황뿐입니다.

그것도 추기경들만 모여서.

그 나머지 자리는 몽땅 다 임명입니다.

 

교회법이 그렇더라도 이제 부제밖에 안 된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발언을 공개석상에서 한다는 것은...

 

그가 신부가 되어서 본당의 주임이 되어 있다면,

그 본당의 신자들이 많이 피곤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그가 어느 교구 소속이었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예수님 앞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편 가르기도 하면 안 됩니다.

그건 그냥 직분의 차이일 뿐입니다.

 

우리는(사제들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편 가르기라는 말에서 또 생각나는 것이 소공동체 운동입니다.

그 운동의 목적도 좋고 운동 자체도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현실이 그 목적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아파트 평수에 따라서 편이 갈라진다는 점입니다.

넓은 평수의 고급 아파트와 서민 임대 아파트의 거리감...

소공동체 운동이 아무리 좋아도 두 아파트를 섞을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제가 전에 보좌신부로 있었던 어떤 성당에서

여러 단체들이 조직되고 활발하게 활동도 많이 하고

그래서 본당에 활기와 생기를 불어넣었는데,

그 단체들이 모두 끼리끼리였다는 것.

 

소위 상류층 사람들만 가입하는 단체와

서민들만 가입하는 단체가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었다는 것,

누가 보아도 딱 표시 날 정도로.

한 성당에서 그런 식으로 편이 갈라져 있었던 것입니다.

 

구역도 역시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고급 아파트 구역과 가난한 임대 아파트 구역.

인위적으로 섞을 수도 없었지만 섞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주 옛날에 노예제도라는 것이 있었던 나라에서는

자유인들만 다니는 성당(교회), 노예들만 다니는 성당(교회),

그렇게 구분되어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일부러 구분한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만일에 천당이라는 곳이 상류층, 부유층 사람들이 머무는 천당과

서민층, 극빈층 사람들이 머무는 천당이 구분되어 있다면???

또는 성직자들의 천당과 평신도들의 천당이 구분되어 있다면???

저는 그런 천당이라면 가지 않겠습니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양반과 양반 아닌 사람이 형제, 자매로 어울리는 모습이

당시 조선 양반들에게는 크게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천주교는 들어오자마자 조선의 신분제도에 타격을 가한 것입니다.

 

그래도 한 가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신부들이 모두 양반 행세를 하고 양반 복장을 했다는 것.

서양에서 온 선교사들도 그랬었는데,

그게 선교활동에 유리해서 그랬겠지만... 잘했다고 칭찬할 수 없는 일입니다.

 

편 가르기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숨어 있는 바리사이파적 근성을 버려야 합니다.

그건 쓸데없는 자만심, 우월감으로 나타나고, 죄의 원인이 됩니다.

 

‘졸부’ 라고 불리는 사람들처럼

재산은 많고 권력도 있지만 영혼은 병든 사람들이

종교마저도 독점하려고 들면 종교도 병들어 버립니다.

천박한 영혼, 병든 영혼들이 쓸데없이 편 가르기를 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예수님이 왜 왕궁에서 태어나지 않고,

외양간에서 태어나셨는지를 다시 생각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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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Fr.송영진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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