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간 수요일>(2010. 1. 20. 수)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1월 20일 수요일의 복음 말씀은
‘신념’이 잘못되면 사람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구약시대 때에 율법 준수를 강조한 것은
종교와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원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율법 준수만’ 강조했고 그것을 자기들의 신념으로 삼았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율법주의’ 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위해서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율법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율법주의가 사람들을 너무나 심하게 억압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억압에서의 해방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회당에는 이미 장애자 한 사람이 와 있었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의도적으로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장애자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도 아니고
몸을 고쳐달라고 간청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이 안식일 율법을 어겼다는 증거가 되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그 장애자 자신의 의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몸이 성하게 된 후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는 것은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기적 이야기에 늘 등장하는 하느님 찬미나 감사의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상황이 함정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분노하십니다.
장애자마저 이용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짓거리에 분노하신 것입니다.
신념이 잘못되면 신념만 보이고 선과 악을 잊어버립니다.
선악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없을 정도라면 그런 신념은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 질문을 던집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이것은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습니다.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안 하고 있습니다.
대답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질문이어서 대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질문의 의도를 알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답하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음모가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이미 선악의 판단력을 잃은 상태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노하시면서 동시에 슬퍼하십니다.
그렇게까지 마음이 굳어졌으니...
어떻든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의 싸움은 잠시 멈추고
일단 장애자를 고쳐 주십니다.
싸움은 싸움이고 자비는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양심으로는 예수님이 옳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규정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항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이미 굳어질 대로 굳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양심을 눌러버리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악한 신념이 선한 양심을 눌러버린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졌다는 것은
그들이 헤로데 당원들과 손을 잡았다는 데에서 잘 드러납니다.
바리사이파와 헤로데 당은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전쟁은 악한 신념 때문에 일어난 전쟁들이었습니다.
소위 종교 전쟁, 그리고 이데올로기 전쟁들.
6.25도 이념과 이념이 부딪힌 전쟁이었습니다.
도대체 이념이라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신념을 고집하면서 형제가 서로 총을 겨누었던 비극이 바로 6.25였습니다.
그때의 기억이 진보, 좌익, 평등 같은 말들에 대해서
사람들의 과민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참혹한 비극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과민반응이 지나쳐서 또 다른 악한 신념으로 굳어지는 것을 봅니다.
국가 안보와 정권 안보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조국에 대한 충성과 독재자에 대한 충성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국익과 자기들의 기득권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렇게 판단력 없는 사람들이 시민들과 폭도를 구별하지 못한 것이 광주 항쟁입니다.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선악을 구별하는 능력을 이미 잃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같은 율법주의자들의 그런 나쁜 신념 때문에 목숨을 잃었고,
헤로데 당원들 같은 기득권자들의 이기심 때문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정부와 정권을 비판하는 강론을 듣기 싫어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강론을 듣기 싫어하는 것을 개인의 성향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교회가 정부와 정권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까지 비난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태도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원래부터 골방에서 기도만 하는 이기적인 단체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세상을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으로 변화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정부와 정권이 잘못하고 있다면 우리 교회가 먼저 나서서 제동을 걸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모든 신앙인의 예언직 사명 수행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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