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간 화요일>(2010. 1, 19, 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갑니다.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서 먹습니다.
그만큼 제자들이 배고픈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
안식일에 먹을 음식은 그 전날 다 준비해 두어야만 했고,
안식일에는 준비되어 있는 음식만 먹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눈에는 밀 이삭을 자르는 것이 음식 준비로 보였습니다.
겨우 그런 일 때문에 그것이 율법을 어긴 일이라고, 그것은 죄라고 시비를 거는 것은
아주 옹졸한 태도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옹졸한 분으로 만드는 짓입니다.
그러니 더 큰 죄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지은 셈이 됩니다.
예수님은 배가 고팠던 다윗의 예를 이야기하시면서 그들의 말을 반박하십니다.
다윗이 먹은 것은 원래 하느님께 바친 것이었고 성직자들만이 먹을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마음대로 먹었다는 것은 신성 모독죄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굶주린 다윗에게 죄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한 일이 용납될 수 있는 일이라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일도 용납될 수 있는 일이고,
어느 누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종교가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종교를 위해 생긴 것은 아니다.”
“성당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성당을 위해 생긴 것은 아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사람의 아들, 곧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다.”
“예수님 구원의 대상인 사람이 교회의 주인이다.”
“성당의 주인은 성직자가 아니라 신자이다.”
성당은 사람을 살리는 곳이 되어야 하고,
성당은 사람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는 곳이 되어야 하고,
성당은 사람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법이나 율법으로 사람들을 숨 막히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쁨과 행복이란 억지로 줄 수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천국에 가는 길을 안내하는 것으로 그쳐야지 억지로 끌고 가면 안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으로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무서워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종교 본연의 자세를 잃은 것입니다.
성당은 세속이 주지 못하는 참 행복을
죽은 다음이 아니라 ‘지금 당장 여기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지옥의 형벌을 묘사하고 멸망이나 예언하면서 겁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우선 첫 번째 문제가 ‘돈’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신설 본당의 성전 신축 기금 마련의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본당신부들이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심정이 되는 것은 이해하지만,
신자들이 그런 성금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신앙의 기쁨을 잃을 정도라면
차라리 신축 계획을 중단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성전 신축 외에도 수없이 진행되는 온갖 공사, 사업, 행사 등등,
강론 때마다 돈 이야기나 하고 본당의 사업 이야기나 하고,
그래서 신자들이 부담감, 불편함, 민망함, 부끄러움... 그런 감정으로 성당에 다닌다면,
그렇게 만든 책임자는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만일에 돈을 잘 내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면
그게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입니다.
꼭 그럴 때 써먹는 성경 구절이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 닢’ 헌금 이야기입니다.
왜 그런 구절만 이야기하고,
바오로 사도가 모금할 때 했던 말,
“저마다 형편이 닿는 대로 얼마씩(1코린 16, 2)” 이라는 구절은
인용을 잘 안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아무런 부담감 없이 기쁨으로 낼 수 있는 성금이 진짜 성금인데...
두 번째로, 온갖 의무 규정들입니다.
신자들의 기본 의무로 규정된 것들이 때로는 부담감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교리를 잘못 가르친 탓입니다.
왜 지켜야 하는지도 모르는 법을 지킬 때의 답답함이
신앙의 기쁨을 잃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규정들의 목적과 이유, 방법 등을 잘 알고 있다면 부담이 줄어들 것입니다.
세 번째로, 상과 벌을 이야기할 때의 균형 상실의 문제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 이야기와 지옥 이야기의 균형,
구원과 멸망을 이야기할 때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지옥에 가지 않으려거든 회개하라는 말과
천국에 가려거든 회개하라는 말의 차이는 큽니다.
지옥에 가는 것이 무서워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천국에 가고 싶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의 차이는 큽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과
기쁨을 위해서 기쁨 속에서 기도하는 것의 차이도 큽니다.
지금 참고 견디면 나중에 큰 기쁨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과
지금 당장에 작은 기쁨이라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의 차이도 큽니다.
바리사이파 같은 성직자, 수도자가 의외로 많습니다.
(사실 저 자신도 좀 오락가락 할 때가 있다고 느낍니다.)
물론 바리사이파 같은 신자들도 있기는 있습니다.
회개의 기준은(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느냐의 기준은)
교회 규정을 얼마나 잘 지키고 돈을 얼마나 잘 내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사랑 실천을 잘하고 얼마나 기쁨 속에서 살고 있느냐? 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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