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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중제1주간금요일(100115.금)

도구 Ludovicus 2010. 1. 15. 08:50

<연중 제1주간 금요일>(2010. 1. 15. 금)

 

<죄를 용서하는 권한>

 

어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주변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가까이 가지도 못합니다.

그게 보통 상황이었다면 포기하고 그냥 돌아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고 엉뚱한 방법을 시도합니다.

그만큼 간절했다는 것입니다.

환자의 절박한 심정은 당사자나 그 가족 말고는 알기 어려운 법입니다.

 

그들은 지붕을 벗겨서 환자를 들것에 눕힌 채 내려 보냅니다.

당시 그 지역의 집들의 지붕은 그저 나뭇가지로 가리는 정도였기 때문에

그것을 걷어내고 환자를 내려 보내기는 쉬웠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해야 할 정도로 간절한 심정이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병자에게 믿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릅니다.

하여간에 예수님은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당사자가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믿음을 가진 사람 덕분에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한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다른 가족들도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자기라도 열심히 믿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 안에서,

우리의 믿음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것.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병자의 몸의 병보다는 마음의 병을 먼저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 학자들과 시비가 붙게 됩니다.

사람에게 죄를 용서할 권한이 없다는 그들의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곧 하느님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사기꾼에게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쉬운 일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기적을 행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신 예수님에게는

병자에게 일어나서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이 더 쉬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는 일이

(더 어려운 일이 아니라) 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중풍 병자는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일어나서 걸어갑니다.

그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은 당신의 권능과 권한을 증명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쪽에서 본다면 쉬운 일을 통해 어려운 일의 권한을 입증한 것입니다.

사람들 쪽에서 본다면 더 어려운 일을 통해 쉬운 일이 입증된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라고 하면서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에서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에는 없는 말이 마태오복음에 있습니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오 9, 8).”

라는 구절입니다.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 ???

 

우리 생각으로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하느님만의 권한인데

예수님께서 그 권한이 당신에게도 있음을 입증하셨으니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한을 갖고 계신 분, 즉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

그런 논리가 성립되는데...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여전히 보통 사람으로만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눈앞에서 기적을 보면서도

예수님의 권한을 인정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을 보아도 사람들은 하느님을 찬양했을 뿐이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루카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베드로가 밤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다가

예수님의 지시대로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많이 잡게 됩니다.

 

그때 베드로의 행동은...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 8)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하느님의 권능이 있음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간청한 것은 진짜로 떠나달라는 뜻은 아니고

“제가 어찌 감히 주님 앞에 서 있겠습니까?”

그런 정도의 뜻입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시는 이야기를 보면,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마태오 14, 33)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권능을 보게 된다면

예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런데 다시 중풍 병자를 고치는 이야기로 돌아가서 살펴보면,

사람들은 놀라고, 하느님을 찬양하고, 오두방정을 떨지만,

예수님에 대해서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거나, 예수님의 권한을 인정하거나...

예수님께 사과하거나... 뭔가를 했어야 했는데...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안 믿기로 작정한 사람을 믿게 만드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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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복음 말씀에 대해 강론할 때에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병자를 고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목요일 복음 말씀에 대해 강론할 때에도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돌팔이 의사나 떠돌이 약장수로,

즉 병이나 고치는 기적가로 오해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이제 금요일 복음 말씀에 대한 강론도 같은 주제가 이어집니다.

중풍 병자를 고쳐주신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중요한 주제입니다.

병자를 고쳐주신 일은 예수님의 권한을 입증하는 보조 수단이었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으니... 예수님은 곧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몸의 병만 고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종교라는 것은 몸의 병을 고치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 말이 귀에 익은 말입니다.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고해성사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사람들의 말과 비슷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고해성사를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고해성사를 비판합니다.

고해성사를 줄 권한도 없는 사람들이 고해성사를 비판합니다.

 

‘성사’란 이론으로만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의 이론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고해성사 외에도 다른 성사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갖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이 진리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 말씀들을 기록한 성경이라는 책의 권위를 인정한다면,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사도들에게 주셨음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모든 직무 수행이 사도들의 죽음으로 다 끝났다고 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주신 많은 권한과 임무들이

사도들의 순교와 동시에 모두 막을 내렸다면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는 서기 100년 이후에 사라졌을 것입니다.

 

‘위임’과 ‘계승’이라는 것을 통해서 교회의 직무는 계속 수행되고 있습니다.

 

고해성사란 인간일 뿐인 사제가 다른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일이 아닙니다.

용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행해집니다.

사제 자신의 용서가 아니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용서입니다.

 

고해성사를 ‘제대로’ 보았을 때의 은총은 체험해본 사람만이 압니다.

 

그것은 중풍에 걸렸다가 나은 것보다 더 큰 기쁨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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