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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중제1주간목요일(100114.목)

도구 Ludovicus 2010. 1. 15. 08:49

<연중 제1주간 목요일>(2010. 1. 14. 목)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말 것이지...>

 

예수님께서 어떤 병자를 고쳐 주신 다음에 엄하게 명령하십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예수님은 원래 마귀들에게는 입도 뻥긋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병자들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분부하실 때가 많았습니다.

 

마르코복음에서 비슷한 장면을 찾아보면,

 

마르코복음 7장에서 장애자를 ‘에파타’ 라는 명령으로 고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 더 널리 알렸다.” (마르코 7, 36)

 

마르코복음 9장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는 장면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마르코 9, 9)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제자들의 오해를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병자들에게 병이 치유된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을 병이나 고치는 기적가로 오해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돌이 ‘약장수’나

돌팔이 의사 정도로 생각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수요일 강론에서 이미 언급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신 것은 자비심 때문이었을 뿐,

그것이 예수님께서 원래 하고자 하신 일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온 삶으로 믿고 구원을 받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우선 절박한 문제인 몸의 병을 고친 다음에는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가버리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하지 말라고 하셨으면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정반대 상황이 하나 있습니다.

마르코복음 5장의 ‘마귀들과 돼지 떼’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은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신 다음에

그 일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라고 하십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코 5, 19)

 

‘군대’ 라는 이름의 마귀가 들렸던 사람을 고쳐주신 일은

다른 병자를 고쳐주신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은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여간에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예수님의 지시를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병을 고쳤다, 너무 기쁘다,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나는 이 기쁨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시를 어긴 것은 잘못입니다.

예수님의 지시를 어겼으니, 우리 기준으로 말하면 죄를 지은 셈입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쳐 준 사실, 또 병이 나은 것에 대한 기쁨,

그런 것들을 말하는 것이 왜 잘못이냐? 라고 따질 것이 없습니다.

 

기준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이, 그래도... 너무 기뻐서 그 기쁨을 말한 것뿐인데...”

라고 변명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을 방해한 것이 되었으니, 잘못한 것입니다.

 

어느 도시에서, 어떤 가정의 성모상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피눈물까지 흐른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이런저런 기적을 체험했다는 소문도 퍼졌습니다.

 

그냥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교구에서는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그것이 정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인지,

아니면 사탄이 하는 일인지를 식별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꽤 긴 세월이 흐른 다음에

교구에서 정식 조사단을 구성해서 조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일에 그 조사 결과가 긍정적이었다면

우리나라에도 파티마나 루르드 같은 성지가 하나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사 결과는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교구장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그 일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부 방송국에서도 그 일을 취재했고,

몇 가지 속임수를 밝혀내기도 했습니다.

 

그 교구에서는 모든 것을 금했습니다.

이것은 교회법에 규정된 교구장의 교도권에 해당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교도권으로 금했는데도 아무것도 중단된 것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성모상과 관련된 사람들은 지금도 계속 주장합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성모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그렇다면 그 성모님은 왜 아들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를 방해한답니까?

아들 예수님의 교회가 하는 일을 방해한다면 그건 성모님이 아니라

성모님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다른 존재겠지요.

(성모상의 피눈물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들 때

가장 큰 피해자는 그 지역의 성당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교회법에 규정된 교구장의 말을 듣지 않겠다면

그것은 교회를 떠났다는 뜻이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일은 더 이상 천주교회의 일이 아닙니다.

 

이천 년 동안 그런 일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만일에 각자 믿고 싶은 대로 믿고,

행동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했다면

천주교회는 갈가리 찢겨지고 갈라졌을 것입니다.

 

하라는 것은 충실하게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명령이 예수님의 명령이라면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혹시라도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가 말하고 다닐 것을 아셨으면서도

일부로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아닐까? 어떤 속셈이 있어서?

 

성경을 그런 식으로 읽겠다면 차라리 읽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속셈을 감추고 거짓 지시를 내리셨다고???

큰일 날 소리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그러셨다면 그 다음 구절의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라는 구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사람의 자유 의지, 자율성을 막지 않으신 분입니다.

(유다의 배반도 유다 스스로 결정하게 놓아 두셨습니다.)

병자가 소문을 퍼뜨리는 것도 그냥 놓아 두셨습니다.

 

어떻든 병자가 예수님의 지시를 어겼기 때문에

예수님의 활동에 많은 지장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지시를 어기더라도 자기의 기쁨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고??

자기 병이 나았다는 자랑 말고 무엇을 더 전했을까요?

믿음도 없고, 순종하는 마음도 없는데, 그저 자기 자랑이나 했겠지요.

 

우리에게 예수님의 지시는 곧 계명입니다.

이해가 되고 안 되고는 나중 일이고, 우선 따르고 지켜야 합니다.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라는 계명,

이해도 안 되고 실천하기 어려워도 예수님의 명령이니까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라.’ 라는 명령과 ‘하지 말라.’ 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의 교도권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는 천주교회 사람이 아닙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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