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주간 화요일>(2010. 1. 12. 화)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1월 12일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시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이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고 놀랐다는 것은
다른 율법학자들(랍비들)의 가르침은 낡았고, 권위가 없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참된 권위와 권위주의는 다릅니다.
율법학자들은 권위주의자들이었지만 권위가 없었고,
예수님은 권위 있는 분이셨지만 권위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군사 독재자들은 권위가 땅에 떨어진 권위주의자들이었습니다.)
왜 다른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은 낡고 권위가 없는 가르침이었냐? 하면,
그들은 자기 믿음이나 자기 삶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자기 지식만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른 유명한 학자들이 이미 이야기한 것을 자주 인용했고,
또 이미 누군가가 써놓은 것을 읽고 공부한 것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들의 가르침은 사실상 자기 지식을 자랑하는 잘난 체였습니다.
TV의 종교 채널에 자주 등장하는 명강사의 강의를 들어보면
재미도 있고, 귀에 잘 들어오고, 정말 강의를 잘한다고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잘하는 강의인데, 좋은 강의라고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잘하는 강의와 좋은 강의의 차이란?
전에 제가 보좌신부로 있었던 어떤 본당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사목회 임원들이 강론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강론을 했던 사람들 중에는 대학교수도 있었고,
사업을 하는 사람, 직장인, 평범한 가정주부도 있었습니다.
확실히 대학교수들은 강론을 잘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무척 힘들어하는 모습으로 강론을 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강론을 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강의보다 강론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대학교수들의 청산유수 같은 강론이 아니라
평범한 어떤 가정주부의 신앙 간증 형식의 강론이 가장 감동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주부의 강론에는 학문적인 깊이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깊이가 있었습니다.
그분에게는 말재주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강론에는 진실이 들어 있었습니다.
대학교수들의 강론 때에는 졸았던 신자들이
그분이 강론을 할 때에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이 명강사였는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행했던 웅변술을 사용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놀란 것은 예수님의 웅변술이나 말재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박학다식에 놀란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새롭고 권위가 있는 가르침이라는 것은,
첫째, 하느님의 권능이 담긴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단 한 마디로 마귀를 쫓아낼 정도로 실질적인 힘이 들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사단장의 한 마디 말과, 중대장의 한 마디 말과, 고참병의 한 마디 말의 차이 같은 것.
듣는 사람에게는 정말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입니다.
하느님이신 분의 한 마디 말씀과 그저 이것저것 공부 좀 했다는 사람의 한 마디 말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사랑’이 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려고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주시기 위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 없이 말재주로 가르치는 것과 사랑으로 가르치는 것의 차이를.
부모가 야단칠 때 자녀들은 느낄 수 있습니다.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야단치는지, 화가 나서 야단치는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은 그 가르침에서 사랑을 느꼈습니다.
목숨까지 내어줄 정도로 큰 사랑을.
셋째, 예수님의 가르침은 곧 그분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삶이 일치했기 때문에
그 가르침에 힘이 있었고 권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가르치려면 먼저 삶으로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교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가르치는 직분에 있는 사람 모두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성직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강론을 잘하는 신부보다 강론한 대로 사는 신부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강론이 어려운 것입니다.)
하여간에 예수님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은 권능과 사랑과 삶의 일치로
마귀를 한 방에 쫓아낼 정도의 힘이 있었습니다.
그 가르침을 기록한 책이 성경입니다.
그렇다면???
성경만 잘 읽어도 우리는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백과사전을 통째로 외운다고 힘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육법전서를 모두 외운다고 힘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지식은 늘어날지 몰라도 생명의 힘은 얻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안 읽고 성경 해설서만 읽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 공부 모임에는 참석을 잘하면서 성경은 안 읽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는 많이 하는데 성경은 안 읽는 사람이 있습니다.
(못 읽는 것과 안 읽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을 반드시 ‘공부’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말씀을 공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말씀을 새겨들으려고 노력합니다.)
성경은 공부를 해야 하는 책이 아니라 새겨들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새겨들었으면 실천해야 합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은(말씀은)
우리 인생을 새롭게 해주고 힘 있게 해줄 것입니다.
그걸 바란다면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을 자주 읽고 묵상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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