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후 목요일>(2010. 1. 7. 목)
<하느님 나라, 희년, 기쁜 소식>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의 말투는 독특합니다.
‘이루어졌다.’ 라는 말씀에는 ‘이루어져야 한다, 이루어라.’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활동을 시작하시면서 처음 인용하신 성경 구절은
이사야서 61장1절-2절입니다.
그 내용은 글자 그대로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기쁜 소식의 내용은 이제 희년이 되었고 해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희년의 핵심은 ‘해방’입니다.
노예로 팔려간 사람은 자유를 되찾게 되고,
빚에 시달리던 사람은 빚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원래의 재산이 회복되고, 원래의 상태가 복구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시면서
이사야서 61장1절-2절을 선택하신 것은
당신의 사명과 당신의 활동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히신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해방’입니다.
자, 그런데 생각해봅시다.
노예가 해방되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주인이 선의와 사랑으로 노예를 풀어주는 방법이 있고,
노예가 스스로 탈출하거나 주인을 죽이고 자유를 쟁취하는 방법이 있고,
국가가 노예 해방령을 선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노예 해방령을 선포하려고 했을 때,
미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남북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진정한 자유와 해방은 없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같은 분들의 희생이 거듭되고 나서야 겨우 이루어졌습니다.
노예가 탈출하거나 주인을 죽인다면... 자유는 얻겠지만,
얼마나 많은 희생이 생기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주인이 사랑과 선의로 노예를 풀어주는 것입니다.
다른 종류의 억압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진 자, 힘 있는 자들의 마음에 사랑이 회복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가난하고 빚만 잔뜩 있는 사람들에게 희년을 선포한들
그게 실효성이 없는 것이라면 기쁜 소식은커녕 실망만 줄 것입니다.
그래서 희년 선포는 가장 먼저 가진 자, 힘 있는 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꾸어준 것을 받아내려 하지 말고 포기하라.
노예는 모두 풀어주어라.
토지나 집이나 다른 재산들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라.
이스라엘에서 희년 제도가 처음에는 그런대로 유지되다가
차츰 흐지부지 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가진 자들의 마음에 사랑이 없으면 희년은 무의미합니다.
자기 것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희년 선포는 말로만 그치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다.
기쁜 소식의 구체적인 내용은 희년과 같은 것이다.
자, 이제 희년이다. 기뻐해라.“
라고 사제가 말로만 강론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무엇을 기뻐해야 합니까?
수입은 그대로이거나 줄어들고 있고, 물가는 오르고 있고,
지출은 자꾸만 늘어나고 있는데...
빚을 갚는 일은 어렵기만 하고, 이자는 자꾸 쌓여가고 있는데...
몸은 아프고, 나을 기미도 안 보이는데...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지난 2000년도에 우리 교회는 대희년을 선포했습니다.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낙타와 바늘귀의 비유’에 나오는 그 부자의 이야기를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명령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너는 나를 따라라.”
그는 영원한 생명 대신에 재산을 선택하고 떠나버렸습니다.
그것이 사실 인간들의 실제 모습이고,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희년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있습니다.
부자는 부자였기 때문에, 라자로는 너무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저 세상에서의 처지가 완전히 반대로 역전되고 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근거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인생 역전을 바라십니까? (희년을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로또 복권을 사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희년’이 ‘나의 해’가 되기를 바란다면 스스로 라자로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가난한데, 나는 어떻게 하란 말이냐? 그냥 살던 대로 살면 되냐?
라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입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은총이다.”
꽃동네 설립의 계기가 된 최귀동 할아버지의 말입니다.
구걸을 해서 얻어온 음식을 다른 거지들에게 나누어준, 그 위대한 사랑...
가난해도 나눌 것은 있습니다.
지금까지 노예제도나 돈에 관한 부분만 이야기했는데,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이 다 희년과 상관이 있습니다.
특히 욕망이라는 것은 인간을 심각하게 억압하는 독재자입니다.
우리는 그 독재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그 욕망에는 성욕, 명예욕, 소유욕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절제할 수 없는 욕망은 사탄의 도구입니다.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은 곧 사탄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명예욕 때문에 연구 결과를 조작하다 망한 과학자를 보았습니다.
소유욕 때문에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보고 있습니다.
성욕 때문에 자기의 인생과 남의 인생을 모두 망치는 사람들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 욕망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천사가 타락해서 사탄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희망이 타락하면 욕망이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저 남들처럼 살고 싶다는 소박한 희망이
남들보다 더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으로 변하고,
그 욕망이 남들 것을 뺏는 죄로 이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순수한 희망이
그 사람을 완전하게 차지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변할 때,
순수했던 사랑이 성욕과 소유욕으로 범벅된 집착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그러다 성욕만 남은 짐승 같은 모습으로까지 타락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고 희년입니다.
교도소에 가 보면 이중의 감옥을 볼 수 있습니다.
교도소 안에서도 자기의 욕망이라는 감옥에 다시 갇혀 있는 사람들이 있고,
그 높은 담장에 갇혀 있어도 영혼의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양심수라고 부르는 사람들,
그분들에게는 감옥이란 때로는 피정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수도원을 감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그 생활을 못합니다.
수도원을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안에서 평생 살 수 있습니다.
그럼, 그 모든 일이 마음먹기에 달린 것일까요? 생각하기 나름일까요?
아닙니다. 마음 고치고 생각 바꾼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 정도로 되는 일이라면 그건 자기 최면일 뿐입니다.
답은 ‘향주삼덕’, ‘복음삼덕’에 있습니다.
신앙인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이 향주삼덕이고
생활로 실천해야 할 덕이 복음삼덕입니다.
향주삼덕은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복음삼덕은 순명, 청빈, 정결입니다.
복음삼덕은 성직자, 수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신앙인에게 다 해당되는 덕입니다.
순명 -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명해야 합니다.
청빈 - 일반 신자들도 청빈을 실천해야 합니다.
정결 - 우리는 욕망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단순히 고통과 시련을 참고 견디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희망, 사랑 속에서 순명, 청빈, 정결의 삶을 사는 것이 곧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기쁜 소식의 기쁨이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기쁨은 준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기뻐해야 기쁨입니다.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제도를 바꾸는 노력도 해야 하고,
자기 자신의 욕망이라는 억압에서도 벗어나려는 노력도 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다면 먼저 희년의 정신을 실천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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