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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중제30주일(091025)

도구 Ludovicus 2009. 10. 25. 08:28

<연중 제30주일>(2009. 10. 25)

 

<바르티매오>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성경을 읽다보면 어느 한 구절에 시선이 멈추는 때가 있습니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말을 듣습니다.

아마도 그전에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겠지요.

 

앞이 안 보이고 구걸을 하는 처지여서

스스로 예수님 앞에 나서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불러오라고 시켰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예수님께서 부르신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바르티매오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갑니다.

여기서 궁금증 하나가 생깁니다.

 

앞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예수님께로 갔을까?

예수님이 어디에 서 계시는지, 누가 예수님인지... 어떻게 알았을까?

다른 사람들이 그를 부축해서 예수님 앞으로 인도했을까?

자기 발로 걸어서 곧장 예수님 앞으로 갔을까?

 

저는 예수님의 자비가 그를 인도하고

그의 열렬한 소망이 그를 나아가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그를 부축해서 인도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셨다는 것,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그가 예수님께로 가고 싶어 했다는 것.

 

은총이 있었고, 응답이 있었다는 것.

 

예수님께서 부르지 않으셨다면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열렬한 소망이 없다면 그는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앞이 보이든, 안 보이든... 거지였든 부자였든...

그런 점에서 세리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난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런 열렬한 소망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

라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은총은 누구에게나 주어집니다.

그러나 은총을 받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은총이 비라면...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내립니다.

그러나 빗물을 작은 잔에 받으면 작은 잔만큼의 빗물만 받고

저수지처럼 큰 곳에 받으면 저수지를 채울 정도로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을 적게 주신다고 투덜거리기 전에

우리가 그 은총을 받기 위해 얼마나 큰 그릇을 준비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뜨거운 믿음, 열렬한 소망, 그리고 깊은 사랑, 열성 등등...

신앙생활이란 은총을 받아 담아두는 그릇을 키워가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 나아갈 때 겉옷을 벗어 던집니다.

 

어쩌면 그 겉옷이 전 재산이었을 가능성이 있고, 생계 수단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그걸 버립니다.

나중에 다시 챙겨 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랬다면 '벗어 던지고' 라는 말을 일부러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리 자캐오도 예수님을 만난 뒤에

자기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놓습니다.

 

'눈먼 거지가 입고 있던 겉옷'이라는 말은 좋은 묵상 주제가 됩니다.

당시에 일반 서민들에게 겉옷은 재산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습니다.

밤에 잘 때에는 이불 역할도 했습니다.

그래서 돈을 꾸어주더라도 겉옷은 담보로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거지에게 겉옷은 아주 중요한 재산이었을 것입니다.

그 중요한 것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 많은 재벌들에게는 가지고 있는 부동산, 빌딩, 공장, 주식이

거지의 겉옷일 수 있습니다.

거지가 밤에 얼어죽는 것을 두려워해서 겉옷을 애지중지 하듯이

재벌들이 부동산과 빌딩과 공장과 주식을 애지중지...

다시 말해서 재벌과 거지가 다를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는 꼴을 보면.

 

우리에게도 그런 '거지의 겉옷'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재산 가치가 얼마가 되든,

자기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비싸고 귀중한 것이든 상관없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정말 하찮은 것들.

모두 다 버려도 그만인 '거지의 겉옷'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버리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해도,

너무 아까워서 무덤까지 가지고 간다고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정말 귀중품이라면 도굴꾼들 차지가 될 뿐인데.

 

'거지의 겉옷'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있어서 필요가 없는 것들을 모두 뜻합니다.

어떤 물건일 수도 있고, 마음속의 일일 수도 있고, 낡은 삶 전부일 수도 있습니다.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버리는 것은 아주 적고,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는 것은 너무 많다면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만난 뒤에도 여전히 눈먼 거지로 살게 될 것입니다.

 

낙타와 바늘구멍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 청년,

그는 버리고 싶어하면서도 아까워서 버리지 못한 사람들의 대표입니다.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는 그 심정,

사실 그런 심정으로 살고 있는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아주 많습니다.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으로는 실천이 안 되는 것.

 

그래서 여기서 다시 필요해지는 것은 '열렬한 소망'입니다.

바르티매오가 과감하게 겉옷을 벗어 던지고 낡은 삶을 청산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열렬한 소망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버리고 싶어 하면서도 아까워서 버리지 못한 낡은 삶,

그 낡은 삶을 버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곧 열렬한 소망입니다.

 

그렇다면 그 열렬한 소망은 어떻게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입니까?

스스로 뜨거워지지 않는다면 누가 뜨겁게 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열렬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바르티매오가 처음에 예수님을 부르던 태도가 하나의 대답이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뜨거워지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은총을 은총으로 알아보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낡은 삶을 버리기가 어렵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버렸던 삶으로 다시 되돌아가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뜨거워졌다가도 다시 식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실상 또 하나의 바르티매오입니다.

그냥 속세에서 거지처럼 속물로 살아갈 것인가,

영적으로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 새 인생을 살 것인가,

매일 매일, 매 순간 순간, 그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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