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8주간 금요일>(2009. 10. 16. 금)
<타임머신, 또는 노스트라다무스>
얼마 전에 ‘타임머신’ 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보았습니다.
과학자가 주인공인데,
애인과 산책을 하던 중에 애인이 강도의 칼을 맞고 죽게 됩니다.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던 주인공은 타임머신을 발명하게 되고
사건이 나던 날로 되돌아가서 애인의 죽음을 막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시도를 해도 애인은 그냥 죽게 됩니다.
주인공은, ‘왜 애인의 죽음을 막을 수 없는가?’
라는 질문의 해답을 구하려고 미래로 갑니다.
그 해답은... ‘애인이 죽었기 때문에 타임머신을 발명한 것이다.’ 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애인이 죽었기 때문에 타임머신을 발명할 수 있었는데,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서 애인의 죽음을 막을 수 있다면
타임머신이라는 기계는 발명되지 않는 것이고,
그러면 과거로 돌아갈 수가 없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면 애인의 죽음을 막지 못하는 것이고......
한 마디로 말해서 이미 이루어진 과거는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타임머신이라는 기계는 한 마디로 말해서 헛된 공상의 산물일 뿐입니다.
그럼 미래의 일은 어떨까? 또 예언이라는 것은?
만일에 미래가 정해져 있고 아무도 그것을 바꿀 수 없다면
그 미래를 미리 아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미래라면 현재의 삶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정해진 미래를 향해서 가는 것이라면 지금 어떻게 살든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미래가 정해져 있고 누군가 그것을 알고 있다면...
예를 들어, 선거제도 같은 것이 무의미해집니다.
낙선되는 것으로 정해진 사람들은 아예 출마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학교 입학시험도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떨어질 사람들은 원서도 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프로야구 코리안 시리즈도 없어질 것입니다.
승패가 정해져 있다면 누가 시합을 하고 누가 관람하겠습니까?
전쟁 같은 것도... 안 일어날 것입니다.
패배할 나라들이 미리 항복해버릴 것입니다.
그러니 예언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미래를 알고 싶어서 점을 치고
자칭 예언자라는 자들에게 자문을 구합니다.
그런 일들은 모두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몸부림일 뿐입니다.
노스트라다무스, 토정비결, 정감록... 그런 책들을 뒤적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정해져 있지 않은 미래를 예언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책들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언들은 정해진 미래에 대한 예언이 아닙니다.
미래의 일을 이야기하긴 하지만,
그것은 논리적인 결말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주로 ‘회개하지 않는다면’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들인데,
반대로 말하면, ‘회개한다면’ 멸망을 피할 것이라는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 묵시록의 예언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이런 재난, 저런 재난을 겪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반대로, ‘회개한다면’ 어떤 재난이 닥치더라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앞에서 말한 영화는, 주인공이 과거를 바꾸는 일을 포기하는 대신에
미래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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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과거는 바꿀 수 없습니다.
다만 회개할 수 있을 뿐입니다.
회개란 미래를 위한 일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잘못을 반복하게 되고, 그런 사람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앞일을 몰라서 불안해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태도입니다.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이 불안해합니다.
자신이 잘못한 일들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이 불안해합니다.
하느님의 섭리와 자비를 믿지 못하는 사람이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긴 있습니다.
논리적이지도 않고, 누군가의 잘못도 아니고,
과학으로도 예측할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
그런 일들이 돌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을 겪게 되면 사람들은 이건 운명이다, 라고 쉽게 체념합니다.
미래가 정해져 있지 않다고 생각을 해도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다면 사람들은 좌절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안 되는 일들에 대해서
돈과 권력의 힘으로 대충 처리하려고 합니다.
당장 눈앞의 문제만 해결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인생을 길게 보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적당히 반칙을 하거나 편법을 쓰더라도
우선 시합에서 이기고 보자는 생각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시합에서 이길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미신의 힘을 빌리려고 합니다.
정체도 알 수 없는 귀신에게 자기 사정을 호소합니다.
사실 귀신도 피조물일 뿐입니다.
만일에 귀신이라는 것들에게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자기 자신부터 그렇게 귀신으로 떠돌지는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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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두려워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서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올바르게 알고 제대로 섬기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제대로 믿고 공경하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고 다스리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권능이 어느 정도인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섭리와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내 인생이 왜 이 모양입니까? 왜 나를 이렇게 살게 하십니까?’
라고 하느님께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믿을 뿐입니다.
우리는 믿고 기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창세기의 요셉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노예로 팔려간 것은 정말 억울한 일이었습니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것도 정말 억울한 일이었습니다.
시종장이 그의 은혜를 갚지 않고 잊어버린 것도 무척 속상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감옥 생활은 긴 세월이었습니다.
현실 세계에서도 그렇게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많습니다.
누명을 쓰기도 하고, 너무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을 겪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행운과 자신의 불운이 비교되기도 하면서
홧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이고, 그것이 인간 세상입니다.
그럴 때 눈앞만 보는 사람들은 너무 억울해서 돌아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생을 길게 보는 사람은 참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미래가 정해져 있지 않으니 지금부터라도 만들어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얼마나 길게 보아야 합니까?
인간의 수명이라는 것이 한정되어 있는데...
전에 금속공학을 배우던 시절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금속 제품의 부식을 연구하는 것은 그렇게 긴 세월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콘크리트의 부식을 연구하는 것은 아주 긴 세월이 필요합니다.
십년, 이십년이 아니라 몇십년 이상 관찰하고 기록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당대에 연구를 마치지 못하고 후배에게 넘겨야 합니다.
인내력이 없으면 못할 연구입니다.
누가 관심을 가져 주지도 않는 그런 연구도 그렇게 끈질기게 하는데,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바란다면 더 긴 세월을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죽은 다음의 내세까지 우리 인생을 길게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세를 믿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당대에 다 해결하려고 합니다.)
신앙인이란 ‘영원’이라는 시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영원’이라는 시간과 비교한다면 인생은 너무나 짧습니다.
살면서 겪는 고통도 잠깐일 뿐입니다.
살면서 누리는 행복과 쾌락도 잠깐의 일일 뿐입니다.
그래서 믿음 없는 사람들은 인생이 너무 허무하다고 말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다음 생을 준비하기 때문에
허무하다고 한탄할 겨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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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노스트라다무스는 미래를 바꾸지 못했습니다.
긴가민가, 알쏭달쏭... 애매모한 글로 사람들을 현혹시켰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예언서들은 세상을 바꾸었고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는 세상의 미래를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그 말씀을 따르기만 한다면 그 힘이 곧 우리의 힘이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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