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8주간 목요일>(2009. 10. 15. 목)(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전에 후배 신부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위선도 자꾸 하다보면 진짜 선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아마도 그 말은,
'착한 척이라도 자주 하다보면 진짜로 착해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또는, '자꾸 열심한 척 하다보면 진짜로 열심해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라는 뜻으로 한 말일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세월이 흘러도 그 말이 자꾸 떠오릅니다.
'나 자신이 위선자가 아닐까?',
'내가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위선자일 수도 있다.'
라는 생각을 스스로 할 때가 많으니까...
그런데... 정말 위선이라도 자꾸 행하다보면 진짜 선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작은 선을 자꾸 행하다보면 정말 큰 선을 행하게 된다, 라는 말은 맞지만,
거짓 선을 자꾸 행하다보면... 진짜 선을 행하게 되기는커녕
진짜로 아주 큰 거짓 속에 빠져버리는 것,
그것이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위선을 자꾸 행하다보면 진짜로 돌이킬 수 없는 위선자가 될 것입니다.
거짓으로 열심한 척 하다보면... 모든 일을 다 망치고 말 것입니다.
쓰레기통을 아무리 아름답게 꾸며도 쓰레기통은 그냥 쓰레기통입니다.
껍데기를 아름답게 꾸미기 전에 먼저 속에 있는 쓰레기를 버려야 합니다.
위선 ... 거짓 선은 그냥 거짓이고... 죄악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하느님을 속이려고 시도하는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거짓 선을 자꾸 반복하면 나중에는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구별도 못할 것입니다.
거짓으로 열심한 척 하다보면,
아마도 스스로 자신은 열심하다고 착각에 빠질 것이고,
정말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을 하나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게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거짓으로 착한 척 하고, 거짓으로 열심한 척 하고, 거짓으로 믿는 척 하고...
사람들은 그런 모습에 다 속았지만, 예수님은 그 속을 꿰뚫어보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비판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과 사람들을 더 이상 속이려고 하지 마라." 라고...
저에게
'위선도 자꾸 하다보면 진짜 선이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라는 말을 했던 그 후배 신부는 얼마 안 가서 환속했습니다.
거짓으로 열심한 척 하기가 정말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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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들의 주 임무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지만,
또 하나의 임무는 사람들의 거짓을 폭로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속마음을 고발하고, 폭로하고, 그래서 그들의 양심을 후벼파고...
그건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달래고 타이르고 권고하지만,
그게 안 통하면 결국...
마지막에는 사정없이 꾸짖고 비판하고 고발하고...
그렇게라도 해서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사람들에게 '독사의 족속들아' 라고 욕설을 퍼부은 것도,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불행'을 예고하신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를 못하니까... 욕설이라도 해야만 했다는 것.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신 것도 일종의 욕설(?),
말하자면 충격요법을 쓰신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이 회개를 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개를 하기는커녕 듣기 싫어하고
예언자들을 미워하고, 그리고... 죽여버렸습니다. 아예 입을 막아버리려고...
그래서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도 죽어야만 했습니다.
왜 듣기 싫어할까?
라고 묻기 전에... 우리 자신을 생각해보면,
비판의 소리를 듣기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비판 정도가 아니라 욕설 수준이라면 누구나 다 화가 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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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보다 젊었을 때에는 저의 강론이 무척, 아니, 지나치게 강했다고 기억합니다.
세례자 요한을 흉내냈다고나 할까...
제가 쓰는 글도 무척 강경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글 좀 부드럽게 써라.' 라는 충고를 자주 들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일 하나,
김영삼 정권 때 명동성당에 공권력이 투입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성역을 침범했다는 것에 대해서 천주교가 분노했고,
전국의 정의구현 사제단이 모여서 시위를 했습니다.
그런데 시위를 하기 전에 먼저 회의를 했고 성명서를 준비했습니다.
누군가 성명서 초안을 작성해와서 그것을 전체 사제단이 검토를 하고
수정할 것이 있으면 좀 수정하고,
그래서 채택되면 바로 발표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제가 제동을 걸었습니다.
성명서 문구가 너무 약하다고...
제가 이의를 제기하고, 더 강경한 문구로 바꾸자고 주장하고...
다행히 다른 신부님들이 동의를 하긴 했는데,
성명서 발표가 예정보다 많이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떻든 아주 강경한 성명서가 발표되었고...)
그때 '내가 이렇게까지 강경파였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스로는 강경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그 일을 계기로 평소에 저의 글이나 강론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반성하는 것은,
세례자 요한을 흉내낸 것은 좋은데
저의 강론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라는 점.
김영삼 정권 시절, 본당의 공무원 신자들에게 미움을 받았었고,
교구 주보에 글을 연재하다가 평협 임원들에게 미움 좀 받았고... 기타 등등...
하여간에 열정만 있었고, 지혜는 부족했다는 것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 것인데,
누군가 제가 하는 만큼, 똑같은 강도로 저를 비판한다면,
아마도... 저 자신도 그것을 견뎌내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냥, 욱..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예언자들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죽이고 싶어 하는 것을 이해할 것도 같습니다.
양심이 너무나도 심하게 찔리면 회개보다는 화가 먼저 치밀어오른다는 것,
그것이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라는 것.
정말 스스로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 '너, 이 나쁜 놈아.' 라고 비난하면
잘못했다는 생각은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그냥 화가 먼저 난다는 것.
그래서 예언자들의 삶이 고달프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을 안 할 수가 없었으니...
그러니 어찌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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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품을 앞두고,
당시 친하던 어떤 분에게 이런 부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명칭이 뭐라더라...
동정 서원과 수도 서원을 하지만 공동체 생활은 하지 않고
속세에서 각자 개인으로 지내는... 수도회 비슷한 단체 소속이었던... 분이었는데,
제가 그분에게 무슨 부탁을 했냐면,
"제가 신부가 된 다음에, 이건 아니다, 싶은 모습이 보이거든
'너 그러지 마라.' 라고 꼭 이야기해 주십시오." 라는 부탁.
그리고 같은 부탁을 어떤 신자분에게도 또 했습니다.
저에게 사정없이 직설적으로 말할 수 있는 분이었기 때문에...
세월이 흐르면서 가끔 두 분에게서 지적도 받고, 충고도 들었습니다.
누군가 채찍질을 해준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제가 먼저 부탁한 일이기 때문에
어떤 충고라도 달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입니다.
아무래도 모르는 사람이 느닷없이 찾아와서 비난하는 것보다는
제가 먼저 부탁했던 분들이 저의 부탁대로 저를 꾸짖어 준다는 것,
저는 그게 참으로 큰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마음으로부터 정말로 존경했던 영적 지도 신부님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가끔씩 찾아가서 고해성사도 보고, 신앙 상담도 하고,
본당사목 문제에 대해서 의논도 하고... 그랬었는데...
마음으로 의지하고, 힘을 얻고, 조언도 듣고,
때로는 일부러 찾아가서 야단도 맞고... 그랬는데...
세월이 흐르니 스승들이 자꾸 떠나가시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지금 저는 고해성사를 볼 때면 일부러 저보다 후배 신부님을 찾아갑니다.
그것도 한참 아래쪽의 후배 신부님들... 가능하면 새신부님들...
그러면 원칙대로 고해성사를 주고, 야단도 치고... 보속도 무겁게 주고...
그러면서 깨닫게 된 것 하나는
저에게 선배 신부님들이 고해성사를 보러 오는 것은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냥 후배였기 때문이었다는 것.
왜 후배 신부님들에게 고해성사를 보는 것이 더 나을까?
그것은 후배 신부님들은 선배 신부님들에게 '괜찮다.' 라는 말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쯤은 별 것 아냐...' 라는 말을 할 수가 없고
원칙대로 훈계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요.
후배든 선배든... 고해성사에는 훈계가 따르는 법입니다.
후배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야단을 맞는 신부의 모습을 생각하면...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해서 자신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가끔 다른 신부님들을, 또는 사제단을 비판하는 글을 쓸 때가 있는데,
사실은 훌륭한 신부님들이 더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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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죽을 각오를 하고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미움 받을 각오를 하고 욕설을 퍼붓기도 하는 사람입니다.
목적은 하나입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사람들을 회개시키려는 것입니다.
양심이 찔린다고 예언자를 미워하고 죽인다면
우리도 바리사이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자신의 양심을 찔러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성경을 읽다가, 강론을 듣다가, 또는 어떤 글을 읽다가,
마음이 불편해지면, 그게 바로 양심이 찔리는 중이라는 것,
그러면 얼른 마음을 바로잡고 자기 성찰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
회개란...
부끄러움을 아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옛날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을 회개시킨 것은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가 예언자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이야기 속의 임금님은 아이의 말을 귀담아 들었고...
누군가 우리의 발가벗은 모습을 지적할 때,
부끄러워할 줄만 알아도 회개가 시작되는 것인데,
우리는 너무 쉽게 성질을 내고 맙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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