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8주간 화요일>(2009. 10. 13. 화)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겁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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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율법의 목표는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레위기 19장 2절)
거룩하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 율법의 목표였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율법 실천을 통해서 깨끗해져야 했습니다.
온갖 복잡한 정결예식을 통해서 몸을 깨끗이 하고,
십계명을 비롯한 여러 계명 실천을 통해서 도덕적으로 깨끗해져야 했습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은 몸과 마음의 깨끗함으로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도달하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시대의 율법은 원래 몸과 마음의 깨끗함을 모두 다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마음의 깨끗함은 희미해져가고
몸의 깨끗함만 강조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마음의 깨끗함은 눈에 보이지 않고
몸의 깨끗함은 눈에 보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특히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겉으로는 정말 깨끗하게 살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은 깨끗하지 않다고 비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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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시대, 즉 예수님 시대의 계명 실천의 목표도 같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오복음 5장 48절)
'거룩함'이 '완전함'으로 바뀌어 있지만, 사실상 같은 말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하느님처럼 되는 것."
구약시대 유대인들은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깨끗해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바로 '자비'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복음 6장 36절)
예수님은 하느님의 완전하심과 자비하심은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비 -- 이것은 곧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주요 계명은 모두 '사랑'을 강조하는 계명입니다.
'사랑'을 통해서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용한 마태오복음 5장 48절이나 루카복음 6장 36절은
모두 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가르침 속에 있는 구절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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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 특히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깨끗함만 추구하다가
껍데기만 깨끗하고 속은 깨끗하지 못한 상태로 전락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속에 담긴 것, 즉 사악과 탐욕을 자선(자비, 사랑)으로 바꾸라는 명령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들이 목표로 삼았던 깨끗함, 거룩함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만이 --- 오직 사랑만이
하느님의 깨끗함, 거룩함, 완전함에 도달하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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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천 년 전의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비판하고 분석하는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더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목표는 하느님께 도달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표현을 하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표현을 하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표현을 하든... 다 같은 말입니다.
하느님처럼 되기를 바라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이천 년 전, 또는 그 이전의 수천 년 전의 유대인들처럼
깨끗함을 통해서 그 목표에 도달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진짜로 시대착오적인 모습입니다.
철저하게 십계명과 교회법과 각종 규칙들을 지키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은 무조건 안 하고, 해야 하는 일은 무조건 하면서,
그것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믿고,
그렇게 하지 못하면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면서 지옥에 갈 것이라고 무서워 떨고...
물론 철저하게 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 자체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춰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할만큼 했다. 나는 철저하다. 나는 흠도 없고 죄도 없다.'
라고 스스로 만족하는 순간... 그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외적으로 철저하게 살면서,
동시에 내적으로 완벽하게 사랑도 실천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살아서 성인 성녀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저는 참으로 죄도 많고 부족한 점도 많고 사랑도 부족하고...
그러면서도 조금이라도 완전성에 도달하고 싶어서 기도하고 묵상하고
이렇게 이런 글도 쓰고 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중에
정말 완벽하게 성인 성녀의 경지에 도달하신 분이 있다면...
더 이상 이 글을 읽지 않아도 좋습니다.
아니, 이런 글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하늘나라에 가야 할 테니까...
우리들, 보통 사람들은
완벽함을 추구하는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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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는 아픈 사람들이 가는 법입니다.
목욕탕은 더러워진 몸을 씻으려는 사람이 갑니다.
고해실은 죄를 지은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이런 말에 자꾸 토를 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프지 않아도 건강을 유지하려고 병원에 가고,
몸에 때가 없어도 그냥 목욕하는 사람도 있고,
죄가 없어도 죄를 안 지으려고 고해실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지만...
자꾸 그렇게 세세하게 분류하고 따지면, 핵심을 놓칩니다.)
성당은
성인 성녀가 되고 싶지만 아직은 성인 성녀가 되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거의 대부분.
몸의 때를 씻으려고 목욕탕에 가서
서로 다른 사람의 때를 밀어주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하느님처럼 완전해지고 싶지만 완전하지는 못한 우리들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모두 완전함을 추구하는 부족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 부족함을 무엇으로 채우느냐가 항상 숙제가 됩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처럼 깨끗해지려는 노력은...
그것은 그 자체로는 도달 불능입니다.
왜?
완전한 깨끗함은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방법,
'사랑'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완전함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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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음식을 먹을 때 포크와 나이프와 스푼 사용법을 모르면
무식하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사용법 때문에 너무 신경이 쓰여서 음식 맛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차라리 무식하다는 말을 듣더라도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한국 음식을 먹을 때 젓가락 사용법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음식을 맛있게 먹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느님을 맛보고, 하느님을 느끼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신앙생활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계명 실천은 저절로 됩니다.
사랑이 부족하면 ...... 바리사이가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새번역 성경이 마음에 안 든다고 공동번역 성서만 고집하는 것은 개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목자가 공동체의 전례에서도 공동번역 성서만 쓰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새번역 성경은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이미 신자들이 다 샀고, 읽고 있는데...
주교회의에서 신자들을 위해서 매일미사책을 매월 발행하는데,
매일미사책 때문에 성경을 안 읽는다고 반대하는 것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를 하려면 처음부터 반대하고 출판을 막았어야지...
지금 와서 어쩌라는 것입니까?
몸이 불편한 할머니들이
매일미사책이라도 들고와서 읽을 수 있음에 감사드려야지,
무거운 성경책만 들고오라고 강요하는 것이 올바른 사목자의 태도이겠습니까?
그건 사랑이 부족한 것입니다.
안식일날 제자들이 밀 이삭 몇 개 따먹었다고 시비를 거는 모습,
지금의 사목자들에게도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밀 이삭을 따먹는 것을 내버려 두셨음에 주목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동을 내버려 두신 정도가 아니라 두둔하기까지 하십니다.
예수님의 그 모습이 바로 '사랑'입니다.
배가 고파서 밀 이삭 몇 개 따먹는 제자들에 대한 '안쓰러움',
그 '안쓰러움'이 바로 스승님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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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사랑이 쌓이고 쌓여서 큰 사랑으로 성장합니다.
지하철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는 그런 사랑만 생각하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작은 배려를 할 줄 모른다면,
그건 순서가 바뀐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누군가 만일에,
나는 나라가 위기에 처한다면 유관순 열사처럼, 윤봉길 의사처럼 싸우겠다,
라고 말을 하면서도...
세금 내는 것 싫어하고, 교통규칙 지키는 것 싫어한다면... 그건 애국심이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모든 사람이 다 순교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거창한 극기 고행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전 재산을 바쳐서 성당을 지어야 한다고 강요받지도 않습니다.
당장 필요한 것은 '작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처럼 완전해지고 싶다면
예수님 가르침대로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작은 사랑을 먼저 실천해야 합니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작은 친절 한 번,
작은 미소 한 번, 따뜻한 배려 한 번으로 사랑이 시작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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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을 다 쓰고 마치려다가 한 가지 일이 떠오릅니다.
옛날에 어떤 고속버스에서 생긴 일...
어떤 할아버지가 고속버스 안에서 담배를 피웠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젊은 여성이 그 할아버지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그 태도가 좀 앙칼졌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뒷자리에 어떤 신부님이 앉아 계셨습니다.
그 신부님이 그 젊은 여성에게 한 마디 했습니다.
나이 드신 분에게 그게 무슨 태도냐, 당신은 부모도 없냐, 라고.
이 이야기는 바로 그 신부님에게서 제가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신부님은 그 여성을 야단친 일을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씀하셨지만...)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젊은 여성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 할아버지가 잘 한 것도 아니다, 라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이 가득 타고 있는 버스에서 담배를 피우는 할아버지와
그것을 불손한 태도로 따지고 항의하는 여성 사이에서
사목자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은?
부모에게 효도하라, 어른을 공경하라, 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 어른들이 먼저 실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큰 것을 바란다면 작은 것을 먼저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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