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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중제19주간목요일(090813.목)

도구 Ludovicus 2009. 8. 13. 09:15

<연중 제19주간 목요일>(2009. 8. 13. 목)

 

<용서라는 이름의 보험>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이야기 하나를 들려 주십니다.

 

임금에게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이 그것을 몽땅 탕감 받았는데,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자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다가 그 동료를 감옥에 가두었다는 이야기.

 

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석달치 품삯입니다.

만 탈렌트는 수십 조원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입니다.

 

이 이야기는 흔히 이렇게 해석합니다.

임금님은 하느님을 나타내고,

만 탈렌트나 되는 빚을 탕감 받은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용서를 받은 것이라고.

우리가 그처럼 하느님의 큰 용서를 받았으니,

이웃의 작은 잘못은 기꺼이, 무한정 용서해야 한다고.

 

뜻도 분명하고 가르침도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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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가복음의 집 나간 아들의 비유와 연결시켜서 생각해봅니다.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큰 용서를 받았습니다.

아마 엄청나게 감격하고, 기쁘고, 고맙고... 그랬겠지요.

그런 마음이 쭉 유지된다면 형이 좀 서운한 말을 하더라도 참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에... 이건 진짜로 만일의 경우입니다. 제가 그냥 상상해 본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용서를 받고 다시 가족들과 함께 살게 된 작은 아들이

시일이 흐르면서 그 감격과 기쁨이 희미해진다면,

그래서 어느 날 형과 다투게 되고, 형에게 못된 짓을 한다면...

 

만 탈렌트를 탕감받고서도 백 데나리온을 갚으라고 강요한 사람의 모습이 되겠지요.

 

요한 복음의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에도 연결시켜 봅니다.

 

어느 날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끌려왔던 그 여인,

돌에 맞아죽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예수님 때문에 살아나게 됩니다.

 

누구든지 죄 없는 자부터 돌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여자를 살려낸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를 살려내셨을 뿐만 아니라 죄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만일에... 이것도 진짜 만일의 경우입니다. 제가 그냥 상상해 본 것입니다.

 

그 여자가 집으로 돌아가서 착하고 행복하게 살았다, 라고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시일이 흘러서 어느 날, 그 여자가 자기 남편이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하고

그래서 남편과 상대 여자에게 복수를 했다면...

 

역시 만 탈렌트를 탕감받고서도 동료의 빚을 받아내려고 했던 그 사람의 모습입니다.

 

성경 말씀은 따뜻하고 훌륭한 원칙이지만, 인간 세상의 현실은 차갑기만 합니다.

 

어떤 죄를 짓고 교도소에 들어온 재소자가

하느님을 믿게 되고,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고...

고해성사도 보고,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기뻐하고...

그래서 착하게 살아야 하는데...

 

같은 감방의 다른 재소자의 사소한 잘못에 분격해서 폭력을 휘두르고,

다투고, 싸우고, 중상모략하고.... 제가 자주 겪었던 일입니다.

 

왜 안 될까요?

자신의 큰 잘못은 시일이 지나면 잊어버리고,

옆 사람의 작은 잘못은 크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받은 것은 잊어버리고 받아낼 것만 기억하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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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복음 말씀에 있는 이야기의 뜻이 분명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도 분명한데,

그래도 뭔가 좀 부족하고 아쉬운 느낌이 드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큰 죄를 짓지 않는다는 점, 바로 그것입니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그렇게 큰 죄는 짓지 않습니다.

살인, 강도, 강간, 사기, 횡령... 그건 보통 사람들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 중범죄들은 진짜 예외적이고 특별한 경우입니다.

 

일반적인,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짓는 죄는

그저 작은 거짓말, 또는 말 실수,

그저 조금 미워하고 화를 내는 정도,

그저 조금 게으름을 피우는 정도,

법을 위반한다고 해도 교통법규를 위반하는 정도,

대죄라고 할 수 없는 소죄들의 연속이라고나 할까...

그냥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신부들은 고해성사를 통해서

 보통 사람들이 평범하고 착하고 단순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살인, 강간, 강도 같은 중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기 때문에,

그저 일상적인 자잘한 죄나 지을까, 큰 죄를 지은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크게 용서를 받는 체험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쳤다는 교리나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에 모든 인간에게 원죄가 있다는 교리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실감나는 교리는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대신 죽어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고,

십자가가 없었다면 우리가 지옥에 갔을 것이라는 것도 실감나는 일이 아니고...

그게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만 탈렌트나 되는 빚을 진 기억이 없는데,

그 빚을 탕감받았다는 기억은... 더욱더 있을리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끔찍하고 무거운 죄를 지은 적이 없으니,

하느님의 큰 용서를 받았다는 느낌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옆 사람의 작은 잘못에 노발대발, 화가 나는 것입니다.

화를 내면서 '더도 말고 나처럼만 살아라.' 라고 큰소리치는 사람도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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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소신학교라는 것이 있었을 때,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대신에 바로 소신학교에 입학한 신부님들이 있습니다.

그 전에는 아예 중학교 과정부터 신학생 신분이었던 신부님들도 있습니다.

 

사춘기 시절부터 줄곧 신학생이었으니

사실상 세속과 완전 차단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을 기회도 없었겠지만, 실제로도 별로 죄를 짓지 않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신부님들일수록 (전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사람들에게 무척 엄하고 차갑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를 접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죄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죄를 경험해야 죄인들을 이해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누구보다 더 죄인들을 이해하고 사랑하셨던 예수님,

 예수님께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들에게 따뜻하셨던 건 아닙니다.)

 

그런데 하여간에, '나는 죄를 지은 적 없다.' 라는 자부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냉정하고 차갑고 엄격하게 대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합니다.

물론 고해성사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이로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관련된 문제에서도 그렇게 한다면... 그건 문제입니다.

 

용서하기보다는 꾸짖고 야단치는 모습,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 너그럽지 못하고... 멸시하고 업신여기고...

용서는커녕 점점 더 차가운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자주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용서'라는 말이 머리속에 있긴 있는데,

그래서 강론을 할 때 용서를 주제로 강론도 잘 하는데,

실제로 자기와 관련된 문제가 되면 전혀 용서를 못하는 모습,

성직자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소신학교 출신이 아닌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런 죄를 지은 적 없다는 단단한 자부심과

신자라면, 신부라면, 수도자라면,

그런 죄를 지으면 안 된다, 라는 확고한 사고방식이 합해져 있는 분들을 보면....

신부인 저도 무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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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복음 말씀으로 돌아가서...

 

하느님께 만 탈렌트의 빚을 진 일이 있습니까?

진짜 그런 빚을 진 일이 있었다고 실감합니까?

그래서 그 빚을 탕감 받은 적이 있다고 실감합니까?

 

실감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다보니 태어나 있었고, 어찌어찌해서 신자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빚을 진 기억이 없는데 탕감받았다고 기뻐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 동료에게 백 데나리온을 꾸어주고 못받은 일이 있습니까?

 

그건 많을 것입니다.

동료, 친구, 가족, 이웃.... 서운하고 속상한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살다보면 복수심에 불탈 수도 있습니다.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알고 있는데,

저 놈만큼은 예외적으로 용서할 수 없다,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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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실감나지도 않는 만 탈렌트의 탕감을 생각하라고 강요할 수 없습니다.

별로 죄를 지은 기억이 없다면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를 크게 받은 일이 없다면 없는 것입니다.

없는데 있는 것으로 생각하라고 억지로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건 일종의 보험입니다.

 

운전을 하면서 평생 사고를 안 낼 자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동차 보험은 들어야 합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겠다고 큰 소리쳐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미리 미리 이웃을 용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죄를 짓게 되고,

그래서 하느님께 용서를 청해야 하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평소에 이웃을 용서하면서 살았던 사람과

용서라는 것을 모르고 차갑게 살았던 사람은 분명 다를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한 번 주신 용서를 취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고해성사가 취소되는 법은 없습니다.)

 

지나간 일의 용서를 생각하면서 이웃을 용서하는 일보다는

앞으로 받게 될 용서를 생각하면서 이웃을 용서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살면서 계속 죄를 안 짓는다면, 그건 정말 큰 은총입니다.

그러나 어쩌다가 죄를 지었는데 용서를 받게 된다면, 그것도 은총입니다.

 

용서는 우리 자신을 위한 보험입니다.

내가 지은 줄도 모르고 있던 죄들, 또는 잊어버리고 있었던 죄들,

또 앞으로 지을지 어떨지 알 수 없는 죄들...

죽기 전에 미리 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용서라는 이름의 보험으로.

 

종부성사를 줄 때마다

임종을 맞이한 사람이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고 이웃의 용서를 청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나는 앞으로 죄 지을 일 없다. 그러니 용서 청할 일도 없다.

그러니 우선 저 나쁜 놈에게 복수부터 해야겠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 순간 그는 이미 죄를 지은 것입니다.

 

복음 말씀 끝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렇게 하실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하느님의 용서는 미래형입니다.

   - (미래에 우리가 청하게 될 용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는 것은 현재형입니다.

   -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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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Fr.송영진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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