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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탄팔일축제내제6일(091230.수)

도구 Ludovicus 2009. 12. 30. 07:35

<성탄 팔일 축제 내 제6일>(2009. 12. 30. 수)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

십자가 밑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로마 군대의 백인대장은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인정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고 구세주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백인대장은 십자가 밑에서 처음으로 신앙고백을 한 외국인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예수님을 찾아와서 경배를 드린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고 경배를 드린 첫 번째 외국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날 때와 돌아가실 때, 생애의 처음과 끝에서

마치 대칭을 이루듯이 외국인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신앙고백을 하거나 경배를 드렸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을 알아보고 믿음을 갖는 것은

열린 마음, 순수한 마음, 어린이와 같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났거나 함께 지낸 사람들은 많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보지 못했고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아주 적은 수의 제자들만 예수님을 믿었고, 따랐습니다.

 

예수님 생애의 처음과 끝에서 대칭적으로 외국인이 등장한 것처럼

또 하나의 대칭이 있습니다.

12월 30일의 복음말씀에 등장하는 ‘한나’ 라는 여자 예언자와

예수님의 무덤 앞에서 울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한나와 막달라 마리아는 아주 대조적인 인물입니다.

한나는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평생 성전에서 살았는데,

아마도 수도 생활 비슷한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과거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어떻든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생애의 처음과 끝에 등장하는 두 여인의 삶은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따르는 두 가지 방식을 보여줍니다.

 

한나는 평생 경건하게 살다가 인생의 마지막쯤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경건하게 살았던 인생의 결실을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막달라 마리아는 젊었습니다.

여든네 살이었던 한나와 비교한다면

마리아는 사실상 인생의 시작 부분에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나는 일생을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아서 예수님을 만난 것이고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서 회개하고 그때부터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예수님 생애의 처음과 끝에서 또 하나의 대칭을 더 찾는다면

예수님 탄생을 맨 처음 목격한 목자들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끝까지 지키고 있었던 여인들입니다.

목자들이나 여인들은 모두 사회적으로 약자들이었습니다.

 

긴 세월 구세주를 기다렸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인간 예수는 만났지만 그리스도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복음서의 첫 부분에 동방박사들이 등장하고,

마지막 부분에 로마군대의 백인대장이 등장하는 것은

예수님이 유대인들만의 구세주가 아니라 온 인류의 구세주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한나는 진실하고 성실한 신앙인이라면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난 이들이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찾아온 목자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십자가를 끝까지 지키고 서 있었던 여인들도 힘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구세주이십니다.

 

가진 것 많고 힘이 센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로 눈이 가려져서

예수님을 만나도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가진 것도 없고, 하느님 말고는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날 수 있습니다.

 

세속적인 인생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감사할 줄 모르고

스스로 자기 만족이나 자기 과시욕에 빠져 있다면 위험합니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얼마나 고생하고 노력했는지, 그것만 이야기하면서

종교와 신앙의 힘을 비웃기도 합니다.

의지가 약하고 무기력한 사람들이나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비아냥거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그 교만 때문에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 신앙인들의 마음가짐도 반성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님과 함께 살고 있다고 너무 쉽게 말하지만

정말로 예수님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인지 반성해야 합니다.

아니, 그 전에 먼저 예수님을 만나기는 한 것인지를 반성해야 합니다.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안고 성전에 가셨을 때

성전에 달랑 두 사람, 시메온과 한나만 있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제들이 있었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은 시메온과 한나뿐이었습니다.

성전의 사제들은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하느님의 은총이 시메온과 한나에게만 내렸기 때문에?

그랬다 하더라도 왜 은총이 시메온과 한나에게만 내렸을까요?

 

미사를 집전하면서 신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

미사 참례를 하려고 성당에 와서 앉아 있기는 하지만

정말로 미사 참례를 하는 것은 아닌 사람들이 있는 것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몸은 성당에 앉아 있지만 생각은 다른 데 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사를 집전하는 제 눈에도 보입니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몸으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신을 다해서” 만나야 합니다.

몸은 성당에 앉아 있어도 생각이 다른 데 가 있다면 미사 참례를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악수를 하고 포옹을 했다고 하더라도

마음과 생각이 다른 데 가 있었다면 만난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기본 의무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잘하고 있어도

세속에서 사회생활을 하는 모습은 전혀 신자답지 않다면......???

 

연말입니다. 송년회인지 망년회인지를 하고 있습니까?

지난 한 해를 반성하고 새해의 복을 기원하고 있습니까?

신앙인이라면 가장 먼저 반성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과연 예수님을 만났는가? 예수님과 함께 살았는가?”입니다.

예수님을 한 번 만났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만나야 하고, 날마다 함께 살아야 합니다.

왜? 사랑하니까.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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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Fr.송영진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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