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팔일 축제 내 제7일>(2009. 12. 31. 목)
<마지막 때, 한 처음>
12월 31일의 독서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복음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어서
의도적으로 독서와 복음을 그렇게 배치한 것 같습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컴퓨터를 초기화시켜서 처음 상태로 되돌리는 것처럼
인생이라는 것도 다 지우고 처음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컴퓨터라는 기계는 말을 안 들으면 다 지우고 초기화시킬 수 있지만
인생은 그럴 수 없으니 나중에 후회할 짓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후회할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요한복음 3장에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새로 태어나라고 하십니다.
니코데모는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묻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그것이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인생을 처음으로 되돌리실 수 있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일입니다.
이건 단순히 세례 예식이나 회개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의 근본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되었다면 그는 새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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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의 과거는 없어집니다.
하느님은 그 사람의 과거를 기억하시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과거를 기억하지만
하느님은 그의 과거를 기억하시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과거를 궁금해 하지만
하느님은 마리아의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하느님을 믿습니다.
가끔 국경일 같은 때에 대통령 특별 사면 조치로 전과 기록을 말소하는데,
정말 모든 전과가 지워지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문서의 기록은 깨끗이 지운다고 해도 사람의 기억은 지우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기억력이 없으신 분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의 과거는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반대로 새로 태어나기를 거부하고 회개를 거부하는 사람의 과거는
아주 세세한 것까지 다 기억하시는 놀라운 기억력을 가진 하느님입니다.
인간들이 잊고 있었던 모든 것을 다 기억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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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나간 해가 아쉽지 않습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뭘 하겠다고 어떤 계획을 세운 것도 없습니다.
저에게는 항상 ‘오늘’의 연속일 뿐입니다.
오늘 하고 있던 일, 내일도 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내일을 주신다면.
병원에서 퇴원한 후에 저는 조급한 마음을 가졌었습니다.
하고 있던 신약성경 해설을 죽기 전에 마무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당장 죽을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급했습니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마무리’ 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못하면 누군가 할 것이고,
(아니, 누군가가 더 좋은 해설서를 쓰고 있을 것이고)
이미 해놓은 것도 다시 읽으면 고쳐야 할 것이 자꾸 눈에 뜨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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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의 아나운서들은 ‘다사다난했던 한 해’라는 말을 자꾸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작년에도 그랬고, 올해처럼 내년에도 다사다난할 것입니다.
세상은 늘 그렇듯이 ‘다사다난한’ 한 해를 지내게 될 것입니다.
해가 바뀌는 것 자체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건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정해놓은 날일뿐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늘입니다.
하루살이의 오늘이 아니라,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의 오늘입니다.
그래서 한 해의 마지막 날에
“한 처음 말씀이 계셨다.” 라는 복음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윤회를 믿지 않습니다.
인생은 한 번입니다. 속편도 없습니다. 별책 부록도 없습니다.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갈 뿐입니다.
우리가 되돌아갈 곳은 하느님이 계신 곳입니다.
한 처음 세상을 만드신 분이 세상을 마감하실 것입니다.
복음 말씀은 바로 그것을 묵상하게 합니다.
시작하신 분이니 끝내시는 것도 그분이 하실 것입니다.
스스로 끝내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인생을 포기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나온 인생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새로 태어날 수는 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 한 번 받았다고 새로 태어나는 일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날마다 오늘, 우리는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12월 31일도 ‘오늘’이고, 1월 1일도 ‘오늘’입니다.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그 ‘오늘’을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내일’은 종말 후의 날들입니다.
오늘을 제대로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내일은 없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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