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신앙 자료

[스크랩] 관상기도

도구 Ludovicus 2009. 10. 25. 20:25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인간의 조건)
-. 그리스도인은 “나를 따르라”는 복음의 초대 받은 자들이다.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영적 여정을 걸어간다. 이 여정은 사다리를 올라가는 것, 또는 위로 올라가는 여정이다. 그러나 발달 심리학, 무의식의 이해를 따르면 영적 여정은 아래로 내려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 행동 동기, 무의식적인 정서 프로그램, 우리의 반응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참조 : 롬 7장의 바울의 고백)
-. 우리의 개인적인 역사는 우리의 뇌나 신경세포의 생물적 컴퓨터에 수록되어 있다. 이 기억의 저장소에는 우리가 태중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강한 정서적 성격을 띠는 것들이 모두 저장되어 있다. 이 컴퓨터는 행복을 추구하는 프로그램을 작동시키고 있다. 이 행복이란 우리의 본능적 욕구를 즉시 충족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자아의식이 완전히 발달하는 12, 13세경에는 완전히 자리잡는다.
1. 생존과 안전감의 욕구
새로 태어나는 포유동물중 인간 유아만큼 무기력한 동물은 없다. 따라서 유아는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해 있다. 유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자기의 욕구를 알리기 위해 큰 소리로 우는 것이다.
아기의 첫 번째 욕구는 엄마와 유대를 갖는 것이다. 아기의 전 세계는 엄마의 얼굴, 웃음, 심장 고동이며 이것들은 안전했던 태중의 환경을 되살려준다. 음식과 더불어 가장 큰 욕구는 애정이다. 이 우주를 묶어주는 힘은 사랑이다.
2. 애정과 자기 존중에 대한 욕구
아기가 자신을 주위 환경과 구별하고, 마루를 기어 다니는 다른 동물들과 자신이 다른 몸체를 가지고 있음을 구별한다. 이런 신체적 자아가 발달하면서 힘과 통제에 대한 본능적 욕구들이 나타난다.
다른 형제들과의 경쟁이나 위험한 환경에 부딪쳐서 충족되지 않음을 아기가 지각할 경우, 게릴라 전쟁이 있는 곳, 궁핍 기아, 부모를 잃는 위험이 있는 곳에서의 아이들이 인생의 선함과 아름다움을 정서적으로 동의하기란 어렵다. 또 불구가 되어 이제 게임에 같이 낄 수 없는 아동의 경우, 또 형제간의 경쟁으로 인해 혹은 자기는 원치 않는 아이라는 애매한 느낌을 가질 때, 그 아이의 연약한 정서적 삶은 이러한 본능적 욕구의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보상적 욕구를 발전시키거나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무의식 속으로 눌러버린다. 그러나 이 전에 위험하거나 손상을 받을 위험이 있거나 거부당했다고 느꼈던 것과 비슷한 상황에 부딪치면 이전에 가졌던 정서와 비슷한 정서가 표면에 나타난다.
만일 아이가 유아기 때 극심한 애정 결핍을 가지면 그 아이는 그 원인을 분별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 아이는 다만 그에 따른 어떤 감정만 갖게 된다. 그가 아는 것은 다만 사랑받지 못했다는 것뿐이며 이러한 결핍은 마음 깊은 곳에 적대감이나 두려움을 갖게 만든다.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은 처음에 욕구(need) --> 요구(demand) --> 당위(should)의 것으로 발전한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은 이 환상적인 요구를 존중해야 하는 것으로 기대한다. 사람들이 비록 지적으로 신체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는 성장하면서도 그들의 정서적 생활은 유아기의 수준에 머물러 있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가치관에 자신의 정서를 조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3. 힘과 통제의 욕구
이 욕구가 행동 동기의 중심이 되어 버린 사람들은 모든 상황과 모든 사람들을 통제하려 든다. 상황이나 사람들을 통제하려 드는 사람은 세계 55억의 인류와 경쟁하여야 한다.
-. 4-8세 사이의 사회화 과정 중에 일어나는 집단동일시 : 부모와 선생과 동료 그룹의 가치관을 이의 없이 받아들임-->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 인간의 마음은 무한한 행복(무한한 진리와 무한한 사랑)을 갖도록 만들어졌으며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에 대한 절망적이고도 채워지지 않은 배고픔을 억제해야 한다. 우리는 행복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러 가지 길을 가 보지만 그것들은 극히 부분적으로만 좋은 것이어서 결코 그 행복을 줄 수 없다. 어렸을 때 만들어진 행복을 위한 프로그램이 이미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성인으로서의 행복의 추구도, 결코 이룰 수 없는 어린애 같은 기대를 가지고 계획된다.
-. 정서적 프로그램의 속성은 인생에서 더 많은 것을 얻어내고 더 크고 좋은 즐거움을 얻어내며, 가능한 한 더 많은 사람에게 힘을 행사하여, 할 수만 있으면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통제하려 드는 것이다(예, 애정 결핍을 느꼈던 아이가 배우자를 선택할 경우, 과잉의존성의 형태를 갖는다).

-. 회개하라 : 행복을 찾고자 하는 방향을 바꾸라! 롬 7:15-24의 자아성찰, 이것이 진정한 영적 여정의 시작이다. 이러한 거짓자아를 무너뜨리고 덕을 수련하기 위하여 애쓰지 않으면 안 된다. 한 두번의 고상한 영적 경험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한 것은 일시적 위로를 줄 뿐이다. 예수님께서도 성령을 받은 후에 유혹과 싸우기 위해 성령에 이끌려 사막으로 나아가 여기서 본능적 욕구와 싸우셨다. 즉 거짓자아를 만나고 내적 정화를 이루셨다(마 4장). “그 행복은 너의 정서 프로그램 속에서는 찾아지지 않는다. 너의 어린이와 같은 동기들을 떠나보내라. 그것들은 어른들에게 맞지 않는다.”
-. 거짓 자아는 곧 새로운 상황에 적응한다. 우리가 교회 봉사를 시작하면, 새로운 환경에서 찾아지는 안전, 성공, 권력의 상징들이 멀지 않아 우리 욕구의 새로운 대상이 된다. 그렇게 거짓 자아는 우리가 선택하는 새로운 삶의 스타일 안으로 끈질기게 따라들어온다. 우리가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안전과 즐거움과 존중과 권력에 대한 자아 중심적 프로젝트와 프로그램과 요구(합리화하고, 정당화하고, 나아가서 미화시킨)를 뜻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인간이 완전하게 인격자로 성장하는 것을 저해한다. 자신의 정서에 책임을 지는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스런 정서를 다른 이들에게 떠맡기지 않는다.
-. (예, 남성다운 젊은이의 출가)
-. 토마스 키팅 신부의 새벽기도의 경쟁자
-. 영적 여정 동안에는 가족 중에나 사업상으로 혹은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 사람은 나에게서 가장 나쁜 것을 끄집어낼 수 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관계는 개선될 기미가 없다. 나에게 가장 골칫거리로 보이는 사람이 실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일 수 있다. 수도자들 사이에서는 거룩한 정화의 과정을 “밖으로는 얻어터지고 안으로는 진절머리 나는” 것이라고 한다.
-.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과 우리 자신의 약점을 경험하는 것에는 상관관계가 있다. 이것은 우리를 점차로 해방시켜 주는 데 사용하는 2개의 극과 같다.
-. 신명기에서 모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단련시키는 것을 독수리가 그 새끼를 훈련시키는 것에 비유하였다. 독수리가 벼랑에 있는 둥지에서 새끼를 밀어내어 나는 것을 배우게 함. 


관상기도란 무엇인가?

제1절 관상기도

1. 관상이란 무엇인가?

관상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contemplation은 라틴어 contemplatio에서 유래된 것으로 “실체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헬라어는 테오리아로 데오레인에서 유래되었다. 데오레인은 “의도적으로 어떤 사물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직접적인 경험을 명시하는 용어를 데오로기아라고 했다. 이러한 어원적인 유추로 볼 때 관상이란 사고에 의한 분석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임재체험과 관련된 말이다.

하나님께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리스어 성서는 히브리어의 da'ath를 번역하면서 gnosis를 사용하였다. 이 히브리어는 “하나님 정신이 아니라 전 인격을 포함하는 아주 친밀한 지식” 이라는 강한 뜻을 갖는다. gnosis는 하나님의 신비적 지식이지만 결코 논리적이거나 지적인 지식이 아니라, 직관적이고 체험적인 지식이다.

바울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갖는 하나님의 지식을 뜻하기 위하여 gnosis라는 단어를 사용(고전 12:8, 고후 6:6, 8:7, 엡 3:2~12, 골 1:25~28)하였다. 사도요한은 동사형인 Ginosken을 사용하고, 요한서신에서 26번사용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관상기도의 가장 모범적인 분은 예수님이시다. 관상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목적으로 한다. 즉 사랑의 관계를 갖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에서 그와 아버지와의 친미함보다 더 인상적인 면은 없다.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아니고는 가능하지 않다. 예수님의 관상의 전통은 완전하고 극히 아름답다.

그리스 교부들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와 니사의 그레고리 등은 신플라톤파에서 theoria(관상)라는 단어를 가져왔다. 이것의 원뜻은 지식의 지적 시각을 뜻하며,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 theoria를 지혜를 가진 사람들의 최고의 활등으로 간주하였다. 이 기술적인 용어에다 교부들은 사랑을 통하여 얻어지는 일종의 경험적 지식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da'ath의 뜻을 가미하였다. 이 theoria를 확대 이해하면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라틴어 contemplatio(관상)으로 번역하였고 이 뜻이 기독교 전통으로 내려왔다.

1)구송기도
2)묵상기도
3)관상기도 또는 관상이 있다.
이 기도는 마음과 의지의 기도이다. 마음과 의지는 하나님의 현존을 향하여 나아간다. 입술과 정신은 쉰다. 마음은 말없는 기도로 주님께로 나아가고 의지는 주님의 의지와 하나 되기를 추구하면서, 다만 단순히 주님을 응시한다.

묵상기도가 어떤 주제에 대한 이성적인 추리를 강조한 것이라면, 관상기도는 이성적 사고 보다는 사랑에 의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그 자체를 의미한다.

관상기도를 묵상기도와 비교한다면, 진리를 성찰하면서 달리는 묵상기도 대신에, 관상기도는 내재하시는 그분의 현준에 깨어 머물면서 그분을 응시하는 것이다. 묵상은 그림을 그리는 활동이라고 비교할 수 있다. 그리고 관상적 기도는 완성된 그림을 조용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관상은 “사람의 존재의 중심에서 알려지고 사랑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자각이다” 우리가 이러한 자각을 신앙으로 추구할 때, 이것을 습득적 관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자각을 실질적인 체험으로 우리에게 주실 때, 우리는 이것을 주부 적관상이라고 한다.

1) 습득적 관상

믿음과 희망과 열망하는 사랑으로 우리가 그분의 현존을 향해 나아갈 때. 이 관상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이 진정으로 현존하심을 아는 것으로 시작하여,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서 그분과의 접촉을 계속 추구하는 것이다.

2) 주부적 관상

그분이 대가 없이 거저 주신 은총으로 기도할 때 그분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현존에 대한 진정한 자각을 주신다. 예를 들면, 그분은 사랑, 평화, 기쁨과 같은 성령의 열매를 체험하게 함으로써 그분의 현존을 참으로 자각하게 해주신다.

2. 관상의 정의

1). 무지의 구름에서 관상이란?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저서 “무지의 구름”에서 관상은 천계의 일몰을 감상하는 유쾌한 신선놀이가 아니요. 끝임 없이 지저귀는 천상의 새소리도 아니다. 관상은 결코 강렬한 정서가 아니다. “관상은 자기 존재의중심에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깨달음이다.”

깨달음이 우리네 감정을 통해 전달된 경우에 두려움에 젖고 겸손해지는가 하면 무아경에 빠져 들뜨기도 하고 위압당해서 어리벙벙해하는가 하면 매료되고 환희 밝아지기도 한다. 이것이 때로 부드럽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면 이유는 실제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살아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발적인 영혼을 단단히 거머쥐어서 삶 전체를 형용할 수 없고 필요불가결한 자질로 가득 채우며, 그리하여 영혼은 자신의 참된 목적으로 향하게 되었음을 느끼게 이른다.

깨달음이란 언제나 영혼이 자기 고향으로 향하듯이 향하는 이 ‘타자’에 대한 원초적인 감각이요, 영혼은 이것 없이는 생명을 지탱하기 불가능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관상에서 오는 황홀한 기쁨은 도저히 표현이 불가능하다. 그 본성상 말로 묘사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설령 이 기쁨을 이야기하도록 허용한다 하더라고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아내기 불가능하다. 그래서 신비가들은 대체로 이 환희를 암시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다.

2) 관상의 여러 가지 견해들
“관상은 자기 존재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깨달음이다.”고 밝혔다. 성 빅토르 리차드는 관상을 정의하기를 “지혜의 나타남에 대해 놀라움으로 정지된, 마음의 자유롭고 보다 통찰적인 응시”라고 한다. “관상은 지각된 사물 안으로 확장된 통찰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의 응시인 반면에, 명상은 사물에 대해서 열심히 추구하는 마음의 주목이며, 진리를 열심히 추구하기 위해서 사용된 영혼의 주의 깊은 응시라고 했다.

십자가의 요한이 정의하는 관상을 “하나님의 은밀하고 사랑스럽고 평화스러운 느낌이 일어나게 하는 영감” 이라서 일단 정착을 하기만 한다면 영혼을 불살라 버린다. 관상에서 “하나님은 영혼을 정화시켜 죽 비추어 주면서 영혼의 능력과 필요성에 따라 사랑과 지혜를 부어 주신다.” 또한 관상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영혼에게 자신을 드러내며 통교를 시작하는 높은 곳에 (영혼이) 놓여지는 것”이기 때문에 관상의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 조차 은밀하고 감춰진 것이다.

토마스 머튼은 “관상이란 그분의 지혜와 깨달음의 선물을 통하여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각별한 배려로써 길러 주시고 완성 시키시고자 우리 영혼안에서 작용하시는 성령을 하시는 일” 이라고 한다. 토마스 키딩은 “관상기도와 관상 생활과를 구분한다. 관상기도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상태로 이끌어주는 일련의 경험이라면, 관상생활은 하나님과 일치를 이룬 그 상태 자체를 의미하며, 이때에는 기도와 행동이 성령에 의해서 움직여진다.” 이말은 관상기도를 통해서 여러 기도 경험들을 한다고 해도, 그 열매는 관상생활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즉, 관상기도는 자신만의 개인적인 영역에서 기도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기도의 열매는 일상의 삶 속에서 나타난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관상기도는 내적인 변형의 과정이며,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관계이며, 우리가 동의만 한다면 하나님과의 일치로 인도하는 과정이다.”

리차드 포스트는 관상기도를 “무언의 기도”라 했고, “무언의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애정 어린 정신 집중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가까이 계시며, 우리를 자신에게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또 무언의 기도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연합” 이라고 한다.

유해룡은 관상기도란 하나님께서 자기 내면 안으로 들어오도록 자유롭게 자신을 열어놓는 상태이며 마침내 하나님의 신비가 자기 자신을 내면에 부딪혀 옴으로서 기도의 주체자와 객체자가 하나가 되는 일치경험 상태이다. 그 상태는 지성적인 냉냉함이 아니고 가슴으로 느끼는 경험이요, 정감적인 경험이요, 분석적인 경험이 아니라 직관적인 경험이다.

권명수는 관상기도란 “우리가 하는 보통의 기도는 ‘내가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이지요. 그런데 관상기도는 정반대의 기도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영혼 가운데 들어와서 활동하시도록 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침묵중에 묵상기도하면서 깊은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 가운데서 들어와서 활동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하신 말씀, 즉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영원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을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는 말씀의 차원이지요. 주님께서 내 마음에 들어오셔서 나를 대신해서 기도하시는 것, 그것이 곧 관상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상기도는 순수한 믿음과 사랑을 통한 하나님과의 마음의 대화이며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증명의 기도이고 믿음으로 받는 은총의 선물이다.

관상기도란 예수님께 우리의 눈을 고정시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말없이 우리의 사랑을 나타내는 기도이다. 관상기도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게 하는 것인 만큼 그리스도의 기도와 합쳐지는 것이다. 평범한 수준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리고 관상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의 극치이며, 다른 영성생활과 묵상과도 구별된다.

묵상이 없으면, 관상은 특별히 기독교적인 활동이 되지 못하며, 신앙의 체계와 관련이 없는 듯이 보이는 초월명상과 더 가까우며, 영적 실재에 대한 의식의 증가로 이어지지 못하고, 실천하는 사람의 지적 감정적인 삶과 관계를 갖지 못한다.

토머스 키딩은 “침묵이 하나님의 첫 번째 언어이다.” 라고 했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침묵 속에서 이 말씀을 듣는다.” 라고 했다.

은둔자 테오판은 “관상의 상태란, 정신과 시각이 지극히 압도적인 영적 대상에 의해서 완전히 사로잡혀, 표면적인 일을 완전히 망각하며, 의식이 완전히 부재하게 되는 상태이다. 정신과 의식이 관상하는 대상 안에 완전히 몰입되므로, 의식이나 정신이 전혀 없는 것처럼 된다”고 말한다. 테오판은 이 관상의 상태를 ‘몰아의 기도’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 견해들을 정리해보면, 관상은 가장 높은 형태의 기도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체험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이다. 성령님은 우리 마음 중심에서 기도하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을 인식하고 동의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가 연합하여 하나가 된다. 기도자가 성령에 완전히 몰입되는 기도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일으키는 기도이다. 하나님에 대한 애정 어린 정신집중이다.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이다. 등이다.

관상이란 우리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시는 성령의 기도에 동의함으로서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이다. ‘사랑의 집중기도 또는 단순한 관심의 기도‘라 할 것이다.

3. 관상 기도

관상기도는 하나님이 그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이다. 모든 진정한 기도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심과 그분이 중단 없이 계속적으로 우리를 고무하신다는 사실에 대해 확신을 갖는 데에 바탕을 둔다. 모든 기도는 성령 안에서의 기도이다. 그렇지만 성령 안에서의 기도라는 용어는, 우리 자신의 성찰에 따른 중재나 우리 의지의 행위 없이, 성령의 영감이 우리의 영에 직접 주어지는 기도를 뜻하는 것으로 한정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고 우리는 그 기도에 동의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에 대한 전통적이 용어가 관상이다.

우리는 관상기도를 관상생활과 구별해야 한다. 관상기도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상태로 이끌어 주는 일련의 경험을 말한다. 관상생활이라는 용어는 하나님과 일치를 이른 그 상태 자체를 말하며 이때에는 기도와 행동이 성령에 의해 움직여진다.

에바그리우스에 의하면 “기도란 생각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 정의에 의하면 기도 속에서 생각들이 끼어든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관상기도는 사고의 공백이라기보다는 사고로부터 이탈이다. 그것은 절대 신비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언어와 사고와 정서와 같은 심리적 상태를 넘어서 우리의 마음과 정신적 몸과 정서를, 즉 우리의 전 존재를 열어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의식 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단순히 받아들이고는 그것들을 노력함으로써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면서 그 너머로 가는 것이다.

볼티모어 교리서에 보면 “기도는 마음과 가슴을 하나님께 들어 올리는 것” 이다. 모든 기도에서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과 가슴을 들어 올리는 일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성령의 감동에 의한 기도에서는 우리는 그저 들어 올리는 움직임에 우리를 맡겨 드리고 모슨 성찰을 떨쳐 버린다.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내적 행위를 바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봉헌하는 것이다.

관상기도의 수련은 성령께서 인도하는 교육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교육 과정에 우리가 참여한다 함은 기독교 전통에서 말하는 자기 부정이라 할 수 있다.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되 자격이 없다.”(막 8:34)고 말씀하신다. 자기 자신의 부정은 우리가 자신의 지력과 의지의 기능에 의존하는 습관으로부터의 결별도 뜻한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 중에 일어나는 평범한 생각은 물론, 우리가 지금까지 하나님께로 가는 데에 필수라고 여겼던 깊은 성찰과 영감조차도 떨쳐버릴 것을 요구한다.

2). 관상기도는 인격 관계를 통하여 형성되는 역동적 과정의 일부이다.
관상기도는 전략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격 관계를 통하여 형성되는 역동적 과정의 일부이다. 관상기도의 첫 번째 효과는 무의식 속에 있는 에너지의 방출이다. 이 과정은 두 가지 다른 심리 상태를 유발하는데 그 하나는 영적 위안, 성령 은사, 심령 능력에서 오는 개인의 발전체험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을 알게 되면서(자아 지식) 자신에 대한 모멸감으로부터 오는 인간적 약함의 경험이다.

만일 영적 위안이나 발전을 체험하게 되면 자만심으로 들뜨게 되며, 만일 영적으로 피폐한 자신을 깨달아 처참함을 느끼게 되면 용기를 잃어버리거나 심지어는 절망으로 빠져 들기도 한다. 습관적 생각과 욕망의 속박에서부터 독립할수록 우리는 더욱 고요한 마음으로 관상기도에 들어갈 수 있다.

3) 이탈은 자기 부정의 목표이다.

4) 예수의 신성이 관상의 원천이다.
그분은 신성한 체험의 방법을 통하여 우리를 공허의 체험으로 이끌어 주신다.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지각도 단지 그분의 현존의 섬광을 지각할 분이며 결코 그분 자신을 지각할 수는 없다.

5) 성령은 성서와 일상생활의 사건을 통해 우리 양심에 말씀하신다.
성령은 우리의 참 자아인 깊은 원천에서 우리의 양심에 말씀하시기 시작한다. 이 두 가지 형태의 관상기도들 속에는 다 같이 우리를 성부께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성령의 열매와 은사에게로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열어 주는 개방성이 있다.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영적이 실체, 우리 자신의 영의 실체,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의 실체이다. 관상적 기도가 성령과 그분의 행동과 그 분의 은총에 우리를 개방한다는 의미에서, 또는 ‘그분의 현존을 자각하는 가운데 성령에 의한 우리 영의 정화와 치유로 우리를 남김없이 열어준다’는 의미에서, 관상기도는 ‘참된’ 기도이고, ‘영적’기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관상기도를 성령기도라 부르고, 성령기도를 관상기도라고도 부르는 이유를 지적할 수 있다. 성령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며(요 14:16), 성령께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영적인 선물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우리를 정말로 앞으로, 위로 이끌어 주는 것은 성령의 숨결이다.

4. 마음의 기도

암탉이 병아리를 그 날개 아래 모으듯이, 우리는 마음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에게로 모아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따뜻하게 돌봐 주시며 사랑해 주시도록 할 수가 있다.

1). 마음의 기도는 “아바” 기도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부르게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변화 산에서의 놀라운 변화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친밀감을 체험하셨을 뿐만 아니라 겟세마네의 고통 속에서도 그것을 체험하셨다.

2). 우리 안에 내주하신 성령께서 하시는 기도
마음의 기도란 과연 무엇인가? 아주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여 기도하시는 것이다. 입술의 기도, 지성의 기도, 마음의 기도가 그것이다. 마음의 기도를 만드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고, 그것을 계속하게 하시는 분도 바로 성령이시다.

3). 마음기도의 다양한 표현
특별계시의 느낌과 말씀을 통해서일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종종 ‘레마’라고 부른다.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 적용된다. 이런 경험을 자주 하다보면 우리의 마음이 점점 더 하나님의 마음속에 깊이 이끌리게 된다.

⑴ “방언”은 마음의 기도의 다른 표현이다.
⑵ “입신”도 마음의 기도의 또 다른 표현이다. 성령의 능력에 붙잡히는 체험으로서 잠시 동안 의식을 잃는 것이다. 영혼의 기도는 그 시간 계속해서 진행된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영이 영과 통하는 기도가 일어나는 것이다.
⑶ “거룩한 웃음” 도 마음의 기도의 또 다른 표현이다. 성령의 기쁨은 높고 거룩한 환희의 웃음이 퍼져 나올 때까지 사람의 마음속에서 그저 샘솟듯 솟아나는 것 같다. 그것은 성령께서 영혼을 새롭게 하시고 마음을 치유해 주시는 것이다. 종종 어떤 사람을 오랫동안 짓눌러 왔던 슬픔과 애통함이 은혜를 받고 즉각적으로 치유되는 경우도 있다. 마음의 기도가 오직 무아경의 상태에서만 일어난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다.
⑷ 사랑의 반응 “주님, 마음의 기도를 가르쳐 주세요. 기도하는 어떤 고상한 방법을 가르쳐 주지 마세요. 인간이 꾸며 낸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기도를 가르쳐 주세요.” 마음의 기도에 들어가는 첫 번째 방법은 단순한 사랑에 의한 것이다. 사랑을 하나님의 놀라운 선하심에 대한 마음의 반응이다. 기도하다가 잠이 드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안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기도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면 하나님께 삼사하라‘고 말했다.

초청하여 당신의 마음속에 사랑을 불을 붙여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고통을 드러내어 달라고 요청하라. 당신을 하나님의 사랑의 임재 앞으로 다시 인도할 것이다. “주님, 주님의 능력으로 저를 깨뜨리고, 때리고, 태워서 새롭게 하여 주소서.” 분명히 이것은 강력한 기도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기도이다.

제2절 관상이 아닌 것

1. 관상은 긴장 해소 훈련이 아니라는 것이다.
2. 관상기도가 은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3. 관상기도는 초감각 심리현상과 같은 의사 심리현상이 아니다.
4. 관상은 신비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3절 무지의 구름과 관상

14세기 말의 고전인 『무지의 구름』에서는 집중기도에 대해 강력하게 언급하며, 그 기도의 기초를 기독교의 관상적 전통 안에 둔다.

1. 간단한 단어 사용과 이탈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기도하는 동안에는 간단한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모든 생각, 모든 개념, 모든 심상을 “망각의 구름” 밑에 묻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지의 구름』에서는 기도의 방법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교사가 학생에게 방법을 가르쳤었고, 그 방법에서 파생된 것들은 항상 기록되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상세하게 설명된 방법론을 알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가르칠 때, 많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한다. 질문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저자는 자신의 책을 읽은 독자의 상태를 확신할 수 없다. 그것이 과거에 방법을 상세히 기록하지 않은 관습 배후에 놓여 있는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특정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책을 대한다. 저자는 독자들의사고방식이나 질문들을 모두 예상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좋은 방법은 워크샵이나 개인적인 발표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다.

2). 자아의 상실, 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의식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당신은 지금 꿈을 꾸고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대답하려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의도이다. 만일 의도가 호기심, 또는 하나님안에 쉬는 것에 대한 낭만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최종결과는 진정한 관상이 아니라 모조품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의도가 진지하고 겸손한 마음에서 생겨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동요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라면, 이것은 참된 관상이다. 우리는 어떤 메시지나 사랑이나 개념을 얻으려 하지 않고 단순히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기를 원한다.

3). 그리스도의 위치
세 번째 요소는 그리스도의 위치이다. 여행하는 도중에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의 모습을 놓쳐서는 안 된다. 『무지의 구름』에서 유익한 예를 들어보자.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에서, “마리아는 자신이 본 것이나 자신에 대한 비난에도 움직이지 않고, 진심에서 우러난 사랑으로 예수를 의지했다.” 마리아는 마르다의 부산함과 소음을 무시했다. 마리아는 마르다의 부산함에 개의치 않았다. 마리아는 마르다를 제어할 수 없었지만, 그리스도의 발 앞에 앉아있는동안에 마르다의 비방에 전혀개의치 않았다.

4). 사랑의 우월성
관상자에게 있어서 사랑의 사역은 궁극적으로 치유를 행한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관상기도는 죄의 근원을 제거하며, 보다 깊은 치유의 과정을 시작한다. 우리는 병의 근원을 그대로 둔채 증상들만 다루면서 표면적인 일에 평생을 보낼 수 있다. 그것은 잔디밭에서 잡초를 뿌리채 제거하는 것과 잔디를 깎아 주는 것의 차이이다. 그러나 이 비유도 적절하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뿌리채 제거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거룩하신 정원사가 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5). 관상에 해당되지 않는 것
⑴ 관상은 긴장 해소 운동이 아니다.
⑵ 관상은 카리스마적 은사가 아니다.
⑶ 관상은 신비한 현상이 아니다.
⑷ 관상은 초심리학의 현상이 아니다.
⑸ 관상은 “영적 황홀경”이 아니다.
⑹ 관상은 빈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실체를 차단하는 것이 아니다.
⑺ 관상은 덕이나 탁월함에 대해 주어지는 진기한 상이 아니다.
⑻ 관상은 우리가 관상의 차원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나 승인의 표식이
아니다.
⑼ 관상은 영성생활에서 선택할 수 있는 호화로운 대안이 아니다.
⑽ 관상은 어떤 공허함 속에 합병되는 것이 아니다.
⑾ 관상은 물 한 방울이 하나님의 존재의 바다에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인격이 와해되는 것이 아니다.
⑿ 관상은 변화된 의식 상태를 소유하기 위해서 영을 몸으로부터 이탈시키는 것이 아니다
⒀ 관상은 고차원의 의식이 아니다
⒁ 관상은 고통이나 욕구의 부재가 아니다.
⒂ 관상은 자기 인식이 아니다.
⒃ 관상은 하나님을 닳은 선한 상태가 아니다.



제2장 관상기도의 신학적 기초

제1절 하나님에 대한 태도

1. 영성의 서양적 모델
영성의 서양적 모델에서 나온 세 가지 태도

1). “외적인 행동들이 내적인 행동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잔속을 먼저 닦아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지지 않겠느냐?”

2). “나 자신이 모든 선행을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해 갚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영감으로 모든 선행이 시작되며 우리는 성령의 부르심을 주의 깊게 듣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3). “예수님께서 복음서에 강조하신 가르침처럼 지금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 대신에 하늘나라에 가는 것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하나님과 이웃을 똑같이 무조건 사랑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2. 영성의 성서적 모델
성서적 모델은 서양의 모델과 다른 것을 보여 준다.

1). “외적인 행동보다도 내적인 동기가 더욱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2).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면서 모든 좋은 일을 하도록 영감을 주는 원천이 되시며 우리는 그것에 동의하는 것”이다. 신약성서는 성령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 응답하라고 강조하는 것이지 하나님과 아무 관련도 없는 일을 시작하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이것을 뒷받침 하리라고 기대하라는 것이 아니다.

3).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과 일치를 발전시키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 할 것”을 강조한다.

4). “미래의 보상을 바라거나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보장을 받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키워 나가야 할 필요성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현재의 순간에서 더욱 찾아야 한다. 이 현재의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미래에서 찾아지지 않고 현재에서 찾아진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 특히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절대 진리이신 분과의 관계를 맺는 일에 집중하도록 적절한 수련을 시켜야 한다. 아빠는 모든 피조물에게 애절한 관심을 갖고 계시며, 특히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도록 부르신 인간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신다.

3. 하나님의 대한 태도
얀센주의는 인간의 육신은 완전히 타락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시는 구원은 누구에게나 주시는 보편적인 구원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이 가르침의 상징은 십자가상의 예수님께서 두 손을 머리위로 올리고 있는 고상이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끌어안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소수를 끌어안으신다는 것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속성이 절망적으로 타락했다는 부정적인 견해로 해서 극단적인 보속의 행위를 수련하도록 만들었다. 이 가르침은 프랑스에서 퍼져나와 프랑스 혁명으로 피난하는 사람들의 이민과 함께 유럽으로 번져 나갔다. 그것은 아일랜드 신학교로 스며들었고 이민 오는 사제들과 함께 미국에도 오게 되었다. 교회의 당국에 의해 오래전에 얀센주의가 단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인간의 속성에 대한 만연된 불신과 하나님에 대한 병적인 두려움이 바티칸 공의희 이전의 대부분의 카토릭 교육기관을 지배했다.

1). 서양적 모델의 태도는 “하나님에 대해 회화적인 태도를 갖는 경향을 만들어 냈다.” 좋은 의도로 한다고 하더라도 잘못된 관념으로 가르친 종교교육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에 무조건 즉시 복종하도록 요구하는 폭군의 하나님으로 보이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인간적으로 꾸며낸 하나님의 모습이다.

2). 하나님에 대한 태도는 “언제나 유죄 판결을 내리려고 망치를 들고 있는 준엄한 판사의 이미지이다.” 이것 또한 하나님에 대하여 두려움과 심지어는 공포를 갖게 만들도록 하는 이미지를 보여 준다. 그런데 일단 하나님에게 회두하고 영적 여정을 시작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두려움이 소용이 없다. 이것은 믿음이 확대되면서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무한한 확신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제2절 관상기도의 신학적 기초

관상기도의 신학적 3원칙

1. 관상기도의 원천은 삼위일체이시다.
2. 관상기도의 초점은 그리스도론 적이다.
3. 관상기도의 효과는 교회적이다.

이러한 점들에 관하여 자세히 살펴보자.

1). 관상기도는 삼위일체적 관계의 심층으로 나아가는 길로서 그리스도와 갖는 실존적인 관계로부터 나온다.[원천] 우리가 앉아 관상기도를 할 때 스스로를 우리 안에 계신 거룩한 생명과 연결을 갖는다. 거룩한 말씀은 우리 안에 하나님이 현존하시고 활동하심을 동의하는 몸짓이다.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의지가 스위치를 켜는 것과 같아서, 말하자면 우리의 유기체 안에 있는 전류[거룩한 생명]가 돌게 하고 거룩한 에너지가 흐르게 하는 것이다. 거룩한 에너지는 이미 내안에 있으면서 활성화되기를 기다린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삼위일체의 현존 안에 앉아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는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펼쳐진다.

2). 관상기도는 그리스도교의 신비[고난, 죽음, 부활]의 핵심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기독론] 관상기도는 우리 자신을 떠나보냄으로써 그 무한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도달하려고 애쓰는 단순히 겸손한 방법이다. 거룩한 말씀으로 상징하는 하나님이 현존과 활동에 대한 동의는 자아승복과 신뢰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3). 신학적 덕들이 어떻게 이 거룩한 문맥들과 부합하는지 보라. 거룩한 삼위일체가 우리 안에 내재하심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효과] 우리가 기도하는 맥락에 다른 면이 있다. 우리가 십자가 밑에 앉아서,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결별되면서 생긴 모든 결과들을 받아 내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분과 우리를 동일시하면서 우리의 정서적 상처들과 양심에 받은 상처들이 치유된다. 내적인 부활의 순간들을 통하여 우리의 거짓 자아가 마침내 떨어져 나가고 영원한 부활을 이룩하면 마침내 하나님의 자녀로서 온전한 자유를 늘 누릴 수 있게 된다.

4). 성령의 사랑이 우리의 가슴 안으로 부어 넣어 주심으로써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도 이룩된다. [효과]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 인간 가족에 대한 소속감, 그리고 우주에 대한 소속감을 갖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단순히 개인적인 여정이 아니라 세상에 상당히 의미 있는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성령이 기도 중에 우리에게 부어 주신 사랑을 세상 속으로 부어 줄 수 있게 된다.

5). 관상기도로 받는 큰 특권은, 하나님으로부터 결별되었다는 개인적인 경험과 이에 따라 삶에서 나타나는 결과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을 나누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과 내안에 계신 성령의 탄식을 통하여 세상을 치유하는 데에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과 동일시하라고 부르셨다는 사실이다.[효과]

6). 어떤 사람이 비평하듯이 관상기도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이 잊혀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긍정적이고 심오한 방법으로 확인된다. [효과] 예수님의 신성한 인성이 하나님의 신격을 온전하게 포함하고 있다는 살아 있는 믿음을 관상기도는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아버지께 인도하시는데 그리스도께서 알고 있는 아버지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과 부활 덕분에 우리는 은총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에 참여한다. 우리는 아버지를 영과 진리 속에서 예배하라고 초대 받았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 아버지의 가슴으로 다가드는 것이다. 거기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서 신적인 원천에 자신을 내어 드리면서 그 원천에서부터 성령의 사랑 안에 영원히 솟아나고 또 다시 그 원천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3. 신학에서 현존체험으로
관상기도의 신학적 3원칙들을 좀 더 자세히 다루어서 그것들이 신학에서부터 우리의 삶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깊은 경험으로 어떻게 옮겨 가는지를 보고자 한다. 영적인 여정은 이와 같은 초월적인 현실로 옮겨가는 움직임이며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그것에 점차로 동화되는 것이다.

1. 관상기도의 원천은 삼위일체이다. 관상기도의 원천은 삼위일체, 즉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생명으로서 세례 때에 아니면 우리가 은총의 상태(거듭 남)에 들어갔을 때에 시작되었다. 가장 거룩한 성삼위께서 우리 안에 내재하고 계신다는 교리가 영성생활의 모든 원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관상기도의 원천은 삼위일체적 생명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 속에서 우리는 말하자면 본부와 연락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 본부는 객관적으로, 즉 진정으로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생명이며 우리는 믿음과 희망과 신적인 사랑으로 거기에 접근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삼덕[고전 13:13. 믿음, 소망, 사랑]을 훈련하는 것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더욱 깊은 수준의 신적인 인식을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변형적 역동 바로 그것이다. 바울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라고 했다. 이것은 자아포기를 통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다른 방법으로도 우리가 느끼거나 알 수 있기 이전에, 우리가 하나님과 일치되어있다는 사실에 대해 보이지 않는 확신을 갖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심이라고 부르는 것에 가슴을 열어 드리는 것이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5:5] 그러므로 관상생활을 준비시키는 것으로서의 관상기도의 원천은 삼위일체의 생명 그자체로서, 그 생명은 우리 안에서 진행되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바라고 진리를 찾고 기도하려는 우리의 욕망으로 표현되고 있다.

2. 관상기도의 초점은 그리스도론이다. 그리스도께서 관상기도의 초점이 되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이 있다. 기도할 대의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현존이며,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어떠한 다른 사건들보다도 삼위일체의 신비를 잘 드러낸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는 관상기도 중에 그리스도의 현존에 동화를 한다. 기도 중에 어떠한 감정이 일어나고 어떠한 사고들이 지나간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 현존에 동일시하려고 지향하는 한에는 그 동화가 일어난다.

3. 관상기도의 효과는 교회적이다. 이 교회적이란 말은 사회적 차원과 사회적 기능과 사회적 현실을 가리킨다. 우리가 일단 영적인 여정을 시작하고 나면 거기에는 단순히 개인적인 기도라는 것은 없다. 우리의 기도는 인간 가족의 모든 지향과 욕구를 대신하여 탄식하시며 기도하시는 성령의 기도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다른 시간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 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관상기도를 하는 시간에 은총을 경험하는 모든 사람과 모든 인간 가족과 하나라는 감각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때로 기도 중에 우리는 이러한 연대를 실제로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연대가 그리스도교의 공동체의 핵심이고 정신이다.

4. 요점 “기도는 그것에서 솟아난 활동 없이 혼자 서지 못 한다.” 관상기도는 자신의 영적인 본질에 접근하게 할 뿐 아니라 자신의 참 자아를 표현하도록 해주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삶은 점점 우리의 내적 자유로부터 오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성령의 열매나 진복이 솟아나고 흘러 넘쳐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타내 주게 된다. 그러므로 관상기도의 원천, 즉 우리 안에 있는 삼위의 생명을 향하여 더욱 깊이 들어감에 따라 그 효과는 강력하게 우리를 밖으로 향하게 하여 성인들의 통공[교통]이라고 부르는 연대로 향하게 한다. 이 성인들의 통공[교통]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서로 관계를 맺어 가는 능력을 말한다.



제3장 관상기도의 심리학

세계종교들은 심각한 결함이라고 보편적으로 경험되는 이 인간 조건을 규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창조 이론을 제시해 왔다. 이제는 심리학과 과학이 이에 대하여 공헌하고 있다. 피아제[Piaget]와 그리고 근대의 잔브래드셔[John Bradshaw] 와 같은 발달 심리학자들은 그 원인이 아동기 초기에 부모들의 양육의 실패와 정서적 상처들 때문이라고 했다. 초월심리학자인 마이클 워슈번[Michael Washburn]은 그의 저서 ‘자아와 역동적 근거’라는 저서에서, 우리가 독립된 자아 동일성을 발달시키는 첫 단계로서 인간이 존재의 원천과 자신이 하나라는 감각을 억제했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이 억제로 말미암아 우리는 도무지 찾을 수 없는 행복을 절망적으로 찾기 시작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무엇이 원인이었든지 간에 진정한 행복의 원천은 우리의 성장체험에서 빠져 버린 것이다. 하나님이 현존하신다는 인식이 진정한 안전, 진정한 인정, 진정한 독립을 가져다주지만, 이렇게 안심시켜 주는 현존과 행복하다는 감각이 모든 사람들의 의식의 발달에서 빠져버렸던 것이다.

행복에 대한 욕구는 너무나 근본적이고 강하기 때문에 아주 어릴 적에 썼던 여러 가지 대리적 방법에 매달리게 된다. 발전과정이 진행되면서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감각이 결여되어 있음을 보상하려고 하지만, 우리의 행복 프로그램은 결코 이것을 찾아 내지 못하고 있다. 정서적 고통을 억압하고 그것을 보상하려고 하는 노력의 결과로 거짓자아가 형성된다. 복음은 거짓자아가 치유될 수 있는 질병임을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신성한 의사로 받아들이라고 우리를 부르는 것이다. 치유과정은 기본적으로 관상기도로 하는 일이며, 관상기도를 하면서 일상생활에서 해야 할 숙제를 하는 것이 신성한 치유를 하게 만든다.

내가 신성한 치료라고 부르는 것이 진정으로 인간 조건의 질병에 대응하는 것인지를, 그리고 그 진단이 신학적이며 심리학적인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이것을 한번 살펴보자. 관상기도의 기간을 하나의 시발점으로 하면서, 수년간의 정규적 수련이 이 하나의 기도기간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기로 하자. 관상기도가 습관화되어감에 따라 우리는 성령의 관상적 선물, 즉 지식, 이해 그리고 지혜에게 점점 더 지배를 받는다.

우리가 앉아서 기도를 할 때에 네 가지 큰 순간들로 이루어진 원형을 만든다. 첫 번째 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에 대해 동의한다는 상징으로 거룩한 단어를 도입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태도를 부드럽게 형성했을 때이다. 처음에는 우리의 인식을 가득 채우는 끝없는 사고들을 경험할 것이다. 우리가 여러 해 동안 수련을 하고 나면 이것은 보통 비교적 빨리 지나가고 고요와 쇄신된 기분과 안식의 깊은 감각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관상기도에서의 두 번째의 순간이다. ‘휴식’이란 평화, 내적 침묵, 만족감, 편안한 감각, 행복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감각 등 광범위한 심리적 인상들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러한 휴식이 아주 깊으면, 기도 중 어느 지점에서는 지나가는 사고가 거의 없거나 전혀 없을 수 도 있다. 아니면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강한 감각을 가질 수 도 있다. 아마도 1,2년간 수련을 하고 나면 이제는 누적된 깊은 휴식이 경험으로 해서 육체가 자동적으로 쉬도록 만들고 나아가 잠자는 것보다 더욱 큰 정도의 휴식을 갖게 만든다. 이러한 깊은 휴식이 느낌은 특히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깊은 감각을 동반할 때에 일종의 하나님과의 심리적 전이로 이끌어 준다. 이것은 말하자면 정신분석학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 치료자가 되시는 것이며, 어릴 적에 부모와 같이 중요한 인물로부터 우리가 받아 보지 못했다고 느끼는 신뢰와 사랑을 이 전이 속에서 치료자에게 기대하게 된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정서가 저장해 왔고 새로이 거부당할 적마다 다시 느끼게 되는 거부의 고통을 치료자에게 투사하면, 그 치료자는 우리가 아동기에 적절히 경험하지 못한 받아들임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렇게 하여 아무리 많은 신학적 성찰을 하더라도 되지 않던 상처의 치유가 일어난다. 정서는 이성의 법칙에 순종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이 결핍된 내용과 양에 맞게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거의 누구나 우리가 유아기에 필요로 했으나 결핍되었다고 느꼈던 애정과 안전감에 대한 정서적 고통의 잔재를 품고 있다.

깊은 휴식은 사고에 대한 집착하거나 혐오감을 갖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결과 일 뿐 아니라 신성한 신비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사랑받고 있다고 느낀 데서 온 결과이다. 우리 자신 안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는 이 신비를 그리스도교의 교리로는 신적 내재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현존[임재]에 대한 인식이 재 각성되기 시작한다.

휴식이 자라면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깊어진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에 대한 정서적 불신이 풀리기 시작한다. 휴식이 아주 깊기 때문에 육체도 전에 할 수 없었던 정도로 깊은 휴식하게 된다. 육체는 어릴 적의 정서적 아픔과 그 아픔을 억압과 같은 방어기제나 보상적 활동으로 다루려고 노력해 온 결과들을 저장하는 창고이다. 그 휴식의 결과로, 일생 동안 지녀 온 정서적 잡초 주위에 있는 단단한 방어기제들이 부드러워지고, 건강을 지키려는 육체의 신체적 배설의 통로가 되는 것과 비슷하게 우리의 인식은 정서를 배설하는 통로가 된다. 정신은 이제 일생동안 가졌던 소화 안 된 정서적 내용들을 토해 내는데 이러는 중에 ‘정서적 메스꺼움’이라고 불리는 충격이 일어나기도 한다. 충격적이면서도 표현 안 된 정서적 경험들은 무의식에 넣어져서 그 에너지가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이다. 정서는 에너지이다. 그 에너지는 그것을 인정하거나 표현함으로써 소멸된다.

키딩은 관상기도의 원 운동 중에 이러한 세 번째 순간을 ‘무의식을 덜어 냄’이라고 부른다. ‘덜어 냄’이란 일종의 정신적인 메스꺼움의 경험을 말하는데, 이것은 바로 전에 지나간 사건들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고나 감정이 폭우처럼 우리의 인식 안으로 마구 솟구쳐 올라오는 것이다. 그러한 고통스런 사고나 감정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없다면 그것들이 무의식으로부터 올라오고 있다는 표시이다. 이러한 원시적인 정서적 내용들을 배설하는 것이 원의 네 번째 순간이다. 이러한 정서적 아픔이 20년이나 30년 지녀온 것일 경우에는 배설하는 과정이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관상기도와 같은 수련을 매일 훈련하여 준비했을 경우에는, 신성한 치료자에 대한 신뢰가 생겼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다룰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단지 그 폭풍을 견뎌내면서 우리가 거룩한 단어로 돌아갈 수 있다면,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 원 운동과정을 다시 한 번 시작하면 된다.

이러한 덜어 내는 과정이 어떤 사람에게는 관상기도를 시작한 후에 바로 시작될 수 도 있지만 보통은 그처럼 극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이러한 경우에 성령께서는 밖에서부터 일을 시작하여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만일 외적 자극이 있을 경우에는 이과정이 좀 더 즉각적이고 강할 지도 모른다. 이러한 경우는 비극이나 사고가 발생하거나, 정신치료 같은 것들의 도움으로 이 내용들을 느슨하게 풀어 주어서 아마도 우리의 인식의 표면에 가깝게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경우에는 단 한 번의 관상기도만으로도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어서 이러한 내용들이 우리의 방어기제를 뚫고 완전히 인식 속으로 올라올 수 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에서, 하나님의 왕국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받아들일 수 없는, 바로 그 환경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지적 했다. 예수님께서 소외된 이들과 가까이 지내셨듯이, 예수님께서는 심리적인 덜어냄을 하는 이 순간에 우리와 가까이 하시면서, 의식 속으로 올라오는 것들은 우리의 치유를 위한 것이며 그것을 마주 본다고 해서 우리가 죽지는 않는 다는 것을 재확인해 주시려고 애를 쓰신다. 치료자는 고객의 복지를 위하여 일하는데 그러기 위하여 때로는 고통스런 문제를 제기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치료자가 우리를 기다리기 지쳐서 “누구누구하고 아주 절망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이야기 하자.”고 말한다. 이때에 우리는 “다음 주까지 기다립시다.”라고 대답한다. 이와 비슷하게 신성한 치료자가 “이제 괴로움을 주는 감정을 살펴보고 그것이 어디서 오는지를 알아보자.”라고 제안하시면 우리는 기가 죽어서 천당으로 가는 더 좋은 길이 아마도 어디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우리는 진짜 문제에 대면하기를 피하면서 영적인 책과 수련, 일, 오락이나 몰두할 활동을 찾아서 정신없이 파묻힌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관상기도를 끈기 있게 하면 진짜 문제는 스스로 다시 들고 일어날 것이며, 결국은 하나님에 대하여 자라난 신뢰로 말미암아 치유의 과정을 참아 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원을 한 번 다 돌고 난 후에 우리는 어디쯤 와 있을까? 우리는 시작한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 육체의 어딘가에 갇혀 있던 내용들을 덜어냈기 때문이다. 원을 돌아가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장 깊은 존재와 우리의 참 자아이심을 알아보게 된다.

어느 정도 정서적 아픔이 배설되고 나면, 우리 안에 그만큼 내적 공간이 생겨난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원천에 보다 가까이에 있는데도, 이 존재의 원천은 우리의 가장 심오한 중심에서, 전 생애 동안 쌓인 정서적 쓰레기 밑에 묻혀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현존을 가리고 있던 내용들을 덜어 내는 과정을 통하여 배설해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에게 더 가까워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상기도 속에서 이 원 운동을 시작하면 우리는 자신의 중심에 더 가까이 간다. 그 결과로 더욱 깊은 휴식을 할 수 있게 되며 다시 정서적 정크들을 더욱 덜어 내게 된다. 이러한 정크들은 원시적인 정서나 정서로 채워진 사고들의 형태를 띠면서 나타나는데 이러한 것들은 가까운 과거와 관계가 없는 것들이다.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는 거룩한 단어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과정을 새로이 시작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중심에 그만큼 더 가까이에 가 있다. 휴식하는 것, 정서로 채워진 사고나 원시적인 정서의 형태로 짐을 덜어 내는 것, 그리고 거룩한 단어로 되돌아가는 것 등의 원 운동은 계속해서 우리를 우리의 중심으로 더 가까이 가게 해준다.

덜어 내는 과정은 처음에는 육체의 어느 부분의 통증, 뒤틀림 혹은 가려움 등과 같은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육체의 표면에 가까이에 있던 정서적 매듭이 아마도 풀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잠시 그 아픈 곳에 주의를 주고 난 다음에는 불편함이 비교적 빨리 사라진다.

기도의 깊은 휴식으로 신체의 표면에 있는 매듭들이 어느 정도 풀리고 나면 성령은 더 내적인 것들을 다루기 시작한다. 그러면 눈물이 흐르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문화적인 이유나 개인적인 이유로 인생의 많은 슬픔을 억압해 왔다. 이제 육체는 이전에 하지 못하도록 거부당한 것들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처음으로 느낀다. 이와 마찬가지로, 관상기도를 시작한 처음에는 우리가 지쳐 있기 때문에 육신은 잠을 청하게 된다. 잠자는 것이 기도의 목적은 아니지만 육신은, 이전에는 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었던 것을 할 수 있도록 허용되면, 더 좋은 기분을 갖는다. 우리가 충분하게 휴식을 취한 다음에는 그렇게 자주 잠에 떨어지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이것은 몰론 우리가 우리의 정서 생활에서 이전처럼 지치게 하는 실수들을 거듭해서 저지르지 않는 한 말이다.

정서가 정상적으로 되어 가면서 슬픔이 가장 먼저 풀리는 것 같다. 그래서 눈물의 홍수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원운동을 완결하자면, 만일 우리가 수련을 중단 없이 수련하기만 하면 그 나머지 일들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러면 우리는 거룩한 단어로 계속 돌아가고 휴식하고 더 많은 정크들을 배설하고, 그러면서 내적 자유를 더욱 즐기게 된다. 우리가 오래 살기만 한다면 우리는 결국 중심에 이를 것이다.

우리가 중심에 다다르면 무순 일이 생기는가? 하나님의 현존을 가릴 만한 정크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것을 믿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내재[Divine Indwelling]를 뜻하는 것이다. 우리가 수련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면, 하나님의 현존은 영원히 숨은 채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과정을 수직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키딩은 고고학자들이 매우 좋아하는 중동 유적의 비유를 사용하였다. 고대에는 한 도시국가가 적국을 정복하면 군대는 그 도시를 태워 버리고 그 위에 새로운 도시를 세웠던 것 같다. 그 결과 우리는 한 문명이 같은 곳에서 다른 문명 위에 세워진 것을 발견한다. 이 유적지는 그저 하나의 언덕처럼 보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사람들이 무시해 왔다. 이제는 이것들이 고고학적 보물로 간주되고 있다. 고고학자들이 맨 먼저 할 일은 유적의 맨 위를 깨끗이 치우고 잡초들과 돌맹이들을 걷어 낸 다음에 그 자리에 번성했던 마지막 문명을 발굴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이처럼 비슷하게 일하신다고 말하고 싶다. 그분은 우리가 어떤 연령에 있든지 간에 우리의 현재 상태를 들추어내신다.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은 우리의 현재 인간관계와 중독 행동에서 가장 파괴적인 측면들을 치유하시는 일이다.

그 결과로 우리는 좋은 일을 남에게 해주면서도 어느 정도 내적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도 형성된다. 그리고 성서에 대한 열성도 경험할 것이다. 헌신생활, 영성생활, 영적 독서, 봉사들이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이 기간을 때로 ‘영적 여정의 봄’ 이라고 불린다.

어디쯤에서인가, 성령은 영적인 봄을 이제 충분히 길게 즐겼다고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수도원 생활에서는 이것을 ‘수련자의 열정’이라고 부른다.

성령은 이제 다음 층을 파 내려가기로 결정을 내린다. 실제로, 성령은 우리의 전 인생 역사를 조사하려고 해서, 한층 한층 파 내려가면서 정크들을 던져 버리고 인간의 각 발달단계에서 적절한 값어치 있는 것들은 보존하다. 가장 깊고 가장 어렸을 때의 상처들이 가장 힘들여 억압되는 경향이 있다. 성령은 마침내 가장 어린 시절의 정서적 삶의 바닥을 파기 시작하는데, 여기에는 거부되었다는 감정, 불안정감, 애정의 결핍 혹은 실제적인 신체적 충격들이 처음으로 경험된 곳이다. 그 당시에는 분노, 공포, 슬픔 등과 같은 원시적인 정서만이 가능한 반응들이었기 때문에 가장 원시적인 감정들이 의식 속으로 들어온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시는 중심을 향해 나아갈 때에,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래서 영적 여정은 성공담도 아니고 출세 이야기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경고해준다. 이것은 오히려 거짓자아가 연속적으로 모멸당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우리 인생의 초기에 있는 정서적 아픔을 다루기 위한 방어수단으로 고통을 감수하면서 쌓아온 가치관이나 세계관과 함께 거짓자아가 축소되어 가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나선형 계단은 수평과 수직을 조합시킨 것이다. 이 계단의 맨 위[실제로는 가운데]는 우리가 앞으로 기도의 삶을 살겠다고 투신했던 처음 회두의 때를 나타낸다. 그때에는 보통 어느 특정한 유혹들, 실패들, 중독들 혹은 강박적 행동들을 다루어야 하는 시기이다. 영적인 여정의 봄 동안에는 영적인 열성이 피어나면서 생기는 새로운 가치관 때문에 이러한 다루기 힘든 상황을 일시적으로 잠잠하게 한다. 이 봄의 상태에서 진정한 영적 여정의 작업으로 옮겨 가는 것은 우리가 시작하는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할 수만 있으면, 아마도 처음의 열정 속에 머물러 있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치료자이신 성령은 우리를 우리 삶의 다음 수준으로 초대하시고, 그 수준 또한 그 한계들로부터 구제될 수 있는지를 보도록 하신다.

이 시점에서 우리의 이성적인 기능들과 정서에 주어졌던 처음의 은총들이 사라진다. 고전적인 영적 여정의 경험에서는 이것을 ‘감각의 어둔 밤’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이성과 정서의 수준을 통하여 작업하시던 은총을 하나님께서 더 이상 주시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헌신과 활동에 대한 열정도 사라진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가 비탄에 잠기거나 놀라게 하시려고 사라지신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기도시간에 현존하시는 대신에 더 이상 나타내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관심을 별로 가지고 계시지 않은 것처럼 느낀다. 이전에 아주 만족스럽고 흥분하게 만들며, 아주 위안을 주는 경험을 가졌을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영적 여정의 다음 단계로 옮겨 가면 모든 것이 끝났다는 즉 이 세상은 끝났다는 절망적인 감각을 갖는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영적나선형 계단에서 더욱 친밀한 곳으로 ‘내려가셔서’, 거기서 더욱 성숙하고 신뢰하는 수준에서 그분과 함께하도록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감각의 밤에 아주 조용히 침묵에 잠기면, 아주 섬세한 평화의 감각을 알아차리고, 순수한 믿음이라는 더욱 실속 있는 음식을 즐기기 까지 할 수 도 있다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했다. 우리가 만족스럽게 여겼던 이전의 수준을 떠나보내면, 더 깊은 수준의 믿음으로 옮겨 가는데, 이것은 영적여정의 아주 신뢰를 더해 주고 힘도 더욱 주는 것이다.

교회의 교부들은 이러한 기초적인 경험을 이집트에서 약속된 땅으로 가는 여정으로 비유했다. 성서상의 사막은 우리의 개인적인 삶의 역사의 여러 단계를 정화하는 것을 상징한다. 정화란 결코 무엇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밀에서 겨를 골라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판단을 통해 성령은 우리 발전의 각 단계에서 해로운 것에서부터 좋은 것을 골라내고, 밀은 곳간에 모으고 우리의 어릴 적 발전 단계에서 형성되었던 한계들을 뒤로 남겨 두신다. 그래서 유아기의 아름답고 경이로운 경험은 다시 살리고, 아동기의 무지와 난폭한 행동만은 뒤로 남겨 두신다. 사춘기 때에 가졌던 정서적 난폭함과 이 시기의 특징인 절망적인 정체성의 추구 같은 것은 버리게 하시고 사춘기의 모험 정신은 살려 두신다.

우리의 아래 수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현존과 다시 연결되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가졌던 제한된 관념에서부터 자유를 경험하고, 영적 여정은 다시 꽃을 피우고,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아주 새로운 장이 열리는 평원에 도달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곳에서도 또다시 집착하기도 한다. 그러면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에 성령께서 “자, 이제 다음 수준으로 가 보자”하고 암시를 하시고 우리는 다시 또 하나의 과도기 단계 혹은 어둔 밤에 빠진다.

영적인 나선형 층계라는 구조 안에서 우리가 그것을 다시 만나면 수평적으로 볼 때에는 똑같은 옛날 문제를 만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수직적으로는 우리는 더욱 성숙한 수준에서 그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집착이나 혐오감을 이전보다 더 완전하게 떠나보낼 수 있게 된 것 이다.

신뢰와 겸손의 성장을 통하여 우리를 점진적으로 조금씩 이끌어 가심으로써, 우리는 더욱 깊은 수준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승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내적 자유의 새로운 수준, 더욱 깊어진 가슴의 정화, 성령과 더욱 향상된 일치에 도달하게 된다.

하나님은 중심으로 향해 가는 이 여정에서 언제나 한 걸음 앞서 계신다. 우리가 그분을 찾아냈다고 생각하자마자, 그분은 우리 손아귀에서 살며시 빠져나가신다.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나쁜 경우는 우리가 오아시스를 찾았다고 생각하고 종려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아버리는 것이다. 복음은 계속 성장하는 도전을 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한다. 영적 삶은 아주 역동적이다. 성령은 계속해서 우리가 자아포기와 믿음과 사랑의 새로운 수준으로 오라고 부르신다.

우리가 나선형 층계의 맨 밑바닥에 도달하여 하나님의 현존과 온전히 만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매우 놀라운 일로서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일이 일어난다. 우리가 그곳에 도달하기 위하여 값있게 여기던 것들이 전혀 다른 빛속에서 나타날 것이며 이전에 가졌던 많은 확신들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 단계씩 내려갈 때마다 우리는 동시에 성령의 영향 아래에 믿음, 소망, 사랑에서 새로운 자유의 수준과 성장의 수준이라는 반대방향으로[말하자면 위로] 움직여 간다. 한 수준씩 내려갈 때마다 한 수준 위로 올라가는 것이며 갇혀 있던 우리의 창조적인 에너지를 풀어 준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열거되어 있는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고 후에는 행복 선언(마5:3-10)도 삶 속에 나타난다.

변형적 일치는 우리 삶의 매 단계를 재정비하는 일을 포함하는 것 같다. 이것은 삶의 내용을 다루어서가 아니라 각 단계에 가졌던 가치들을 다시 살림으로써 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 여정의 초기에 어떤 것들을 거부한 것은 잘못된 지식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하나님은 삶에서 좋았던 것을, 그리고 우리가 불필요하게 거부한 정당한 즐거움들을 다시 생각해 보라고 초대하신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발달 단계를 다시 거쳐 가도록 이끌리는 것과 같은데, 삶의 각 수준에서 적절한 가치관은 소유하고, 우리가 다룰 수 없었거나 우리의 인간 조건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한계들을 떠나보내게 한다.

우리는 결국 거짓자아와 모든 정크들을 비워 내는 데까지 도달할 것인가? 키딩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기대한 결과와 같아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자기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사랑하게 하는 바로 그 능력은 우리가 고통을 받아 내는 능력도 늘어나게 할 것이다.

완덕이나 거룩함은, 내가 보기에는 어떤 특수한 목적을 얻는 다는 것보다, 나선형 층계의 영적 여정에 얼마큼 투신하고 있는가로 가늠되어야 할 것이다. 그 길을 가는 사이에 약진도 하고 평원에 머물기도 하는데 그 평원 안에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우리의 어두운 면을 보게 되지만, 이전보다는 더 평온한 마음과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보게 된다. 이 기간 동안에 하나님과 일치하는 경험을 하기도 할 것이며, 이 일치의 경험이 우리의 모든 기능들과 관계들과 신체 속에 살아 있게 하는데 몇 년이 걸리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고 여정은 계속된다. 우리는 더욱 깊은 겸손으로 오라는 부름을 받으며, 이것은 다시 큰 신뢰와 모든 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랑이 자라나게 한다. 어떤 면에서는 바닥과 꼭대기가 서로 만나거나 서로 한데 섞이는 것이다. 겸손과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대한 끝없는 신뢰가 합쳐지고, 그 여정은 점차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여정으로 되어 간다.



제4장 관상의 기원과 전통적 방법

제1절. 관상기도의 기원과 역사

먼저 초기부터 현대까지의 관상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본 후 기독교 전통에서의 관상기도의 역사에서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1). 초기 : 관상기도는 AD300년경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기독교 영성사를 보면 성 안토니[AD 250-330]가 최초로 사막에 들어가 관상기도를 한 수도사인데, 그는 하나님과 친구가 되는 친밀함을 누리며 살았다.

2). 3~4 세기 : 관상기도의 여명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에바 그리우스 폰티거스는 “기도는 개념이 아니라 안식이다.”라고 했고, 수도원 운동의 개척자인 J 케이샨은 “간단한 기도문의 반복이 중요하다.”고 했다.

3). 5-6세기 : 관상기도의 탐색기라 할 수 있는데, 이때 성 베네딕트는 순명, 침묵, 겸손을 토대로 “거룩한 규칙”을 만들었으며, 이 규칙은 오늘날에도 수도원의 규칙으로 사용되고 있다. J 클리마쿠스는 “기도의 가장 근본적인 자리는 고요함이다.”고 했다.

4). 12-13세기 : 관상기도의 태동기로 평신도 수도사였던 귀고는 관상기도의 정화, 조명, 일치의 삼 단계와 사다리를 구체화시켰으며, 끌레르보 베르나르도는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다.”고 했다. 이때 마이스터 엑하르트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불꽃을 주셨다. 이 불꽃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다.”고 했다.

5). 14-15세기 : 관상기도의 개화기로 관상기도의 고전인 “무지의 구름”을 통해 관상기도 방법론을 제시했으며, 쥴리안은 “기도는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고 했다. 이 시대에 이그네시우스[로욜라 이냐시오]의 여신수련 방법이 등장하는데, 회개, 묵상, 예수님의 고난 묵상, 하나님과의 이치라는 4단계를 제시하고 있다.

6). 16세기 : 관상기도의 절정기라 할 수 있다. 이때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나님의 언어는 침묵이다.”라고 했으며, 아빌라 테레사는 “기도의 자세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있는 아이와 같은 것이다.”고 했다.

7). 17-19세기 : 관상기도는 종교개혁과 함께 잠적해 버리게 되었다. 관상기도가 잠적해 버렸던 17-19세기는 영성을 잃어버린 암흑의 시기였다.

8). 20세기 : 종교개혁과 함께 사라졌던 관상기도는 20세기에 와서 토머스 머튼에 의해 현대적 관상기도의 기초를 놓았으며, 토머스 키딩[향심기도, 집중기도]에 의해 체계화 되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종교개혁과 함께 카톨릭에서도 사라졌던 관상기도가 개신교 안에서 새롭게 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21세기의 여성가인 리차드 포스터나 유진 피터슨은 개혁주의적인 입장에서 관상기도를 소개하고 있다.

1. 기독교 관상의 전통.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에 끊이지 않고 내려오는 유산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일차적인 원천인 복음과 성서 신학으로 돌아오라는 부름이다. 성서의 하나님 말씀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강생이 그리스도 관상의 원천이다.

교회의 교부들은 그들의 강론 중에 성서를 자주 관상적 견해에서, 그 당시의 말로는 ‘영성적 감각 속에’, 설명하곤 했다. 성령께서는 지혜와 이해의 은사를 통하여 사람의 믿음을 강화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점차적으로 더 깊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해주신다. 정기적으로 기도를 더 갚이 수련하고 믿음이 성장하여 관상이 점점 깊은 단계로 발달해 갈 때에, 성령의 여러 은사들이 온전하게 활성화 되는 것으로 사람들은 믿어 왔다.

처음 그리스도인의 16세기 동안에는 관상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근세에 와서는 관상이라는 말이 이전과는 다른 의미와 뜻을 갖게 되었다.

관상의 완전한 의미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이것이 두 개의 독특한 원천, 즉 성서와 그리스의 철학에서 나왔음을 알 필요가 있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강조하기 위하여 히브리어 다아드[da'ath]를 그리스 성서는 그노스시[gnosis, 靈智]로 번역했는데, 이 다아드[da'ath]는 인간의 지력뿐 아니라 전 인격으로 아는 지식을 뜻하는 것이다.

사도바울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쓰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적절하게 나타내는 말로 그노스시[gnosis, 靈智]라는 말을 사용했다.[엡3:14-21, 골1:9]

그리스 교부들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나 오리게네스, 그리고 니사의 그레고리오 같은 분들은 신플라톤주의 학파에서 데오리아[theoria]라는 말을 가져와 사용했다. 이것은 원래 ‘진리에 대한 지적인 시각’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것을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 데오리아[theoria]를 지혜를 가진 인간의 최고의 활동으로 간주한 것이다. 이러한 기술적인 그리스용어를 사용하면서 자신의 영적인 뿌리에 몰두한 그리스 교부들이 사랑을 통하여 얻어지는 일종의 경험적지식이라는 히브리어의 다아드[da'ath]의 뜻을 여기에 첨가했다. 이렇게 확대된 뜻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었던 데오리아[theoria]가 후에 라틴어의 콘템플라시오[contemplatio]라는 말로 번역되면서 그리스도인의 전통으로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6세기 말에 대 그레고리오 성인이 정리했다. 그는 관상[contemplatio]을 ‘사랑으로 가득히 충만 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라고 설명했다. 성 그레고리오에게 관상은 성서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묵상의 열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선물이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 안에 쉼’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쉼’의 상태에서는 처음에 찾던 ‘하나님을 맛봄’과 같은 체험을 마음과 가슴이 더 이상 찾지 않는다. 이 상태는 모든 상태가 정지된 상태와 같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많은 활동과 사고들이 하나의 활동과 사고로 합쳐져서 이 기도의 시간에 자신의 깊은 내면 속에서 하나님이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에 자신이 동의한다는 것과 같은 하나의 단순한 활동과 사고로 집중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현존하신다는 친밀한 체험에 바탕을 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라는 뜻으로 관상을 이해하는 것은 중세까지 계속된다. 극기 고행과 영적인 수련에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목표와 일부로서 언제나 관상을 포함하고 있었다.

거룩한 독서는 관상기도를 계발하는 데 가장 전통적인 방법이다. 거룩한 독서는 초대교회 시대부터 그리스도교 수도생활의 근간을 이루었고, 그것은 성서의 내용을 마치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하나님이 토론의 주제를 선택해 주시는 것처럼 말씀을 신중하게 듣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룩한 독서의 방법을 따르는 사람들은 더욱 깊은 수준의 주의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자발적인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성장하면서 정상적으로 나타나며, 관상의 은총은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정상적으로 주시는 응답이다.

거룩한 독서에는 성성 내용의 말씀을 생각하는 사색 부분은 meditatio, 즉 논리적 묵상이라고 한다. 이 사색에 따라 의지가 자발적으로 움직여서 응답하는 것을 oratio, 즉 정감적 기도라고 한다. 사색들과 의지에 따른 어떤 활동들이 단순화되면서 하나님 안에 쉬게 되는 데 이것을 contemplatio, 즉 관상이라고 한다.

이러한 세 가지 활동[논리적 묵상, 정감적 기도, 관상]은 기도시간 중에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다. 이것들은 서로 얽혀 있다. 경우에 따라서 아주 중요한 면담을 나누는 것처럼 주님께 귀를 기울이면서 자신의 묵상이나 의지의 행동 혹은 침묵으로 여기에 응답할 수도 있거나 관상에 몰입할 수도 있다. 관상기도 수련은 우리의 마음을 공백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 사색이나 정감적 기도를 넘어서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려는 것인데 이것은 더욱 친밀한 교제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관상기도의 목표는 사고나 대화를 없애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을 비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관상기도 중에 우리는 사색이나 의지의 활동을 반복하기를 멈춘다. 사랑에 뿌리를 두고 하나님의 현존을 인식하게 되는 특별한 종류의 지식이 생겨나서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고질적인 성찰을 바꾸어 간다.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체험을 하면,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모든 것의 중심으로 삶는 우리의 버릇에서 해방된다. 신비가들이 ‘공허[空虛]다 무[無]다’하는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시면서 비우심을 실천하셨다. 즉 자신의 특권과 그에 따른 거룩한 위엄을 버리셨다. 무[無]는 진공과 같은 뜻의 무[無]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활동에 집착하는 것에 대한 무[無]라는 뜻을 갖는다. 우리의 사색이나 의지의 활동은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것들을 초월해서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완전한 자아포기, 자기를 비움]를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일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관상기도는 세례의 은총과 거룩한 독서를 정기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정상적으로 발전된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과 가슴[우리의 전 존제], 사고나 언어나 정서를 넘어서 자신을 하나님께 열어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은총에 힘입어 우리의 인식을 하나님께 열어 드릴 수 있게 된다. 그 하나님은 우리 안에, 우리의 호흡보다 더 가까이에, 우리의 사고보다 더 가깝게, 우리의 선택보다 더 가까이에, 그리고 우리의 의식보다 더 가까이에 계심을 우리의 믿음으로 알고 있는 분이시다. 관상기도는 내적인 변형의 과정이며,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관계이며, 우리가 동의만 한다면 하나님과 일치로 인도하는 과정이다.

어떤 사람들은 관상을 정신적[Katophatic] 관상과 심층적[apophatic] 관상으로 구분하며 이것들은 때로 via positia, 혹은 ‘긍정의 길’이나 via negatia, 혹은 ‘부정적 길’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처럼 상반되는 것처럼 구별 짓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정신적 관상은 오히려 관상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함이 옳다. 이것은 거룩한 상징에 대한 정감적인 반응이며 이성과, 상상과 기억과 정서의 사용을 수련해서 믿음의 진실에 자신을 동화시키면서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계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는 시각적 명상이나 성화 등의 경배들이 포함된다.

심층적 관상은 그 관계에서 더욱 진전된 단계이다. 이것은 어떤 특별한 호동을 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 안에 쉬는 것이며 단지 하나님의 현존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의를 주는 것이다. 이것은 이 선물을 받은 사람에 따라서 다른 형태를 취할 수 있다. ‘관상’이라는 용어를 이러한 종류의 기도에 제한하여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심층적 관상은 ‘도무지 알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라는 아주 잘 못된 오해를 수정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심층적 방법에는 말하는 ‘도무지 알 수 없음’은 ‘전혀 알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생ㄱ각조차 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인데, 즉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와 감정과 같은 인간적인 기능들을 넘어서 단순히 하나님 안에 쉼을 뜻한다.

그러나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알아보기 위해서 다른 종류의 기능들이 동원되는데, 이것은 좀 더 인식의 섬세한 수준의 기능에서 일어난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이러한 기능들을 ‘영적인 감각’이라고 가르친다.

심층적 관상에서 이성적인 지력으로는 ‘알 수 없다’라는 말은 동서간의 대화에서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한다. 이것은 우리 경험을 서로 이해하게 하는 공통적인 언어를 구성할 수 있게 하며 이것 없이는 더 높은 수준의 의식에 관하여 대화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영적인 지혜를 찾아 동양으로 갔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게 했는데, 인간의 사고와 감정보다 더욱 깊은 수준에서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이해하는 그 무엇이 그리스도교 관상의 전통에 있다는 것을 듣고서 자신의 옛날의 신앙으로 그들이 되돌아올 수 있게 만들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관상적 전통에 대한 혼동과 논쟁을 일으키는 다른 문제점을 알아보기로 한다. 그것은 아빌라의 테레사로부터 오는 것인데, 우리가 어떠한 관상의 상태를 받든지 간에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성에 대한 생각만은 결코 빼 버려서는 안된다는 그녀의 가름치에서 오는 것이다. 관상기도의 전체의 기본이 사고를 넘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에게 적절한 수련으로서 과연 심층적 관상이 합당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고, 이것이 때때로 그렇게 해석되어 왔던 것이다. 즉 논리적 묵상에서 관상기도로 넘어갈 때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사랑이 발전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영적 여정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은 오직 생각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는 것인가? 관상의 영역을 아주 깊게, 그리고 무아의 경지까지 알고 있던 테레사는, 그 당신의 어떤 과장된 경향, 즉 하나님의 왕국은 고통 받는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동정에 바탕을 두고 세워진다는 그리스도의 비전을 상실한, 즉 왜곡된 개인적 신비주의에 대하여 반응을 나타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떻든지 간에 복음으로부터 영감을 얻지 않은 기도의 방법들을 그리스도와의 관계의 정상적인 발전이나 관상기도로 일어나는 좀더 친밀한 차원, 즉 사고나 감정을 넘어서 하나님의 현존 안에 쉰다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바울사도가 말했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께서 우리의 가슴 안에 부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도 관상기도가 자라면서 이러한 은총의 움직임에 온전히 참여하게 된다. 하나님의 현존이 충만해지면 사고나 감정이나 어떤 특별한 행동들로 이루는 디딤돌들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 적어도 습관적으로는 말이다. 테레사와 같은 시대 사람이면서 교회의 동료학자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의 저서 ‘사랑의 살아 있는 불길’에서, 사랑으로 찬 주의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상태로 성령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 이러한 이끌림에 이끌리지 못하도록 만들 수 도 있는 잘못된 영적지도자의 위험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일단 그리스도의 강생의 신비에 대한 믿음을 가진 이상, 기도 중에 우리의 주의는 그 신비 안에 머물고 계신 거룩한 위격의 현존 안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일상생활로 돌아와서는 이 변형된 의식을 지닌 채 성령의 열매와 진복[참된 행복]을 생활 속에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그리스도교의 전통 안에 아주 오래면서도 존귀한 역사를 기지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기도는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의 에바그리오, 요한 카시안, 그리고 성 요한 클리마코 등과 같은 사막의 교부들이 수련했고 가르쳤으며 모든 세대에도 이 전통을 대표하는 분들이 있었다.
교부시대에는 서양에 성 아우구스투스와 성 대 그레고리오, 그리고 동양에 유사 디오니시오와 헤시카스트들이 있었다.

중세기에는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성 티에리의 월리암, 카투시안인 귀도, 그리고 라인랜드의 신비가들인성 힐데가르다, 성 메헤틸트, 마이스터 에카르트, 루이스브뢰크 그리고 뒤에 준주성범을 쓴 타울러 등이 있으며, 영국의 14세기 신비가들로는 ‘무지의 구름’을 쓴 저자와 월터 힐튼, 리처드 롤, 그리고 노르위치의 줄리앙 등이 있었다.

종교개혁 후에는 가르멜수도회의 아빌라의 테레서, 십자가의 성 요한, 그리고 리지외의 테레사가 있었고, 프랑스 학파의 영적인 저자로서 프란치스코 드 살, 샹탈의 성 제인, 그리고 베룰 추기경들이 있고, 예수회 소속으로 드 코사드, 랄르몽, 수린 신부들이 있으며, 베네딕토 소속으로 아우구스티노 베이커 신부, 요한 차프만 신부, 그리고 현태 시토회 중에는 비탈 르호디 신부와 토마스 머턴 등이 있다.

지난 여러 세기 동안 관상기도를 계발시키는 방법들이 여러 이름으로 불렸는데, 이 이름들은 그들이 각각 선택한 방법들에 따른 것이다. 그 중에는 순수한 기도[카시안], 믿음의 기도, 가슴의 기도, 단순의 기도, 단순 주목[注目]의 기도 등이 있다.

우리 시대에는 수도회에서 주도했는데 그 중 예수회와 개혁 가르멜회가 주목할 만한 수도회로서 그들은 그들의 창시자의 관상적인 지향을 쇄신하면서 그들의 영성을 평신도들과 나누려고 했다. 베네딕토회의 요한 메인 신부는 관상기도를 계발하는 한 가지 방법을 새롭게 했는데 그는 이것이 카시안의 방법이라고 소개했다. 향심기도의 방법은 근본적으로 14세기의 ‘무지의 구름’과 십자가의 성 요한의 가르침에 근거를 둔 것인데, 이것은 이전의 가르침들을 현대화한 형태로 만들고 거기에 어떤 순서와 절도를 가미하여 제시하려고 한 것이다.

관상의 발전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내면의 성’에서 그것들을 4궁방부터 시작하여 묘사했다. 십자가의 성 요한 역시 관상의 발전을 기술하면서 두 가지길로 분별했다. 우리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발전에 관상기도가 끼치는 중대한 역할에 대하여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는데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는 영적인 여정을 제시하면서, 이성을 통해 얻어지는 믿음이 점차로 자라면 나중에는 관념과 상징의 도움은 사라진다고 했다. 이에 따라 믿음이 점점 순수해지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 그리고 무조건 사랑을 베푸는 일을 할 수 있는 기초를 이 믿음이 든든하게 형성해 준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사실상, 하나님과의 일치가 자라려면 우리의 인간적인 활동이 점차 줄어들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기다리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그것은 감각의 밤에 감각적 기능들이 점차로 정화되고 영의 밤에 영적인 기능들이 점차로 정화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심리적인 체험들이 때때로 일어나기는 하지만, 관상적 길의 요체는 하나님에 대한 심리적인 체험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관상의 요체는 신뢰하면서 사랑으로 갖는 믿음이며, 이것을 옹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들어 올려 주시면서 복음의 가치와 성령의 역사에 역행하는 우리의 의식적인 혹은 무의식적인 장애를 정화시켜 주시는 것이다. 고전적이고 엄격한 의미에서 관상기도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이다.

2. 기독교 전통에서의 관상기도의 역사

오늘날 교회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하여 관상기도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봄이 도움이 될 것이다.

1). 초기 기독교시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는 평신도와 수도자에게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라고 불리는 기도의 방법이 권장되었다. 이 Lectio Divina는 글자 그대로 “거룩한 독서”로서 성서를 읽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성서에 경청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수도자들은 거룩한 말씀의 단어들을 입술로 계속 반복함으로써 신체도 이 기도 과정에 함입되도록 하였다. 그들은 거룩한 독서를 통하여 더 깊은 내적 주의[注意]를 가지고 말씀을 듣는 힘을 구하려고 한 것이다. 기도란 그들에게는 성서로 말씀을 듣고 전례로 찬양드리는, 바로 그 하나님께 대한 응답인 것이다.

성서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는 성찰의 부분은 묵상[meditatio]라고 불렸다. 그리고 자발적인 의지의 움직임에 따라 성찰한 것에 반응하는 것을 응답[oratorio]라고 불렀다. 이러한 성찰과 의지의 활동이 단순화되면서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의 쉼 상태로 옳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관상[contemplatio]를 뜻한다.

묵상과 응답과 관상의 이 세 가지 행위는 한 기도 시간 동안에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얽혀 있다. 천사들이 야곱의 사다리를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 처럼 기도하는 사람의 주의는 의식[意識]의 사다리를 오르락 내리락할 것으로 기대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때는 입술로 주님을 찬미하고 어떤 때는 생각으로 어떤 때는 의지의 행위로 또 어떤 때는 황홀한 관상으로 찬미할 수 있다. 관상은 하나님 말씀을 경청하면서 자연적으로 발달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논리적 묵상, 응답[기도], 관상 등으로 분명하게 독립된 부분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특징을 갖는 정신기도[Inental payer]라는 말은 16세기 이전의 그리스도교 전통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제 5 장 관상에 이르는 길 (관상의 단계)

제 1 절 두 종류의 관상의 길

영성사에서 말하는 관상의 길은 전통적으로 크게 두 종류로 나누고 있다.
첫 번째의 관상은 주부적 관상(ifused contemplation) 혹은 수동적 관상으로 무념적 방법(Apophatic way)이다. 영성의 흐름은 안토니오, 무지의 구름, 십자가의 성 요한, 토머스 머턴에 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첫 번째와는 다른 또 하나의 전통은 습득적 관상(acquired contemplation) 혹은 능동적 관상으로 유념적 방법(Kataphatic way)이다. 영성의 흐름은 이야시오식 관상이 여기에 해당된다.

1). 무념적 방법 (Apophatic way)
주부적 관상(ifused contemplation)으로 수동적 관상이라고도 한다. 일체의 이미지가 멈춘 순수 어두움의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일치를 경험하는 전통이다. 관상경험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체의 상상력이나 이미지를 끊임없이 제거하여 감각의 어두운 밤과 영의 어두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2) 유념적 방법(Kataphatic way)
습득적 관상(acquired contemplation)으로 능동적 관상이라고도 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상상력이나 갖가지의 이미지가 관상적인 체험에 이르는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1. 기도 (Prayer)
기도할 때에 우리는 삶의 통제권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부름을 받는다. 즉,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방법으로 우리와 교제하시도록 하라는 부름을 받는다.

2. 기도하는 긍정적 방법과 부정적 방법
첫째 방법, 긍정적인 방법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방법이다. 긍정적인 전통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하면서 긍정하는 방법이다. 이 전통에서는 기도를 하나의 관계로 간주한다.

다른 방법은 부정적인 전통이다. 긍정적인 전통과 균형을 이루는 또 다른 방법이다. 부정의 전통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강조하는 부정의 방법이다. 우리는 개념이나 상징이나 이미지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망각에 의해서, 무지에 의해서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

3. 습득적 관상과 주부적 관상
관상이라는 단어의 표준적 의미는 "하나님 안에서 쉼"이다. 관상에는 습득적 관상(acquired contemplation)과 주부적 관상(infused contemplation)이 있다. 습득적 관상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쉬기 위해 성령의 감화 아래서 기울이는 노력을 말한다.

주부적 관상은 성령이 주시는 선물이다. 이때, 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쉬기 위해 행하는 노력을 본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이 닿는 한도까지만 갈수 있다. 그 다음에는 성령께서 맡으셔서 우리를 보다 깊은 쉼으로 인도하신다.

제2절 관상의 단계

1. 그리스도인의 세 단계의 삶 (관상기도의 단계)
첫 번째 단계는 정화의 길입니다. 성경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마5:8)고 했다. 우리가 자유의 영이신 성령님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속해 있는 우리의 존재의 정화를 의미한다.

두 번째 단계인 조명의 길에서 사실상 관상기도가 시작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 쪽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을 열심히 찾게 됩니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은총의 능력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죄악의 길로 다시 빠질 수도 없고 모든 문제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맑고 밝은 내적인 평화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과는 정반대로 내적인 소동을 경험한다. 전에는 결코 생각지도 못했던 범죄의 가능성과 하나님을 배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내적인 비젼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다 선명하게 인지하며, 여전히 그 길을 걷는데 많은 장애물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렇기에 지속적인 자기 포기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정화단계에서의 정화가 능동적인 것이라면, 조명단계에서의 정화는 수동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세 번째 단계는 합일의 길입니다. 조명의 단계를 지나며 자아는 더욱 고양되고 확장되면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현존 안에 깊이 거하며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자신이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여기서 바로 완성의 단계인 일치의 단계(사랑 나누기)에 이르게 된다.

2. 데레사의 관상의 단계
1). “주입된 평정”(注入平靜 : infused recollection)
감각의 밤이 완성에 이르려 할 때에 솟아나는 첫 번째 은총은, 마치 신선한 공기가 자신의 영에 들어오는 것을 느끼는 것과 같은 신비스런 깨달음이다.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현존하시는 하나님께서 뿜어내시는 향기가 우리의 영의 기능 안으로 도달한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이것을 “주입된 평정”(注入平靜 : infused recollection)이라고 불렀다.

2). 평정(平靜)의 기도(prayer of quiet)
다음 단계로서 "평정의 기도"는 주입된 평정보다 더 깊어지는 기도이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신성한 활동이 우리의 의지를 영적인 끌어안음 같은 형태로 꼭 잡아 주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의 의지는 거기에서 떠날 수 있어도 그러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사실은 위안 받는다는 감정에 우리가 쉽게 집착되기 때문에 기도하는 시간을 늘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기도가 즐거워지면 그것을 더욱 얻고 싶어 한다. 그리고 영적인 탐식의 덫에 걸린 우리는 풍성하게 주시는 하나님께 더더욱 많은 쾌락을 얻어내고자 성급하게 욕심을 부리게 된다.

3). 일치의 기도
하나님의 현존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은 갑자기 일어날 수도 있고 서서히 우리를 휘어잡을 수도 있다. 이것은 마치 위에서 내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밑에서 올라오는 것 같기도 하다. 빛나는 구름처럼 우리를 감싸기도 하고 우리 안에서 솟아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든 상상과 기억들이 점차로 조용해지면서 깊은 평정의 감각을 갖는다. 그것들이 완전히 조용해지고 모든 의지가 하나님 안으로 빠져 들면 그 안에서는 자아 성찰 같은 것이 없다. 이것이 "온전한 일치의 기도"의 체험이며, 여기서 모든 기능들이 잠잠해지고 하나님 안에서 쉬게 되는 것이다.

4). 변형하는 일치
변형하는 일치란 어떤 경험들을 연속적으로 갖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재구성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현존은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의 세계에 네 번째의 차원이 되어 주신다. 변형하는 일치의 관점에서 보면, 관상 기도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수련 자체이지, 그에 따라오는 심리적인 내용들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이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면, 영적인 여정도 훨씬 쉬워질 것이다. 여정을 처음 시작할 때에 무슨 일이든 생겨야 한다는 기대와,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비평들이 결국 우리에게 불안과 실망을 가져다주는 원인들이 된다.

3. 관상에 나타나는 특징
오먼은 완전한 관상(주부적 관상)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하나님 현존의 체험이 현저하다.
2). 영혼 안에 초자연적인 것이 엄습하는 느낌을 받는다.
3). 본성적인 노력으로는 할 수 없는 체험을 할 수 있다.
4). 능동적이기 보다 수동적이다.
5). 하나님에 대한 체험적인 지식은 명확하거나 뚜렷하지 못하고 모호하고 혼잡스러울 수 있다.
6). 관상자가 하나님의 활동 아래 있다는 안정감과 확신을 갖는다.
7). 관상자가 은총상태에 있다는 윤리적 확신을 갖는다.
8). 신비적 체험은 그 체험의 서술이 매우 어렵다.
9). 하나님과의 일치의 체험과 동시에 존재적 변화를 가져온다.
10). 신비체험은 흔히 신체에 반응을 일으킨다.
11). 신비적 기도는 흔히 기능정지나 결박을 가져온다.
12). 실천적 삶에 대한 큰 충동을 느낀다.

제3절 관상기도의 열매

경험에 따르면 매일의 관상기도의 열매와 은혜는 기도하는 그 시간에 받는다기보다는 기도 시간밖에, 즉 일상생활에 영향을 주어서 우리 삶의 질을 높여 준다.

1). 관상기도는 “인격적 변화를 가져온다.”
2) 관상기도는 “자신에게 더욱 더 진실하게 된다.”
3) 관상기도가 다른 기도들에게 주는 중요한 영향은 새로운 의미와 일치의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4) 매일의 관상기도 실천은 우리를 '하나님을 현실화'한 사람이 되게 해준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일편단심으로 그분의 '거룩한 현존(darshan)'을 추구하면, 우리의 마음속에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그분을 알게 될 것이고, 그분으로 가득 차게 되고, 점점 더 그분과 같아지고, 그분과 하나가 된다. 완전히 그분이 된다.

제4절 집중기도(Centering Prayer)의 열매

1). 외적인 열매 -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
첫째 열매는 포기하는 능력이다.
두 번째 열매는 항상 주는 것보다는 받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세 번째 열매는 우리의 삶에서 발생하는 점진적인 변화의 과정이다.
네 번째 열매는 "가난한 사람들의 외침"에 보다 민감하게 되는 것이다.

2). 내적인 열매-내면에서 경험되는 것
거짓 자아가 죽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다 크게 의식한다. 지금까지 집중기도의 열매 중 몇 가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들은 성령께 대해 마음을 열어 놓은 모든 사람의 삶에서 발견된다. 앞에서 여러 번 말했던 것처럼, 집중기도의 핵심은 동의-우리의 삶 안에서의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에 대한 동의이다. 그 기도는 단순히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단순하게 동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 헌신하기로 동의하는 것은 매우 심오한 일이다. 이 기도의 열매는 동의하는 힘의 결과이다. 집중기도는 동의하려는 우리의 의도, 동의할 뿐만 아니라 찬양하려는 의도를 담는 그릇이다. 그리고 그 찬양 안에서 성령이 오셔서 관상기도의 은사를 주실 것이다. 그 은사가 주어질 때에 토마스 키팅이 말한 "내적 변화의 과정, 하나님이 주도하시며 우리가 동의할 경우 신적 합일로이어질 대화"가 시작된다.



제 6 장 영적여정의 관념적 배경

1.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
관상기도는 인간의 조건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게 한다. 이 기도는 전(全) 생애에 있었던 정서적 상처를 치유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변형하는 체험을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는데, 복음이 우리를 초대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적어도 처음 시작할 때의 영적 여정의 방향은 우리의 행동 동기와 무의식적인 정서 프로그램, 그리고 우리의 반응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 여정은 아주 깨끗한 과거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구축해 온 가치관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일 이것들과 부딪쳐서 재구성하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언젠가는 우리의 여정을 침수시켜 가라앉게 하거나, 우리를 바리사이 주의자로 만들어서 종교적이고 영적인 사람들이 갖는 직업적인 위험을 안게 만들 것이다.

인간의 생애에 발달 과정이 있다는 것은 지난 100년 동안 아주 잘 알려져 왔고, 이것은 영적 여정에 아주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비유를 든다면, 우리의 개인적인 역사는 우리의 뇌나 신경 세포의 생물적 컴퓨터에 수록되어 있다. 우리의 기억 저장소에는 우리가 태중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특히 강한 정서적인 성격을 띠는 것들이 모두 저장되어 있다. 우리 생애의 초년기에는 자아에 대한 의식이 없지만, 인간의 기본 욕구와 그것에 대한 반응들은 우리 뇌의 생물적 컴퓨터에 모두 저장되어 있다. 이 컴퓨터는 이미 행복을 추구하는 프로그램을 발전시키고 있으며, 이 단계에서 행복이란 우리의 본능적 욕구를 즉시 충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활동하는 거짓 자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쌓인 나쁜 덩어리들을 찾아내어 일종의 압착기 같은 것으로 우리의 심리방어체제를 뚫어 파내기 시작하시고는, 마침내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나의 숨겨져 있는 비밀 장소를 들추어 보여주신다. 이때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끝장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로운 깊이로 가지라고 부르시는 초대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고귀한 말씀에 응답하려면 비움과 치유가 많이 일어나야 한다. 거짓자아의 잡음이 너무 높으면, 하나님 생명이 온전히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도 없다.

우리는 내면에 있는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완전히 도망칠 수는 없지만, 그것들을 인정하고 대면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행동 동기가 자아 중심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작용하도록,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은 변형하는 일치(transforming union)로 부르시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다.

3. 쓰라린 정서
그는 자신의 무의식의 수준에 있는 가치 체계에 아주 잘못된 것이 있기 때문에 정서적 혼란을 겪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무의식 속에 있는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 때문에 일어난 정서가 너무 강해서 그 상황의 사실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적절한 반응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그의 고통이 다른 사람에 의해 생긴 것으로 전가하고 이렇게 말한다. "그 여자만 어진다면 행복할 텐데!" 그리고는 정서적 폭풍을 겪을 때마다 그는 "왜 사람들은 나를 이렇게 취급하는 것인가? 내가 무엇을 했기 때문이란 말인가?" 하며 의아해 한다. 그가 자신의 정서 프로그램과 그것의 표현에 자신을 내맡길 때마다 그는 절망, 만족, 좌절 그리고 보상받으려는 끝없는 욕구의 사이클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어떠한 흥분의 정서도 정서 프로그램이 좌절되었다는 것을 경고하는 표시이다. 그 원인은 누구의 잘못된 행동이나 혹은 불쾌한 사건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늘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일로 흥분하는 건 우리 스스로가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우리가 그 문제의 뿌리를 바꾸지 않는 한 계속해서 정서적 혼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 문제란 바로 우리의 무의식속에 있는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이다. 이 변화를 위한 노력을 우리는 덕의 수련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비판을 하거나 심하게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우리의 욕망이나 싫어하는 마음을 메마른 상태로 내버려 두면, 물이 마른 사막에서 풀이 말라버리듯 말라 버리게 된다.

영적인 여정에 들어서면, 행복을 위한 우리의 정서 프로그램이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욕구에 반응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막고 있음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자기애적(自己愛的)욕망의 세계에 파묻혀 버릴 때에는 다른 사람들이 도움을 찾을 때에 그들의 욕구에 자신을 내어 주지 못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분명하게 보면서 그들의 욕구에 반응하는 것은 우리의 내적 자유와 직접적으로 비례한다.

4. 인간의 조건
심리학은 "신학의 새로운 시녀"가 되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계시에 관한 신학적 사색을 통하여 그리고 관상기도를 통하여 얻어 온 이전의 성찰들에게 새로운 타당성을 부여하였다.
이미 앞 장에서 본 바와 같이 아동 심리학자 장 피아제가 개척한 발달 심리학의 모델은 행복을 위한 무의식적 정서 프로그램의 근원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진화론적인 모델로서 켄 월버(Ken Wither)가 존재의 거대한 고리라고 부른 모델을 따르기로 한다.

첫 1년 동안 유아는 파충류적 의식(意識 : consciousness)을 경험하여 물질과 쾌락 감각에 완전히 빠져 있는 생활을 한다. 첫해에는 엄마와 하나인 경험을 하며 모체 자궁에서 즐기던 삶의 연속이다. 만일 엄마와의 연대가 올바르게 자리를 잡으면, 유아는 인간의 모험을 정서적으로 받아들이는 길에 들어선다.

한 20만 년쯤 전에 파충류 의식에서 반인 반수(半人半獸)의 "타이폰적(typhonic consciousness) 의식"으로 넘어갔다.

기원전 12000년경에 언어가 생겨나면서 타이폰적 의식에서 "신화적 회원(mythic membership) 의식"으로 가속적으로 옮겨 갔다.

기원전 3000년경에 가장 극적인 인간의 의식의 도약이 일어났다. 그것은 이성(理性)의 출현이다. 인류학자는 이 수준의 의식을 "정신 자아적(mental egoic)" 이라고 부르며 제우스가 용을 죽이는 그리스 신화로 상징된다. 제우스는 이성을 대표하며, 용은 정서의 지배와 원시적 의식 수준을 의미한다.

복음은 인간 인격체를 온전한 발달로 부르는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더 나아간 성장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즉 성숙한 믿음과 사랑이 우리를 일으켜 세워서 직관적이고 일치적인 수준의 의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5. 신화적 회원 의식
과잉 동일시
예수님은 신화적 회원 의식 수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강력히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 갖는 힘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 말씀이 그분이 우리의 부모를 사랑하지 말고 돌보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아닌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예수님의 시대에 나이든 부모를 봉양하는 대신 성전에 헌금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맹렬히 단죄하셨다. 이 문맥으로 보면, 우리가 복음의 가치를 따르지 못하도록 막는 사회적 동조의 행동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하라고 촉구하시는 것이다.

초자아
발달하고 있는 인류의 삶에서 초자아는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데 이것은 어떤 것이 옳은 행동이고 어떤 것이 그른 행동이라고 하는 정서적인 판단을 말한다. 선입견은 우리를 한 방향으로 일하도록 속박한다. 이것이 내가자신이 소속된 단체의 가치에 과잉 동일시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선입견과 고식적인 가치관은 우리가 은총으로 나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관상기도는 우리의 내적인 자유가 늘어나서 그 선입견과 가치관들을 복음에 비추어 다시 평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공포의 정서
성서 상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란 말은 정서적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뜻하는 성서상의 기술적인 용어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하나님의 초월적이심 그리고 무한하심에 대한 존경과 경외를 품는 것과 그분의 선하심과 사랑에 대해 신뢰를 품는 것이다.

그분이 부르신 하나님은 모든 이를 무한히 돌보시며,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시고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바로 이러한 말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말이다.

6. 정신 자아적 의식
에덴동산의 이야기에서는 선선한 저녁에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와 말씀을 나누시는 멋진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자연의 힘과 조화를 이루는 살아 있는 이미지 그것이다. 이러한 진정한 낙원은 어느 장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상태를 나타낸다. 우리의 첫번째 조상들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향유하는 동안에는 모든 피조물과도 친했었다. 그 친밀한 관계를 잃어버리자마자, 곡식 대신에 가시나무가 돋아나고 실락한 인간 본성이 갖는 모든 질병들이 찾아 들었다.

예수는 우리가 행복을 찾는 방향을 바꾸고 내적 자유와 자아 초월로 열려진 새로운 인간성으로 나아가라고 초대하신다. 현재의 진화적 발전 단계에서 인간 가족이 당면한 일차적인 문제는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보았듯이, 어렸을 때에 억압되었던 우리의 하나님과의 연대성을 재발견함을 뜻한다.

정신 자아적 수준은 우리의 행동과 관계에 대하여 도덕적인 책임이 온전하게 출현하는 수준이다. 이것이 진정한 양심의 수준이며, 옳고 그름을 관념적인 정도가 아닌 올바르게 구별하는 능력을 갖춘 진정한 양심의 수준이다. 그러므로 이제 개인적인 죄는 더욱 심각해진다. 기본적으로 개인적 죄란 자신의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과 문화적 조건화의 가치들은 인정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욕구 그리고 자신의 참다운 선함을 도외시하는 것을 말한다.

7. 네 가지 동의
영적인 여정은 하나님의 현존에 대하여 그리고 모든 실재(reality)에 대하여 동의를 하는 훈련이다. 근본적으로 이것이 진정한 겸손의 의미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환경 때문에 아동기와 그 후에 자라면서도 할 수 없었던 동의(同意)를 성장하는 과정 중에 하라고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다.

신학자 존 둔(John S. Dunne)은 영적 여정은 출생에서부터 사망에 이르는 삶의 과정과 상응한다고 하였다. 발달의 중요한 각 단계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연령에 맞는 동의를 하도록 요구하신다. 둔이 제시한 것을 가까이 살펴보자.

1). 아동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본성이 갖는 기본적으로 선한 것 모두에 대해 동의하도록 요구하신다.

2). 초기 청소년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재능과 창조적 에너지를 활용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발달하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신다.

3). 성년기 초기에 질병과 노령과 죽음을 보면서 우리의 비존재(인간의 존재는 결국 보잘것 없음: 역자주)와 자아소멸(자신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쇠약해 가며 결국 죽어 없어짐 : 역자 주)에 대해 세 번째 동의를 하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초대하신다.

4). 네 번째 동의는 변형(transform)에 대한 동의이다.
하나님의 창조에 동의하고, 인간으로서 우리가 기본적으로 선함에 동의하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랑하던 것을 떠나보내는 것에 동의하면, 우리는 마지막으로 굴복의 단계에 도달한다. 즉 우리의 거짓 자아가 죽고 참 자아가 태어나게 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9. 영적 여정의 본보기로서의 안토니오 성인
4세기에 크리스찬 수도원의 아버지인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는 영적 여정의 내면이 우리에게 자세히 알려진 몇 안 되는 거룩한 인물 중 하나이다. 그의 전기는 우리에게 적극적인 대처와 소극적인 정화 두 가지 방법으로 거짓 자아를 무너뜨리는 본보기를 보여준다. 물론 버니의 경우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거짓 자아를 무너뜨리는 긍정적 방법의 예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기심은 지속적인 자기 증여에 발붙일 곳을 만들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두 가지 방법을 조화시킨 것이 아마 인간 조건에 대해 가장 실제적으로 반응하는 길일 것이다.

그는 한 사람에게서 은혜로움을, 또 다른 사람에게서는 성실한 기도생활을, 한 사람의 기질을 연구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의 친절함을 본받으려 하였다. 그는 한 사람이 밤을 새우며 하는 기도와 다른 사람이 하는 공부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는 어떤 사람에게서는 끈기 있는 참을성을, 다른 사람에게서는 단식하는 것과 맨바닥에서 자는 잠을 선망하며 바라보았다. 그는 한 사람의 온유함과 다른 사람의 자제력을 살폈다. 그리고 각각의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서로간의 사랑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안토니오의 생애 4장 21).

다음에 안토니오의 여정의 첫 단계에서 악의 힘과 더욱 커진 투쟁에서 표현해 놓은 기본적인 주제를 나타내는 아타나시오의 글을 살펴보자.

좋은 것을 미워하고 질투하는 악마는 아직도 젊은이가 가진 대단한 결의를 그대로 볼 수가 없어서, 안토니오에 대해 그의 의례적인 전략을 꾸미기 시작했다(안토니오의 생애 5장 22).

그를 계속해서 짓이겨 대는 세속적인 유혹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 안에서 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혼란과 혼동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면 그것에 저항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 결단,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였다. 안토니오는 영적 여정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이것이 바로 시간을 초월하여 영적 여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기다리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모든 유혹은 그 사람의 개인적인 역사나 특정한 약점에 맞추어서 만들어진다. 덕의 엄격함, 수덕하는 기간, 수덕에 따르는 커다란 노력 등이 여러가지 형태로, 그리고 각각 다른 강도를 가지고 받는 유혹들이다. 또 다른 하나의 형태는 자신의 배우자나 가족, 또는 공동체의 회원과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내가 트라피스트 수도회에서 마지막 허원을 하게 되었을 때, "그렇게도 열심히 기도하여 나에게 참을 수 없을 만큼의 부러움을 주는 이 사람들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50년, 60년을 살아갈 것인가?" 하는 질문에 부딪쳤었다.

각각의 유혹에 안토니오는 모두 같은 반응으로 대하였다. 즉 영적인 여정에 끈기 있게 나가려는 결단, 그럴 수 있는 은총을 주시리라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끊임없는 기도였다. 이러한 각각의 의향은 믿음, 희망, 사랑의 실천이었다.



제 7 장 내적정화와 하나님의 치료

제 1 절. 내적 정화
관상의 길을 시작하여 하나님과의 일치로 가는 영적 여정은 우리 인격 안에 있는 어두움(거짓자아 : 죄책감, 수치심, 이기적 동기, 방어기제, 편견 등)이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어두운 밤”이라고 표현한 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화(purification)해 주시는 과정을 말한다. 영적여정이란 바로 이러한 정화의 여정이다.···

1) 거짓자아란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나 거짓자아(false self)를 가지고 있다. 거짓자아란 어려서부터 세상에 살면서 자신의 이기적인 동기로 행복을 추구하며 형성시킨 습관과 태도, 관념과 가치관들이 혼합된 것이다. 여기에 사회에서 제공하는 편견과 잘못된 가치관에 동조하고 자신의 과오와 결함을 옹호하거나 보호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심리기제들을 모두 합한 자아의식이다. 이 거짓자아는 하나님께서 심어 주신 본성 대신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만든 이러한 잘못된 자아의식(거짓자아)으로 살아간다.

2) 거짓자아의 형성
인간에게는 생존/안전, 애정/존중, 권력/통제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가 있다. 이러한 욕구를 좌절시키는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 분노, 슬픔, 두려움, 자부심, 탐욕, 부러움, 허영심, 무감정 등의 쓰라린 감정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욕구의 좌절들은 그 욕구를 채워줄 대상을 찾게 된다. 이 정서들은 진실성이 결여된 것으로 자신들의 지력을 사용하여 정당화, 합리화, 미화, 변명, 투사, 대치, 부인, 억압과 같은 심리적 방어기제로 대체된다. 그리고 이 무의식적인 동기들이 자신의 인격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3) 쓰라린 정서의 자각
관상기도 중에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감정들을 직시하여 억압하지 말고 그것을 드러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지금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이 바로 내가 과거부터 쌓아놓은 감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고통스러운 감정, 아픈 마음을 직면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증오심이나 분한 감정이 일어날 때, 그것이 누구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 담아놓은 감정이 올라온 것임을 인정하며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고통을 하나님 앞에서 쏟아내어야 한다. '내 안에 이런 아픔이 있구나.' 라고 자각하며 쓴 뿌리를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아픔을 하나님께 내어드릴 수 있다. 그리고 그 분의 치유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

1. 수동적 정화
기도, 특히 집중기도(Centering Prayer, 향심기도, 구심기도, 마음의 기도 등 다양한 표현이 사용된다) 중에, 자신의 삶에서의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에 동의할 때, 우리는 관상의 은사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수동적 정화는 관상의 은사의 열매들 중 하나이다.

2. 참 자아와 거짓자아 (자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심어 주신 본성(벧후 1:5, 요일 3:9 참조)인 참자아를 거부하고 자신의 거짓자아에 따라 사는 것이 죄입니다. 현대의 영성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심어 주신 우리의 자아를 참 자아라 부르고 원죄에 물든 자아를 거짓자아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창조 때부터 우리 안에 하나님의 본성이 있습니다. 또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세례 때에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 안에 성령이 함께하십니다. 즉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안에 현존하고 계시며 그 하나님의 현존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참된 나'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거짓자아에서 참 자아로 가는 것이 회개(Metanoia)입니다. 잘못된 행복 추구의 길에서 참된 행복 추구의 길로 가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1). 자아(自我, ego)
정신분석이론에서 '자기' 또는 '나'로서 경험되며 지각을 통해 외부세계와 접촉하는 인간성격의 일부분. 자아는 기억 · 평가 · 계획하고 여러 방식으로 주변의 물리적 · 사회적 세계에 반응하며 그 속에서 행동하는 부분이다.

2). 참 자아
참 자아란 무엇인가? 머튼은 이렇게 말한다. “나의 정체성의 비밀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 감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나의 실존과 평화와 행복과 관련된 문제는 단 한가지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발견함 안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하나님을 발견한다면 나 자신을 발견할 것이고, 내가 참 자아를 발견한다면 하나님을 발견할 것이다.”

토마스 키팅은 Open Mind, Open Hert에서 참 자아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의 기본적인 선(goodness)의 핵심은 우리의 참 자아이다. 그것의 무게 중심은 하나님이다. 우리의 기본적인 선을 받아들이는 것이 영적 여행에서의 도약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참 자아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비록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지만, 하나님과 우리의 참 자아는 동일하다.”

3). 거짓자아
거짓자아란 우리가 망상 속에서 만들어낸 자아이다. 우리는 그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내면에는 거짓자아를 선택하는데 도움을 주는 지식, 명예, 권력, 사랑 등의 중심점들이 있다. 우리는 여정을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가서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왔던 길로 돌아가야 한다. 그 길은 우리 자신의 영혼의 중심을 가로지른다. 하나님을 발견하려면 외적인 피조물이나 자신에 대한 내적인 망상에의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집중기도에서는 생각과 침묵 모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생각은 치유되어야 할 것을 운반해오며, 침묵은 치유가 이루어질 공간을 만들어 낸다. 전통적으로 이것이 거짓자아의 수동적 정화라고 이해된다. 우리가 관상의 은사를 적용하시는 성령께 자신을 개방하고 복종할 때에 거짓자아가 치료된다. 집중기도는 이 일이 발생할 수 있는 무대를 설정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이러한 능력을 갖지 못한다. 그 일을 하는 것을 관상적 은사, 즉 성령이시다.

4). 에너지 중심
세상에 태어난 우리에게는 안전과 생존의 욕구가 있었고, 그 욕구는 부모님께서 먹여 주고 입혀주고 살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제공해줌으로써 충족되었다. 성장하면서 부모와 주위 사람들이 이러한 욕구들을 충족시켜 주지 않거나, 우리가 그러한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다고 느낄 때, 우리는 보상 욕구와 프로그램들의 체계를 만들게 되는데, 나는 그것을 "에너지중심"(energy center)라고 부른다. 이 에너지 중심들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사건들에 대해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고 반응하는 방법의 근원이 된다. 따라서 항상 지배하려는 욕구, 또는 자신의 안전을 확인하려 하거나 자기가 받아야할 명성을 확보하려는 욕구가 존재한다.

3. 적극적인 정화
적극적인 정화(active purification)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사용하여 우리의 문제를 다루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의 기초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감연히(과감하게) 맞서야 한다.

4. 여행을 위한 태도
정화, 참 자아, 거짓자아 등에 대한 문제를 다루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몇 가지가 있다. 토마스 키딩은 그것들을 "여행을 위한 태도들"(attitudes for the journey)라고 부른다. 첫째, 우리는 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환영하고 돌보아 주어야 한다. 두번째 태도는, 모든 반대되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완전히 우리 편이심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세번째 태도는, 치료를 필요로 하는 우리의 욕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긍휼을 의지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기억해야 할 네번째 태도는, 신뢰는 완전한 사랑으로 발달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무덤에서 불러내고 계시다"고 생각해 보자.

제 2 절 하나님의 치료
우리 자신의 병적인 요소( 죄책감이나 영적 결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를 맡겨드리는 것이다. 토머스 키딩은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에 동의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성한 치유자"(Divine Theraphist)라고 부른다.

1) 무의식의 짐을 덜어 냄
무의식은 개인적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으로 구분된다. 개인 무의식은 자신이 알든 모르든 과거에 체험한 것들이 들어 있다. 무의식, 잠재의식을 의식의 세계로 끌어올리는 기도가 필요하다. 관상기도 중에 과거의 경험이 의식으로 올라오도록 과거경험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열어놓아야 한다. 과거를 살펴보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이 과거가 정화되어야 우리의 현재나 미래에 과거의 경험이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대상을 아무 선입견 없이 깨끗하고 맑은 유리창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2). 내적 정화의 과정
관상기도는 하나님께 우리를 정화시켜 달라고 맡겨드리는 것으로, 자아 인식의 과정을 마주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것은 마치 빗줄기 속에 우산도 없이 서서 몸이 흠뻑 젖는 것과 같다. 투덜거리지 말고 사고의 폭우 속에 빠지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비를 즐겨야 한다. 기도가 좋았는지 아닌지를 생각하지 않았을 때 그 기도는 잘되고 있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은 영적인 인식이 우리의 정상적인 인식이 되도록 하신다.

3). 무의식이 비워지게 되면 생기는 변화들
무의식이 완전히 비워지게 되면 정화의 과정은 끝난 셈이다.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참 자아의 지배 아래 살아가게 된다. 이제 더 이상 외적인 사물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게 된다. 어떤 상황이나, 외적 사물, 감정, 사고에 압도당하는 일이 없어지게 된다. 이것이 더 발전하게 되면 자신의 내부에 대한 심오한 인식이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심오한 수준에 대한 인식에 이르게 된 그리스도가 다른 모든 사람 안에 살아 계시다는 깨달음으로 인해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4). 내적 자유와 하나님 현존 의식
내적 자유는 우리의 집착과 혐오, 고집과 정서적 프로그램을 떠나보낼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하나님 자녀로서의 자유란 어떤 사건에 대해 우리 스스로가 결정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점점 더 자아를 실현하는 동기로 살아가기 시작하며 더 이상 존중받고, 통제하며 안전감을 바라는 습관적인 욕망의 지배에 따라 살아가지 않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관상기도 수련들을 통해 우리를 내적 자유로 인도해 주신다.

하나님 현존 의식은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관상기도 수련을 통해 영적 인식을 경험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일상적인 의식 속에서도 전에는 할 수 없었던 일을 해 나갈 수 있게 된다. 전에는 사랑할 수 없었던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인내할 수 없었던 상황들에서 인내하게 되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비한 자가 될 수 있다.

1. 무의식의 짐을 덜어 냄
키딩은 관상기도에 들어가려 할 때, 의식에 떠오르는 사고를 비유하여 의식의 흐름을 타고 떠내려 오는 배들과 같다고 한다. 의식의 흐름을 타고 떠오르는 첫 번째 종류의 사고는 시시한 공상들이다. 두 번째 종류의 사고는 눈에 뜨이는 보트로서 당신의 주의를 끌어 잡아당겨서 당신이 그 배위에 오르고 싶게 한다. 세 번째 종류의 사고들은 당신이 그것들에 동의함으로써 자신의 깊은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 버린다. 네 번째 종류의 사고는 우리가 깊이 들어가 평화에 둘러싸이고, 모든 사고와 영상이 비워진 때에 찾아온다. 그 다음에 떠오르는 다섯 번째의 사고는 “우리의 의식을 비우고 장애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우리의 정신과 정서와 신체에 은총이 자유롭게 흘러 들어올 수 있도록 각자에게 적합하게 맞추어진 것이다.”고 말한다.

관상 기도의 정규적인 수련을 통하여 내적 정화의 작업이 진행되면 다섯 번째의 사고가 떠오른다. 이 작업은 일종의 신적인 치유와 같은 것인데, 이것은 우리의 의식을 비우고 장애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우리의 정신과 정서와 신체에 은총이 자유롭게 흘러 들어올 수 있도록 각자에게 적합하게 맞추어진 것이다.

향심 기도(집중기도, 마음의 기도)의 목적은 평화를 체험하는 데 있지 않고 무의식 속에 있는 장애를 비워 버림으로써 하나님과 영원한 일치의 상태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관상기도가 목적이 아니라, 관상의 상태가 수련의 목적이며, 어떠한 낭만적이고 위로가 되는 경험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신비스럽게 재구성하여서 오는 하나님 현존의 인식을 항구하게 지속하게 하려는 것이다.

기도 중의 성찰
기도 중에 기도에 대한 어떤 체험이나 성찰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좋다. 기도 후에 그것들을 되돌아 볼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상처의 치유
십자가의 성 요한은 내적 침묵 속에서 성령은 은밀하게 우리의 영혼에 기름 발라(塗油)주시고 가장 깊은 상처를 치유하신다고 가르쳤다. 영혼뿐이 아니고 신체도 치유하신다. 정신 신체적 질병(psychosomatic illness : 정신적 원인에서 생기는 신체적 질병)은 확실히 정서 생활에 평화가 왔을 때에 치유될 수 있다.

신적 일치
신적일치는 항상 일어난다. 무의식이 비워지면서 좀 더 성숙한 인간적 성품의 덕이 쌓아지고 결과적으로 은총이 자유롭게 흘러 들어감으로써 눈에 뜨이는 태도의 변화가 나타난다. 관상 기도에서 체험한 신적 일치는 항상 일어난다. 매일 생활에서 침묵의 순간들이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현실은 더욱 투명하게 보이고 하나님은 침묵의 순간들을 통하여 비추일 것이다.

신적 일치의 유지
하나님과의 일치의 상태를 하루 종일 유지하는 것이 관상 기도의 목적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렇게 잘 지속되지는 않는다. 기도가 발전하면서 후에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더욱 일치에 가까워 가고 있다는 증거들이 나타난다. 그리고는 감각에 영향을 주는 회상(回想)의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과 일치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제 8 장 영의 어둔 밤

제 1 절 감각의 밤

1. 감각의 밤 ( 거짓 자아로부터의 해방 )
영적 여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복합된 행동 동기들과 성격의 어두운 면들, 그리고 어렸을 때 받았던 정서적 충격들에 대해 점점 더 알게 되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가 거짓 자아를 무너뜨리고 우리의 정서 프로그램으로 행동하기를 거부할 때 일어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더욱 가까이에 오시는 것 같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안에 현존하셨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전압을 더 올리시는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하나님이 전압을 올리시면 우리의 내면에 마치 버러지들이 기어 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우리는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들이 우리와 타인과의 관계에 끼치는 손상들을 명백하게 보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스스로 좋게 보아 왔던 자신의 행동들까지도 더러운 행주 조각들처럼 보이는 것이다.

16세기 스페인의 신비가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것을 감각의 밤이라고 불렀다. 이 감각의 밤이 나타났다 표시로, 첫번째 표시는 기도와 일상생활이 무미건조해진다는 것이다. 두 번째 표시는 우리가 거꾸로 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우리 자신이 저지른 어떤 개인적인 잘못이나 실수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는 것이라고 한다. 세 번째 표시는 논리적 묵상을 할 수 없게 되거나 하려는 마음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 "밤"은 우리가 성찰을 통하여 혹은 감각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일반적인 방법이 어두워진 것을 뜻한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일상적인 방법들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바뀐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성령이 주시는 관상적 은총을 통하여 우리를 깨우쳐 주심으로써 우리가 선입견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신다. 그의 빛을 우리 영 안에 주입시켜 주시고, 그분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심으로써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을 알게 해주시는데, 그것은 우리를 낙담시키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분의 무한한 자비에 우리자신을 완전히 맡길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기 위한 것이다

2. 감각의 밤에 오는 영적인 시험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쓴 첫 번째 시험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는 “어떤 이에게는 음욕(淫慾)의 영인 악마의 사자(고후 12:7)가 자신을 드러내보이고”, 두 번째 유혹에 대해 “불경의 영이 와서 영혼의 모든 관념과 생각의 길목에다, 감당할 수 없는 불경심을 놓아 주는 것이다.” 세 번째 시험은 실제로 기대할 수 있는 후기 정화의 과정과 흡사한 것으로서 십자가의 성 요한이 영의 밤이라고 부른 것이다.

왜 하나님은 이렇듯 참기 어려운 시험을 허락하시는 것일까? 이러한 극단적인 유혹들은 마치 어두운 무대를 비추는 스포트라이트처럼 행복을 위한 각 정서 프로그램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이기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음욕의 영은 쾌락과 애정과 존중의 본능적 욕구를 불지르는 욕망의 강도(强度)를 드러낸다. 감각의 밤에, 모든 관능적 만족은 말라 버린다. 이러한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 인간의 본성은 어떤 감정이라도 느낌을 주는 것이면 무엇이든 얻으려고 갈망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쾌락을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찾으려 든다. 성행위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감각적 경험 중에서 가장 많은 쾌락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욕의 유혹은 다른 어떤 유혹보다도 큰 힘을 가질 수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쾌락에 대한 갈망을 과식, 다양한 종류의 음악 감상, 끊임없는 유흥과 정신 산만을 일으키는 행위 등, 지긋지긋하고 건조한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슨 일을 통해서든 이것을 발산하고 싶어 한다.

불경의 영은 조정하려는 욕구에 대한 것이다. 감각의 밤에 우리는 아무것도 조정할 수 없다. 자신을 개선하려는 계획을 포함하여 어떤 계획도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다. 나아가 이것은 강력한 욕구 좌절을 일으켜서 불경할 정도의 분노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을 잡고 조르고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혼란의 영은 우리의 안전의 프로그램에 뿌리 박혀 있는 확실성의 욕구를 비추어 준다. 이 시험에서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영적인 여정은 알지 못하는 곳으로의 부르심이다. 그곳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그곳이 어딘지를 알려고 하지 않겠다고 동의하는 것이다. 확실성에 대한 욕망이나 요구는 신뢰의 대양에서 항해를 시작하는 데에 방해물이 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시험이 하나님께서 즐겨 쓰시는 것들이다. 신성한 빛은 문제의 근원에 조명등을 비추는데, 그 근원이란 행복을 위한 각각의 정서 프로그램의 핵심을 이루는 우리의 본성적 이기심이다. 우리는 우리의 거짓 자아를 우리 마음대로 끝낼 수 없다. 단지 그것이 사라지도록 허용할 뿐이다. 거짓 자아를 무너뜨리기 위한 일들을 우리 스스로 시작하면, 우리의 노력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나서시어 나머지 일들을 마무리해 주신다. 우리는 그저 그것에 동의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거기에서 해야 할 가장 큰 일이다. 우리의 노력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 우리는 마침내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의 은총을 받아들이게 된다.

감각의 밤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의 근원이 이기심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 영역에서 우리가 만족을 원하는 욕망들을 떠나보내고 나면, 우리는 영구한 평화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이때에도 흥분시키는 사고나 정서가 일어나기는 하지만 이것들은 더 이상 정서적인 혼란으로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우리의 정서적 프로그램이 좌절될 때마다 타올랐던 고통스런 정서들을 참아 내기 위해서 쏟아 냈던 큰 에너지들을, 이제는 우리와 함께 살고 있고 또 우리가 봉사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게 된다.

3. 문화적 조건화로부터의 자유(무덤 속의 안토니오)
안토니오의 영적 여정의 체험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 안에서 어떻게 활동하시는가에 대한 고전적인 예이다. 영적 여정을 버리고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라는 첫번째 유혹에 대해 맹렬하게 저항하였을 때 그는 감각의 밤에 들어갔고, 그동안에 하나님은 그가 가진 거짓 자아의 무의식적인 동기를 버리게 하기 위해 활동하셨다. 새로 얻은 자유를 일상생활과 일상적인 관계로 융화하면서 어느 정도의 안정(플라토: 역자 주)을 즐긴 다음에 그는 더 나아가 악마들과 부딪쳤는데, 동시에 이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장애가 되는 문화적 조건화의 영향을 철저하게 떠나 버리는 과정이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것을 영의 어두운 밤이라고 불렀다. 이 전환적 시기에 대해서는 ‘영의 밤’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이때 이루어진 결정적인 시험으로 안토니오는 비로소 변형하는 일치로 들어갔던 것이다.

4. 감각의 밤의 열매
감각의 밤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미숙한 프로그램을 무너뜨리는 것에 관한 것이다. 감각의 밤에 우리는 피상적인 영적 음식으로부터 순수한 믿음이라는 단단한 음식으로 전환하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기도와 성례와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에서 즐기던 감각적인 위안은 마치 간식과 비교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더욱 좋은 음식, 즉 믿음의 마른 빵을 제공받는다.

감각의 밤은 우리가 아동기에서 초기 사춘기로 자라면서, 기본적인 욕구의 불충족에 대해 만족되지 않을 보상을 요구하는 것으로 반응하며 자리 잡은 정서적 불구를 치유해 준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메말라 감을 경험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이전에 행복을 찾았던 모든 일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한다. 정서적인 프로그램이 말라 버리고 부수어지면서 마지막 저항을 하는 것이다.

감각의 밤에 얻어지는 기본적인 열매는 겸손이다. 감각의 밤은 정서 프로그램을 무너뜨리고 거짓 자아를 없애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정화의 과정으로 열리는 열매는 거짓 자아의 강박적이고도 고식적인 방해로부터 해방되어, 무엇인가를 하려는 우리의 결정을 거짓 자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감각의 밤은 거짓 자아를 무너뜨리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 우리의 강박적이고도 습관적인 과잉 반응을 이완시켜 주고, 동시에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에너지를 방출시킨다. 이것은 향심 기도와 같은, 수동적으로 하는 정규적인 관상 기도의 수련에 우리의 여정이 바탕을 두고 있을 때 더욱 그렇다. 감각의 밤은 사고와 감정, 비평과 연상들을 초월해 하나님 안에서 쉬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신체적 기능들과 지각의 수준에서 영적인 기능과 직관의 수준으로 그 인지력이 옮겨 가고, 다시 더 깊은 수준의 신성한 현존의 문을 열어 주는 것이다. 이 상태는 우리에게 더 큰 휴식을 준다. 그리고 이 휴식은 다시, 아동 초기의 방어 기제가 우리의 인식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금까지 막아 왔던 무의식적인 활동들을 이완시켜 준다.

감각의 밤에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원시적인 아이디어들은 도전을 받는다. 감각의 밤은 우리가 갖는 투신의 성격을 명료하게 해준다. 감각의 밤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에 대한 책임을 지고 또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우리 개인적인 응답에 대하여 책임을 지라고 부르신다.

제2절 영의 밤

1. 영의 밤
십자가의 요한이 신성한 일치의 시작이라고 부르는 영의 밤은, 좀 더 깊은 정화를 하는 더 높은 단계의 전환기이다. 성 요한은 기쁨에 찬 신비의 체험 중에도 "경종"이 울린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무의식 안에서 감각의 밤에도 교정되지 않은 거친 곳들, 예를 들면 마음이 습관적으로 산만해진다든지, 문화적 조건화의 잔재라든지, 영적 자부심 같은 것들이 남아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영의 밤은 우리의 무의식에 있는 거짓 자아의 잔재들로부터 해방되어 우리로 하여금 변형하는 일치를 준비하게 한다.

영의 밤은 하나님과의 일치로 나아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거쳐야 하는 필수적인 것이다. 이러한 정화의 과정 없이는 거짓 자아의 결과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던 영적인 원시 상태가 다시 솟아올라 그 상태로 되돌아갈 위험이 있는 것이다.

2. 영적 선물
그들이 영적으로 얻은 것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예언자, 기적을 행하는 자, 깨달은 선생, 순교자, 희생자, 성령 은사의 지도자의 역할, 쉽게 말해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유혹을 받는 것이다. 영의 밤은 이러한 유혹을 사라지게 만드는데, 그 이유는 정화의 활동을 거치면서 자신이 모든 악을 저지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악한 행동을 저지를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개인적인 죄를 피하거나 죄로 이끄는 거짓 자아의 잔재를 피하기 위해 온전히 하나님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3. 봉사
하나님에게 영감을 받아 일하는 사람은 특별한 부르심(소명)을 받고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활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당하신 것처럼 하나님 일을 하는 도중에, 반대와 배척과 실패와 실망과 박해 그리고 아마도 죽음으로 점철될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과 자신의 가르침을 방어하기 위하여 심령적 힘이나 특권을 행사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신이 보내지셨음을 증거 하는 일부로서 지극한 고통과 배척을 받는 체험을 자신에게 허락하시어, 궁극적 실재(하나님)의 본성이 무한한 사랑과 용서임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의 죽음과 부활은 거짓 자아가 행복과 성공이라고 보아 왔던 모든 것에 대해 커다란 의문을 제기하셨다.

4. 영적 밤이 맺는 열매
영적인 밤은 다섯 가지 의미 있는 열매를 맺는다. 영의 밤에 얻는 첫번째 열매는 우리가 영적인 선물과 은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명예스러운 역할을 맡으려는 유혹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영의 밤에 얻는 두 번째 열매는 어떤 정서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영의 밤의 세 번째 열매는 어린 아동기에 가졌던 혹은 우리가 속한 집단에서 숭배하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정화하는 것이다. 영의 밤의 네 번째 열매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신학적 덕"이라고 부르는 믿음, 사랑, 희망이 정화되는 것이다. 영의 밤의 다섯 번째 열매는 우리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이기심을 떠나보내고, 하나님과의 일치 안에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열망을 갖는 것이다.

5. 주의할 것
마지막으로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과 개요에 대하여 우리 전통의 위대한 스승들이 제시한 영적 여정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영적 여정에서 절대적으로 도는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기대하는 것들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이나 의견에 얽매이실 분이 아니다. 때때로 영의 밤은 즉시 시작되기도 하고, 감각의 밤과 뒤바뀌어서 일어나기도 하며, 때로는 동시에 일어나기도 한다. 폭넓은 독서를 통해서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리라고 기대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그와 반대로 일을 꾸미신다. 어떠한 길을 따르든지 간에 우리는 무지의 세계로 자신을 내어 맡기는 신뢰의 도약을 해야만 할 것이다.

제 3 절 변형하는 일치

변형하는 일치의 체험은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일치하고 있다는 보이지 않는 확신 속에서 우리의 일상생활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세계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것은 세상을 떠나지 않으면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방식이며 세상 안에 존재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1. 변형하는 일치의 특징
1). 더 이상 정서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2). 정서의 개입이 없어진다.
3). 의식의 재구성이 일어난다.
4). 하나님의 현존의 발산

2. 변형하는 일치의 열매

1). 거짓자아를 무너뜨려서 익은 열매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늘나라의 임금으로서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시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그분은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그러나 그분은 언제나 피조물에 봉사하심으로써 그 권위를 행사하신다. 그분은 이 지구를 창조하시고 매일매일 공기와 물과 음식을 비롯한 모든 자연 자원을 주시며 절묘한 돌보심으로 키워 주신다. 봉사하시되 대가를 바라지 않으시는 것이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 : 하나님)의 특징이다. 변형하는 일치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그들 또한 지배자가 아니라 봉사자가 된다.

2). 그리스도인의 영적여정의 첫 번째 목표이다.
변형하는 일치는 크리스찬 영적 여정의 첫 번째의 목표다.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정상적인 크리스찬의 삶이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관계(하나님과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우주와의)를 이러한 시각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법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변형하는 일치로 이르는 근본적인 수단은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 사랑이다. 여정의 다음 부분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 10:30)라고 하시고, 곧이어 "그들이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 17:21)라고 기도하신 예수님 말씀의 뜻을 배우는 것이다.



제 9 장 잠심과 분심

제1절 잠심(내적 침묵)

1. 잠심 (침묵)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체험하는 것이 곧 기도입니다. 이 '하나님 현존'을 인식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직 '잠심' 뿐입니다. 잠심하여 가슴속에서 울려오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될 때 우리 가슴속에 하나님의 현존이 새겨지면서 하나님과 진정한 대화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참된 기도 입니다. 예수님이 내 옆에 함께 계심을 의식할 때 우리도 어렵고 힘든 이 세상을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안에서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1).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음
우리가 가슴속에 숨어 계신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하면,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더욱 깊은 수준에서 경청할 때 더 잘 듣고 더 잘 볼 수 있으며, 더욱 깊은 수준에서 침묵할 때 하나님의 현존을 더 깊이 체험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잠심 상태에서 소리 없는 소리를 듣게 될 때, 우리는 생각과 고민에서 벗어나 내부의식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 하나님과 진정한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2). 하나님의 현존 체험을 위한 잠심
생각이 너무 많으면 가슴속에서 들려오는 가냘픈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시끄러움 속에서 고요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듯이, 생각을 멈추어야 가슴속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하나님 소리를 느낄 수 있는 주파수로 맞추어야 합니다. 그 주파수가 바로 잠심상태입니다.

잠심 상태에서는 우리의 뇌파가 낮아집니다. 보통 깨어있는 상태, 즉 물질계에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느끼거나, 시간과 공간 속에서 행동 하고 의식할 때의 뇌파는 14- 2IHz 정도입니다. 반면에 긴장이 풀려 심리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말하는 잠심 상태의 뇌파는 7-l4Hz이며, 기도나 무엇에 집중할 때 측정됩니다. 14Hz가까운 뇌파, 즉 몸이 긴장된 의식 집중상태에서는 영감이나 유연한 동작을 기대할 수 없고, 뇌는 긴장하는 방향으로 집중해 있으므로 조만간 불안하게 되어 많은 경우 잠심상태를 벗어나게 됩니다. 또한 7Hz에 가까운 뇌파는 몸이 이완되어 기분도 안정되나 4Hz에 가까이가면 때로는 멍하게 되고 의식이 저하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뇌가 휴식하는 방향으로 집중되어 곧 수면 상태의 뇌파로 변하여 졸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0.5Hz에 가까운 뇌파에 머물러 있어야 몸도 이완(안정)되고 머리는 밝아 의식이 살아 있는 상태에 있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잠심에 들었다고 할 수 있고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기 전에 마음을 편안히 가라앉히라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잠심 상태에 지속적으로 잘 머물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그 조건을 살펴보겠습니다.

3. 잠심을 위한 외적 조건
잠심 상태에 잘 머물러 있기 위한 외적 조건으로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내와 여유와 갈망입니다.

(1) 인내
하나님과의 일치를 희망하며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것을 이기고 살아가야합니다. 인내는 마치 농부가 씨를 뿌리고 수확을 기다리며 땀 흘려 밭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내하는 사람에게 열매를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역할 혼동'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할 역할은 인내를 가지고 노력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역할은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잠심 상태에 머무는 데 첫째로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2) 여유
잠심 상태에 머물기 위해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이 여유입니다. 여유를 가지지 못하면 기도하면서도 수만가지 일을 떠올리게 되어 머리로 생각하고 정리하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을 멈추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놓아둘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는 가볍게 허공을 나는 깃털처럼 여유 있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때 진정한 침묵의 상태에 머무르게 될 수 있습니다.

(3) 갈망
우리가 잠심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도할 때 여유를 가지고 되도록 천천히 잠심에 임하면서 인내를 가지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만나려는 간절한 갈망입니다.

결국 잠심을 위한 외적인 조건은 인내와 여유와 갈망인데, 우리는 이 세 가지를 체득해야 합니다. 체득하면 내가 하는 행위 자체에서 인내와 여유와 갈망이 자연스럽게 무의식적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체득할 때 잠심은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에, 거기에서 하나님의 현존은 자연스럽게 체험될 수 있습니다.

4). 잠심을 위한 내적 조건
이제 잠심 상태에 잘 머물러 있기 위한 내적 조건을 살펴보겠습니다. 침묵을 시작하면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많은 산만한 생각이나 상상들인데, 그것은 심리적인 것으로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면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내적 사고(思考)와 소음이 일어날 때 그것에 대꾸하거나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받아들이고 나의 감정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해야 합니다. 또한 끊임없는 상상 속에서 기도 시간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인내와 여유와 갈망을 가지고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내적 사고와 소음이 줄어든 내적 침묵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산만한 생각이나 상상들 중에 흥미를 끄는 것들이 생겨납니다. 이것들이 기도 중에는 아주 새롭고 좋은 아이디어 같아서 그것을 좇아서 생각하고 상상하게 되는데, 끝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좋아 보이는 것들도 흘려보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겼을 때 하나님과의 일치도 한층 완전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어떤 기대도 집착도 욕망도 전혀 없습니다. 영적인 위안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영적인 위안으로부터도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것에 집착하는 한, 진정한 영적인 위안이란 없을 것입니다. 집착과 욕망이 사라질 때 하나님의 위안이 당신에게로 밀려옴을 느끼고, 그 때가 바로 하나님과 일치하는 순간입니다. 욕망이나 집착을 버리면 버릴수록 더 완전하게 하나님과 일치하게 됩니다.

2. 잠심의 걸림돌 - 욕심
우리의 잠심 상태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바로 욕심입니다. 욕심은 우리의 내부의식을 분리시켜 우리가 잠심에 있지 못하게 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순수 의식만이 또렷이 있을 때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때입니다. 이러한 마음속에는 탐욕도 분노도 없으며 편견도 고집도 없습니다. 마음이 이러한 상태에 이르면 티끌도 없고 사념도 없는 '참나'를 찾게 됩니다. 결국 사랑 안에서 내 중심적인 모든 세속적인 감각과 욕심과 애착이 정화되면 '참나'를 알게 되고, 그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맛(느낌)에 머물면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일치하게 됩니다.

우리가 욕심으로부터 벗어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욕심 내 안에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일단 욕심을 인정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 그 욕심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그 뿌리를 알게 됩니다. 그 뿌리는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1). 과거 경험
과거 경험이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형성된 자신의 틀이나 관념을 말합니다. 이렇게 형성된 틀 안으로 대상이 들어오기 때문에, 대상은 있는 그대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대상이 있는 그대로 나에게 들어오려면 내 틀을 버려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형성시킨 틀 즉 과거 경험을 찾아내고 그것을 정화, 치유 또는 용서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2). 자신과 환경의 상호 작용
욕심이 생기는 두 번째 뿌리는 자신과 환경의 상호 작용으로, 자신의 신체조건, 능력, 재능, 본능, 문화, 전통, 종교 등과 주어진 환경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말합니다.

사회의 요구와 내가 가진 것이 다르기 때문에 열등감이나 우월감 같은 것이 생겨나 자신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열등감이나 자존심을 건드리게 되면 화를 내고, 우월감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존중해 주지 않는다고 화를 냅니다.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맞는 땅을 찾고 거기에 맞는 식물을 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환경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나(껍데기)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는 나(알맹이)를 구분해야 하고, 그렇게 될 때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아무리 미소하다 할지라도 감사하게 됩니다. 누구에게도 없는, 자기에게만 고유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고유함을 찾을 때 더 이상 환경으로부터 오는 욕심은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됩니다.

3). 경쟁과 비교
세 번째 뿌리는 경쟁과 비교로, 나와 다른 것을 비교하는데서 생겨납니다. 인간은 비교의 대상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와 남을 비교하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비교하고, 행복과 불행을 비교하고, 슬픔과 기쁨을 비교합니다. 이러한 비교로 물질적인 진보나 어느 정도의 영적인 향상을 이를 수도 있지만, 한층 깊이 영적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본디 하나였던 것을 구분하게 되면 그 구분이 영적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때문입니다.

제2절 분심(다양한 사고)

1. 보통 종류의 사고들
관상의 이 초기 단계에서 사고(思考)들 때문에 큰 싸움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의식의 흐름 속으로 들어오는 여러 가지 종류의 사고들과 그 사고들의 형태들을 분간하는 것이 그것들을 잘 다루기 위하여 중요하게 된다.

가장 쉽게 분간되는 것은 보통의 산만한 상상들이다. 상상은 영구적으로 움직이는 심리적 기능이므로 항상 일어난다. 그래서 아무런 사고를 갖지 않으려고 목적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우리가 내적 침묵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상대적 침묵을 말할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내적 침묵을 지나가는 생각들에 집착하지 않는 상태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당신의 산만한 상상 중에 어떤 특정한 사고에 흥미를 갖게 되고 당신의 주의가 그 방향으로 움직임을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이것에 대하여 어떤 감정적 요소를 가지게 될 수도 있다.

2. 영적 주의성이 생겨남
당신이 아무 사고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였다면 그것도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것이며 그것이 곧 사고였다. 그 때에 당신이 아무런 사고가 없다는 그 인식마저도 잊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여 순수한 의식(pure comsciousness) 거기에서는 자신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다. 당신의 일상적인 심리적 기능들이 되돌아왔을 때 거기에는 평화로운 기쁨의 감각을 가질 수 있는데 이것은 당신이 자고 있지 않았다는 좋은 표시이다. 우리가 가는 곳이 아는 자, 알고 있는 자, 알려지는 자 이 모두가 하나인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곳에서는 인식(awareness)만 남는다. 인식하는 자는 사라지고 이와 함께 의식의 대상도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신적일치인 것이다. 거기에는 자신에 대한 성찰이 없다. 이 경험은 일시적이지만 이 경험이 당신을 관상상태로 이끌어 간다. 당신이 하나님과 일치하고 있다고 느끼는 한 당신은 하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룬 것이 아니다. 어떤 사고가 있는 한 그것은 완전한 일치가 아니다. 완전한 일치의 순간에는 아무런 사고가 없다. 당신이 거기에서 빠져 나올 때까지 당신은 그것을 모르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 경험이 너무 희미해서 당신은 잠자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것은 주님과 하나가 되었다고 느끼는 감각과 같은 자아 성찰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영적 수준에서 일치를 이룸은 순수한 의식의 상태인 것이다. 그것은 사랑과 지식의 유입(流入, infusifnl: 하나님에 의한 것 : 역자)이며 그것이 일어나는 동안 거기에는 성찰 같은 것은 없다.

3. 더 섬세한 종류의 사고들
향심 기도에 들어가려고 할 때 처음 의식의 흐름을 타고 떠오르는 첫번째 종류의 사고는 시시한 공상들이다. 두 번째로 당신의 의식을 타고 내려오는 사고는 눈에 뜨이는 보트로서 당신의 주의를 끌어 잡아당겨서 당신이 그 배 위에 오르고 싶게 한다. 세 번째 종류의 사고들은 당신이 그것들에 동의함으로써 자신의 깊은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 버린다. 네 번째 종류의 사고도 우리가 깊이 들어가 평화에 둘러싸이고, 모든 사고와 영상이 비워진 때에 찾아온다.

4. 분심을 다루는 실질적인 방법들
분심을 최소화하고, 우리의 의식을 최대한으로 그분의 현존에 계속 집중시킬 수 있는 특별한 방법 두 가지가있다.

1) 규칙적인 숨쉬기
긴장, 걱정, 흥분과 같은 것들은 모두 우리의 호흡(숨)을 얕게, 짧게 만든다. 반면에, 우리가 일부러 좀 더 규칙적으로 천천히 숨을 쉬면, 긴장감이 사라지고, 긴장감을 좀 더 잘 풀고, 안정감과 평화를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기도를 하는 동안에, 우리는 우리의 맥박이나 심장의 고동의 리듬에 맞추어 천천히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도록 노력해야 한다. 처음에는 이런 숨쉬기를 하기 위해서 주의를 기울여서 조절을 해야 하지만, 점점 습관처럼 되면 일부러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될 것이다.

2) 반복기도
조용하고 규칙적인 숨쉬기를 하는 동안에 적당한 반복기도(또는 화살기도)를 하면 큰 도움이 된다. 기도의 말을 조용히(입술로 하든지, 또는 정신으로 하면 더 좋다) 숨을 들이쉴 때에 하거나 숨을 내쉴 때에 하거나, 들이쉴 때에도 하고 내쉴 때에 해도 된다. 규칙적인 호흡이라는 면에서 볼 때, 숨쉬기의 리듬에 맞추어야 하니까, 이 반복기도에는 운율이나 리듬이 있어야 한다.

3) 몇 가지 실제적인 요점들
어디서 기도할 것인가? (기도의 장소) 기도자가 완전히 혼자서 사사로이 있을 수 있는 장소, 방해를 받지 않을 만한 장소, 너무 시끄럽지 않은 곳.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기도할 때에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시는 당신 아버지께 기도하시오." 라고 말씀하셨고, 당신 자신도 "외딴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얼마 동안 기도할 것인가? (기도 시간의 길이) 계속적으로 완전히 한 시간을 사용하는 대신에 30분씩 두 번 기도하는 것은 권할 만한일이 못 된다. 처음에는, 처음 몇 주간 동안, 또는 처음 몇 달 동안은 한 시간을 지독히 길게 느낄 것이고, 인내심을 가지고 견디기 위해서 무척 고생을 해야 한다. 그러나 점차로, 우리는 기도 시간의 길이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해서 시간을 보내는 일에 익숙해진다.

언제 기도할 것인가(기도의 때) 만약 이른 새벽에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전히 깨어있을 수 있다면, 새벽의 고요함(신선한 공기를 흠뻑 마시고!)은 정말로 큰 보상이 된다. 어떤 이들은 잠자기 전, 저녁의 고요한 시간을 좋아한다. 이 시간에는 긴장을 풀기가 쉽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시간 동안 깨어 지킬 수' 있어서 좋다.

기도하는 동안의 자세
몸의 자세는 아주 중요하다. 몸의 자세가 긴장을 풀고 집중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몸은 긴장을 풀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몸의 자세는 편안해야 하고, 긴장이나 피로의 원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 등을 똑바로 했을 때에, 피로감이 가장 적다고들 말한다. 머리 위에 무거운 것을 올려놓고 균형을 잡는 사람처럼 수직의 자세로 등과 머리를 똑바로 한다.

전통적으로, 무릎을 끊는 것(똑바로)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앉은 자세(또다시 똑바로)가 긴장을 푸는 데에는 더 좋다. 등받이가 없는 얕은 걸상(약 10인치 높이의)이 좋을 수도 있다. 방바닥에 않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면, 등을 똑바로 세우고 않는 것이 더 유효할 것이다.



제 10 장 영성식별 영성지도

제1절 영성 식별

1. 영신 식별하기
영신식별의 관상적인 측면을 연구해 보겠습니다. 이 글의 목적은 식별의 기술을 배우는 데 도움을 드리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우선은 '영신식별' 이라는 단어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의미들을 구분해야 합니다.

1). 영신 식별의 은사
영신식별의 은사는 몇몇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특별한 선물로서, 성령에게서 오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말씀이고 어떤 현시들인지를 알고, 또 성령에게서 오지 않는 것이 무엇이며 악령에게서 오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분해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2). 모든 이를 위한 선물인 영신식별
신약성서는 영신식별이 은사일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주어진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러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영신식별에 있어서 더 강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고 무엇이 그렇지 못한지를 식별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3). 영들을 식별함
영신식별이란 사랑과 신앙의 빛 아래 자기가 한 체험의 성격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사하는 과정입니다.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은 "영신식별을 위한 규범들"(영신수련 313-336)에서 '선신(good spirits)' 과 '악신(bad spirits)' 을 구분합니다. '선신' 이란 성령과 천사들을 의미합니다. 어떤 양상으로든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생각이나 충동들을 이냐시오는 '선신' 이라고 부릅니다. 세속적이고 육적이고 악마적인 것들로서 전통적으로 유혹의 원천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오는 생각이나 충동들을 이냐시오는 '악신'이라고 부릅니다.

영신식별의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에는 주관적 규범과 객관적 규범이 있습니다. 객관적 규범은 나를 넘어서 내 밖에 있습니다. 주관적 규범은 나의 양심과 내적 느낌들, 생각들, 충동들입니다. 객관적으로 주님께서는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과 교의, 내가 따라야만 하는 교회의 합법적 권위를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시며 삶의 지침을 제시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닌 생각이나 충동들이 객관적인 규범들과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면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성서나 교회를 통해선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나의 마음 속에선 다른 것을 말씀하시는, 모순을 범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4). 위안
대부분의 경우 나에게 떠오른 생각이나 하고픈 행동, 혹은 내적 충동의 기원을 판단하는 데 최상의 기준은 이냐시오 성인이 "위안"이라고 부르는 그것입니다. 위안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주님께 대한 사랑이 불타오를 때, 창조주이신 주님 안에서가 아니면 이 지상의 그 어느 것도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게 될 때, 주님께서 당하신 고통과 죽음 및 자신의 죄와 세상의 죄 때문에 슬픔에 잠길 때, 나는 위안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는 주님 안에서 믿음과 희망과 신뢰와 사랑의 덕이 자라고, 영적인 사물로 마음을 끌리게 하며 주님 안에서 내적평화를 누리게 해 주는 모든 내적 즐거움이 커갈 때 위안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어떤 생각이나 계획, 느낌, 혹은 내적 충동이 나를 주님과 더 가까이 이끌어 주고, 주님과 더 순조롭게 관계를 맺도록 해 주고, 그분을 알아보고 일치시켜 준다면 그것은 위안입니다. 그리스도교적인 삶을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과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위안은 내적 체험들을 평가하는 데 매우 유용한 기준입니다.

5). 식별을 위한 몇 가지 규칙
먼저 영적고독의 시간,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고 느끼는 시기에는 위안의 시간에 정했던 목적이나 결정을 바꾸어서는 안됩니다. 혹시 자신이 지닌 선량한 지향을 바꾸도록 유혹을 받는다면, 오히려 그 유혹과 반대로 행동하여야 합니다.

위안의 시기에는 다가올 고독의 어려운 시기를 대비해서 힘을 모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는지를 인식하고 그분의 위안 없이는 얼마나 무력한지를 인식하면서 주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위안은 주님과의 더 깊은 일치와 구원을 위해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6). 가능한 속임수에 대한 문제
악신은 미리 합당한 원인이 없는 위안 안에서 광명의 천사로 위장해 나에게 다가올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악신은 먼저 떠오른 생각을 약간 수정해서 선하게 보이는 대안을 제시하면서 거짓으로 나를 속이고, 어리석게 만들어 자신의 목적을 이루도록 나를 이끌어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식별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특별히 중요한 일에 있어서는 식별을 위한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합니다.

과연 그것이 주님에게서 오고 미리 있을 원인이 없는 위안이 있더라도, 후에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감안해서 그 생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시작에서 뿐 아니라 중간과 끝을 조심스럽게 평가해야 합니다. 식별 자체를 식별할 필요도 있습니다. 식별 할 때, 특별히 식별 자체를 식별할 때는 기도의 동반자나 정기적으로 만나는 목회자, 혹은 영성지도자가 많은 도움이 됩니다.

2. 영신식별의 결정하기
이냐시오 로욜라는 영신식별의 규범들을 의사 결정 과정에 적용합니다. 나는 결정을 내릴 때 악신에게서 오는 생각과 충동에 따라서가 아니라, 선신에게서 오는 생각과 자극에 따라 결정을 내리기 원합니다.

1). 결정을 내리기
예수께서는 내 삶의 주님이십니다. 나는 그분께 나의 결정을 가져가 그분의 주권 앞에 그 결정을 펼쳐 놓습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아주 짧은 관상의 시간에 그분과 함께 그 문제를 검토합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나를 위한 그분의 사랑이 담긴 기도의 분위기 속에서 문제를 검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마치 그분을 관상하고 바라보는 눈으로 주어진 여러 대안들을 바라보고, 내가 선택한 결정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내가 내릴 수 있는 다양한 결정들을 예수님께 들어 올립니다. 그 하나하나에 대해 주님과 나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알아보십시오.

때로는 처음부터 그 결정에 대한 위안을 느낄 수 있기도 합니다. 그 가능한 선택에 관해 주님의 눈을 바라보면, 일관성 있게 옳다는 확신이 듭니다. 혹은 꾸준한 평화와 조화로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혹시는 마음속에서 기쁨과 참다운 즐거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그 특정한 가능성이 선신에게서 오는 것이라는 표시입니다.

2). 결정과정에서의 핵심적 열쇠
핵심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의 현존 앞에서 각각의 가능성들에 대해 얼마나 바르고 편안한가? 하지만 얼마나 확신할 수 있습니까? 아마 완전히 확신하지는 못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내렸어야만 하는 그 특정하고 가능한 결정을 결론으로 며칠 동안 지내며 시험해 보고, 그것이 진실로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 주님께서 확인해 주시도록 기다립니다. 만일 그렇다면, 위안은 계속될 것입니다. 나는 계속해서 얼마 동안 나의 식별을 조사해 봅니다. 그런 다음 그 결정을 실행에 옮깁니다.

3). 식별과 결정의 기반
주님께서는 나의 내적 체험 속에서 무엇이 선신에게서 오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식별하도록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식별에 기반을 두고 당신과 의논하여 특별히 중요한 문제에 관해 결정을 내리도록 부르십니다. 하지만 영신식별을 위해서 나의 삶에서 성취되어야만 하는 하나의 특별한 조건이 있습니다. 나는 기도하는 사람, 한 걸음 더 나아가, 관상적 기도를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영신식별은 아주 강한 관상적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영신식별의 과정에서 근본이 되는 관계는 주님과의 인격적이고 관상적 관계입니다. 내가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정기적으로 관상적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영신식별과 식별에 기반을 둔 결정과정에 꼭 필요한 주님과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생활 중에 습관적으로 관상적 기도를 하고 있다면, 나의 내적 체험들을 효과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 영신식별을 통해 올바른 결정에 다다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영신식별은 삶 전체 속으로 스며들고 그것을 넓혀 줄 것입니다. 내가 습관적으로 내 마음 속에서 활동하는 영들을 식별하고 선신에게서 오는 것 선신이 이끄는 삶을 따르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나를 이끄시는 방법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성령과 함께 걷게" 될 것입니다. 나는 관상적으로 살고, 내 눈은 늘 주님을 향하고, 당신의 성령과 함께 걷게 될 것입니다. 내 삶 전체는 예수님을 위한 선택이 될 것입니다.

4). 성령과 함께 걸어감
내가 성령에 따라 살게 되면, 나는 정말 자유롭습니다. 결정을 내려도 그것은 결코 나의 행동을 규정하고 나를 얽매는 규칙이나 법 때문이 아닙니다. 나는 법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롬 8:3). 법이 나를 강요해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고 행하는 힘을 주셨기에 나는 법이 행하라고 요구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나의 선택은 무엇이 옳다는 지식에 바탕을 둔 '머리에서의 선택' 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에게 하라고 부르시는 그것을 사랑으로 아는 것에 기반을 둔 '마음에서의 선택'입니다.

내가 성령에 의해 새로워지고 "새로 태어났기에"(벧전 1;3,2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엡 2:10) 생긴 새로운 창조물이기에,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신비로운 삶을 누리고 있기에, 나는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을 향해 조율되었습니다. 나의 삶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향해 놓여졌기에, 나는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즉각적으로 알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 성령께서 나를 이끄시는지를 알게 되고, 언제 성령 안에서 선택하고 결정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갈 5:22) 등 성령의 열매인 위안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3. 영적 전쟁
전쟁의 은유를 통해 이냐시오는 주님께 대한 충성심 관대하게 희생을 바침, 자기를 아끼지 않는 봉사, 어둠과 어려운 시기에 지니는 용기와 신실함 등 그리스도교적 삶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여러 가지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은유는 악마의 존재와 흉계를 실제적으로 이해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1). 악신의 존재
예수께서는 성령의 힘이 당신과 함께 머물러 계셨기 때문에 악령을 몰아내셨고, 그분께서 행하신 축사의 기적들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알리는 행적이었습니다. 악신은 세상에서 약간 애매하긴 하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왕자'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힘을 주로 개개인 안에서 행사합니다.

그는 유혹자이고, 농락꾼이며, 악을 권하는 자이고, 악한 일을 꾸미는 자입니다. 그는 속이고 눈을 멀게 하며 타락시킵니다. 그는 거짓말장이의 '아비' 이며 살인자로서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지 못하게 합니다. 신학자들은 개인에게 미치는 악마의 영향에 관해 귀신들림(possession), 압박(oppression), 유혹(temptation) 등으로 구분합니다. 정신질환과 악신의 영향은 분명히 다릅니다. 모든 악마적 영향을 정신질환으로 축소해서도 안 되고, 모든 정신질환을 악마의 일로 취급해서도 안 됩니다. 실제적으로 문제의 기원을 정확히 알기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습니다.

정신질환과 악마적 영향은 서로 엉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물론 목회적으로는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해야 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해 주는 듯한 것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은 심리치료에도, 정신치료에도, 악신을 향해 권위를 행사할 때에도 적용됩니다.

2). 악신을 제어하는 권위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둠의 세력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함께 나눕니다. 우리는 그분의 것이요 그분 지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분의 승리가 가져다준 은총을 나누어 받고 있기에, 악신을 제어하는 권한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권한을 사용하도록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악마와 악신들을 제어하는 이 권한은 그 권한을 주신 바로 그분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3). 악마를 좇아냄
개개인 혹은 어느 단체나 특정한 장소에서 악신의 현존을 느낄 때 또는 악신의 영향이 예측되는 이유가 있으면, 그것이 유혹의 양상이건 압박의 양상이건 간에, 언제라도 예수께서 주신 권한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 간단히 기도하면서 도움을 청하십시오. 그리고는 "악령아.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니 즉시 떠나거라" 하고 명령하십시오. 그 다음에는 나에게 혹은 유혹을 당했거나 압박을 당한 그 사람에게 성령의 넘치는 은총이 새로이 부어지도록 기도하십시오. 예수님 안에서 당신이 이미 그들을 제어해 승리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승리하십니다. 그렇기에 그분 안에서 당신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4. 사랑과 식별
사랑은 그리스도교 정신의 기본적이고도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사랑은 지식보다 중요하며, 가장 높은 지식은 사랑을 통한 관상적 지식입니다.

1). 예수님의 사랑
예수께서는 나를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친절하십니다. 그분은 자랑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교만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무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사욕을 품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성을 내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앙심을 품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않으시고 진리를 보고 기뻐하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모습이고 특성입니다. 더욱이 그분께서는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 속에 사랑이신 당신 성령을 담아 보내 주십니다.

2). 성령
예수님과 성부께서는 나에게 당신의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성령께서 내 마음 속에 머무시면서, 성부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을 향한 성부의 사랑 속에 나를 사로잡으십니다. 하나님의 내적 삶 속으로 나를 데려가시고, 성삼위가 이루시는 사랑의 공동체적 삶 속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나는 성삼위의 신비 속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3). 사랑을 통한 식별
영신식별이란 사랑을 통한 지식에 바탕을 두고 판단하는 것으로서 관상의 맥락에서 내리는 판단입니다. 식별은 관상적 판단이고 관상적 평가입니다. 그러기에 늘 사랑을 통해서 사랑 안에서 진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4). 예수께 귀를 기울임
'예수님을 아는 것'은 단지 그분에 대한 지식을 갖는다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뜻합니다. '예수께 귀를 기울인다' 는 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고 또 우리 안에서 나오는 여러 소음들로부터 예수님의 목소리를 구분하는 것, 즉 식별을 의미합니다.

제2절. 관상기도 자들의 영적 지도

향심기도는 수용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이 방법에 따르면 심리적인 효과들을 지도자가 미리 내다보고 있어야 한다. 어둔 밤이 이 수련 중에 아주 일찍 올 수도 있는데, 이러한 때에는 지도자는 잘 듣는 이가 되고 확신을 많이 줄 수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관상기도의 지도자는 특수한 감수성이 요구된다. 이러한 감수성 중에 하나는 내적, 외적 활동의 평형을 유지하는 데 대한 특수한 민감성이다. 순수한 심층적 기도는 영적 독서, 전례, 아니면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의 기도의 상태를 대상으로 하는 강론이나 강의를 듣는 것 등을 통하여 관념적인 지식을 얻지 않는다면 아마도 침체될 수도 있다. 이 기도에는 지적, 정감적 그리고 직관적 요소들의 균형이 필요하다. 관상기도는 하나님께로 가는데 우리의 기능을 이용하는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그 기능의 이용에 집착하는 것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이것들을 올바르게 이용하면 지혜, 이해, 지식의 은사를 온전히 얻도록 해주며, 이것들은 관상기도가 온전하게 되도록 도와준다.

어려움이 생길 때에, 지도를 받는 사람은 그 수련에 계속 정진하도록 격려되어야 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 헤매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영적 지도자는 어두운 면과 거기에 대해 필요한 것들과 함께, 자신의 성격에 대하여, 그 역동을 잘 인식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요약하면, 영적인 지도는 지도받는 사람의 현재 처지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수련의 초보자들에게는 수련을 정기적으로 할 것, 간단한 생활 수칙, 영적 독서 등과 같이 확고한 가르침이 필요하다. 기도 수련이 정착된 사람들에게는 거룩한 독서나 공부 그리고 매일 기도할 것 등과 같은 가르침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그들의 목표는 관상 중에 동의하는 태도들을 갖도록 격려하고 일상 중에 괴로운 정서가 일어나면 그것들을 즉시 떠나보내게 하는 것들이다. 물론, 어둔 밤이 전개될 때에 용기를 돋워 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영적인 여정에서 많이 앞서간 사람들에게는 우정으로 하는 지원과 이해가 우리가 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다. 우리는 어둔 밤과 수동적 정화의 경험에 대한 자신의 경험 범위 안에서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도정을 지나가 본 사람이 주는 용기와 확신, 그리고 자신의 경험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확실한 타당성은 경험 있는 지도자만이 줄 수 있는 것으로서 아주 커다란 선물이다. 가장 좋은 지도는 피지도자가 종래에 가서 모든 문제에서 성령의 더욱 세련되고 섬세한 지도에 따를 수 있게 성장하도록 도와 주고 힘을 주도록 목표를 두는 사람이다. 지도자는 여정에서 동료 여행자이며 친구가 되고, 지도자와 피지도자는 서로 사랑 안에서 대화를 나눈다. 진실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마음에 거슬릴 수 있다. 그러나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서로를 지탱해 준다.



제 11 장 관상기도의 핵심 요소

제1절 기도 안에서

1). 기도는 분심-잡념과 묵상주제가 계속 반복되는 시간
우리가 무언가에 매달리고 붙잡는 태도야말로 하나님과 일치하는 데 장애가 됩니다. 그것을 모두 버릴 때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나중에는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조차도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데, 이때가 바로 완전한 기도를 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안토니오 성인은 "완전한 기도란 자신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면서 하는 기도입니다"라고 말하셨습니다.

결국 기도시간은 분심과 잡념, 묵상 주제가 계속 반복되는 시간이랄 수 있습니다. 분심이나 잡념이 들면 묵상주제로 되돌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분심과 잡념이 들면 다시 정련제 구실을 하는 묵상주제로 돌아가 분심과 잡념이 흘러가케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2). 기도는 '시야의 독재성'을 버리는 시간
두 번째로 기도시간은 '시야의 독재성'을 버리는 시간입니다. 시야의 독재성이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 주관적인 자세를 말합니다. 우리는 자주 내 안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나 감정을 나와 동일시해 버리거나,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 속에 있는 '거짓된 나' 만 볼 뿐 '참나' 는 보지 못합니다.

결국 '주관적으로 보는 나'에서 '객관적으로 보는 나' 로 전환되어야 새로운 차원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보게 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자기 객관화'의 시각입니다.

3). 기도는 하나님께 내맡기는 시간
끝으로 기도 시간은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도록 내맡기는 것입니다. 이 '내맡김' 안에서 우리 자신의 판단과 사고방식 따위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내적 침묵은 지나가는 생각에 얽매이거나 집착하거나 연연해하지 않는 상태, 즉 이러한 것들이 사라진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제대로 내맡기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정화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의 생각을 흘려보내어 생각을 정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체험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① 생각의 정화
내 생각, 내 고집, 내 고정관념, 내 편견, 내 욕심으로 꽉 차 있으면 아무 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살아오면서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쌓은 많은 지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짧을 통해서 미인과 추녀, 더러움과 깨끗함, 행복과 불행 등을 끊임없이 구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내 자신의 생각에 따라 마음대로 보고 느낀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진실이 아닙니다. 생각은 모든 것을 선과 악, 행복과 불행 , 좋음과 싫음, 기쁨과 슬픔 등으로 갈라놓고 대립과 충돌을 일으켜 우리자신을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흐르게 합니다. 그뿐 아니라 경험과 지식, 성향 등으로 꽉 차 있어 우리 자신의 본성, 즉 '참나'를 찾을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를 제한해 왔던 짧의 장벽 (생각의 장벽)을 부수어 본래의 '참나'를 찾아야 합니다. 대상을 아무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드나들게 하려면 기도를 통해서 생각을 정화해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기도할 때 필요한 것은 '생각(관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체험입니다. 우리가 생각이나 자신에 대한 의식에 매여 있는 한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경우,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지만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지만 우리는 하나님 바깥에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실 수 있으려면 우리의 생각을 비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모든 것을 포기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저절로 오십니다.

② 과거 경험(무의식)의 정화
우리가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면, 기도가 잠심상태로 이어지면서 깊어지게 되면, 보통 때는 무의식에 있어 자각하지 못하던 많은 상(相)들이, 곧 과거의 체험과 감정들이 마음의 표면인 의식으로 올라오게 됩니다. 무의식에 가두어 놓았던 증오, 질투, 두려움, 노여움, 불안, 자기중심적 욕망 좌절, 투사 등이 의식에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영혼을 의식의 깊은 곳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의식의 지평을 확대하며 무의식의 요소를 의식에 통합시키는 작용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무의식의 상이 의식으로 끌어 올려지면 그것을 정화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이 따릅니다. 일단 그 고통을 이겨내어 "감각이 정화되면 그 영혼은 혹독한 감옥 생활에서 벗어난 자와 같이 자유롭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방되어도 "처음에는 평화와 기쁨을 주는가 싶다가 다음순간 두렵고 공포스러울 정도의 무미건조함을 또는 걷잡을 수 없는 내면의 사나운 폭동을 초래하다가 다시 평화를 안겨다" 줍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무의식을 올바로 이해하고 행동 습관의 질을 바꿈으로써 우리는 스스로 올바른 행동 방향을 설정하고, 자신이 원하는 미래의 정신 상태를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을 도와주는 정화 기도는 무의식을 의식으로 떠올려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존재할 수 있는 갈등을 없애고, "우리를 단절하는 무의식의 장벽들을 허물도록 이끌어" 하나님께 나아가게 합니다. 또 과거의 경험들을 정화함으로써 대상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 17:21). 이렇게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사는 일과 죽는 일, 건강과 질병, 기쁨과 괴로움 속에서 아픔을 없앨 수는 없지만 아픔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제2절 관상기도의 핵심요소

관상 기도가 무엇인지를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 우선 무엇이 관상 기도가 아닌지를 밝혀 보도록 하자. 관상 기도는 영적 주의성을 깨우치는 시발점으로 쓰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기술은 아니다. 그것은 행복감을 가져다주는 마술의 담요(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영적인 행복의 시간(하루 일이 끝난 직후인 초저녁에 차 한 잔을 나누며 피로를 푸는 시간 : 편자 주)도 아니며, 환각적 약물이나 자기 최면, 혹은 황홀경을 대신하려는 어떤 것도 아니다.

관상 기도는 성령의 은사로 보아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매우 의미 있고 때로는 아주 강력한 신비적 은총을 받는다. 그러나 목적은 아니다.

때로 관상 기도인 것처럼 잘못 받아들이는 다른 종류의 경험은 일련의 심령 선물이나 유사 심리 현상이다. 유사 심리 현상은 관상의 부산물이기는 하지만 그 핵심 요소는 아니다.

제3절 관상기도를 해야 하는 실질적인 이유들

매일 한 시간씩 하는 관상기도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그 필요성을 제시해 주는 실질적인 이유들을 정리해 보자.

첫째, 우리는 좋은 지향을 가지고도 극복할 수 없는 습관적인 결점들과 약점들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둘째, 관상기도는 긴장감과 신경과민성을 크게 줄여 준다.

셋째, 우리는 잠을 자고 깨어 있기, 일하고 쉬기, 음식을 먹고 소화시키기를 매일 반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넷째, 많은 목회자들과 수도자들이 자신들이 처음 소명을 느꼈을 때와 수련소나 신학교에서는 기도를 많이 했는데, 이제는 매일 수행해야 하는 일상적인 의무와 영신 수련이 지속적인 개인 기도를 밀쳐 버리고 말았다고 느끼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좀 더 철저한 개인 기도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반길 것이며, 이 철저한 개인 기도를 자신들의 소명과 생활의 중심으로 삼으려 할 것이다.

끝으로, 이 관상기도의 필요성과 가치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말하고 행한 다음,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이 관상기도가 우리로 하여금 주님과 아주 개인적인 계약을 맺도록 초대한다는 것이다. 이 계약의 외적 표지는 매일 행하는 한 시간의 기도이다. 이 계약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고, 주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제 12 장 관상 생활

제1절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하다.

한 시간의 관상기도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이 약속을 지켜 주시도록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런 은총을 위해서는 두 가지 면에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1) 마음과 정신의 비폭력
우리는 평화로운 삶을 살기로 굳은 결심을 해야만 한다. 이 결심이야말로 이 관상기도를 위한 조건이기도 하고 이관상기도의 열매이기도 하다. 우리를 움켜잡고 있는 악한성향과 칠죄종(교만, 질투, 분노, 폭식, 육욕, 태만, 탐욕)은 우리의 평화를 깨뜨린다. 그 중에서도 분노의 열기가 우리의 평화를 방해하는 주요 요소인 듯하다.

(2) 하나님을 향한 열망을 키우기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열망을 지속적으로 키우고, 처음부터 그분이 약속해 주신 것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이런 매력과 열망을 키우고 강화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한 가지 방법은 '성서묵상(Lectio Divina)'이다. 또 한 가지 방법은 기도의 은사를 청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제2절 관상과 활동

1. 관상에서 활동으로
신화적 회원 의식의 한계성은 특히 특정한 문화나 이익 집단의 가치에 충성을 다할 때에, 그리고 복음의 가치에 온전히 응답하려고 하는 데에 우리에게 장애가 된다. 우리는 개인적인 문제나 사회적인 문제를 다룰 때 우리 안에 깊이 깔려 있는 미리 포장된 가치관이나 선입견으로 그것을 대한다. 정의를 위한 배고픔과 목마름의 진복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지구의 환경과 우리 시대의 광범위하고 악화되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해 개인적인 책임을 짊어지라고 우리를 촉구한다.

2. 활동 안에서의 관상
내가 완전히 정화될 때를 기다린 다음에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자비의 활동을 하여야 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 하신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마 25:35). 이 말씀에서 보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큰일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이에게 한 잔의 물, 웃음, 그리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을 뜻할 수 있다. 우리가 가는 곳 어디에서든지(바로 이웃집에, 우리 가족 안에, 버스 안에서)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3. 일상생활의 영성
일차적인 영성 수련은 일상생활 중에 자신의 투신에 충실하는 것이다. 고루한 반복, 실패, 어려움, 그리고 유혹들이 끝없이 일어나서 아무 진전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막을 통해서 여행시키신 것은 일상생활에서 하는 우리 영적 여정의 거울이 된다.
이집트의 안토니오는 관상 생활에 네 가지 기본 요소를 구성하였다. 그것은 고독, 침묵, 단순성, 기도와 활동의 훈련이다. 수도원 생활이란 영적건강을 위한 이러한 네 가지 기본 요소의 수련을 지원하는 환경이다.

관상 기도는 이러한 요소들을 캡슬에 넣어 하루에 두 번 복용하도록 한 것이다. 깊은 기도 기간은 이 캡슬과 같이 인간 조건의 정신적 독소를 치유하는 항생제로 작용한다. 관상 기도의 효과를 일상생활 속에 작용하게 하여 기도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얻게 하는 방법들이 있다. 다음은 이렇게 하기 위한 방법들을 제시한 것이다.

① 정서 프로그램을 무너뜨림
만일 흥분하는 어떤 정서가 일상 중에 반복해서 다시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면 그것에 대해 분석하거나 반성하지 말고 그 정서가 무엇인지 알아내라. 그리고 그 정서를 일으킨 사건을 알아보라. 이러한 방법으로 좌절된 정서 프로그램을 추적해 낼 수 있다. 때로는 하나 이상의 프로그램이 관계되기도 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라. "나는 통제하려는 욕망을 포기한다‥‥. 나는 인정과 애정에 대한 욕망을 포기한다‥‥. 나는 안전에 대한 욕망을 포기한다‥‥‥.

물론 이러한 수련이 거짓 자아를 단번에 무너뜨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쉬지 않고 우리의 행복을 위한 기본적인 프로그램을 떠나보내면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것이 일어나고 그것이 우리의 반응, 판단,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게 된다. 그 결과 어떤 정서가 일어나면 즉시 그것을 떠나보내려는 깊은 동기를 갖게 된다.

② 집단 충성을 초월하기
우리가 받았고 그것에 대해 깊은 충성을 느끼거나 특별한 연관이 있는 문화적 조건화에 대하여 과잉 동일시하는 데서 우리가 벗어나는 것이 또 다른 수련이다. 이러한 성향이 기본적으로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내적 자유로 나아가면서, 하나님은 자신의 결정과 행동에 더 많은 책임을 지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가 보듯이, 정신 자아의식의 특징은 자신의 정서생활에 개인적으로 책임지는 것이며, 남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핑계대지 않는 것이며, 어렸을 적에 무조건 받아들인 부모와 또래 그룹의 가치들을 재평가하는 것이다.

③ 능동적 기도 문장
일상생활에서 하는 또 다른 수련은, 우리가 주의 집중을 요하지 않는 활동을 하고 있을 때, 여섯 내지 열두 음절(한국어로는 아홉 내지 열다섯 음절 정도) 정도의 능동적인 문장으로 기도하여 우리의 잠재의식의 기억 속에 이것을 넣는 것이다. 이것은 성서 말씀이거나 우리가 선택한 어떤 기도어 일 수 있다. 동방 크리스찬들이 "예수의 기도"로 하는 특유한 영적 기도의 수련은 이 훈련의 한 표본이다. '순례자의 길'이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예수의 기도"를 매일매일 긴 시간 되풀이하면 그것이 가슴속으로 들어가 혼자서 그 기도가 자연히 되풀이된다고 한다. 사막의 교부들은 시편의 구절들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것들 중에 몇은 매일의 일과에 들어 있다. "오, 하나님! 오시어 도와주소서! 주여, 빨리 오시어 구해 주소서" 혹은 '나의 도움은 주의 이름에 있노라" 등이다. 이 문장을 반복해서 함으로써 우리의 잠재의식의 기억 속에 넣으려면 큰 결단과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꼭 하려고 마음먹으면 시간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샤워한다든지, 접시를 닦는다든지, 차를 운전한다든지, 일하러 걸어간다든지, 버스나 전화를 기다리면서 하루에 두 시간 정도는 별 생각하지 않으면서 보낸다.

④ 자기 수용
때로 우리는 어떤 감정을 떠나보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그대로 감수할 필요가 있다. 죄의식, 외로움, 그 외로움과 함께 아마 지루함도 경험할 것이다. 만일 고통스런 정서를 감수해야 한다면 그 정서가 무엇인지 알아내고 그것들을 느끼고, "그래, 나는 죄의식을 느낀다. 분노를 느낀다. 고통을 느낀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것을 끌어안는다."라고 말하면서 받아들여라. 그러면 우리의 정서를 가라앉힐 수 있다. 우리가 이 고통스런 정서를 끌어안을 때에 우리는 고통 그 자체를 끌어안는 것이 아니라 그 바닥에 계신 사랑의 하나님을 끌어안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은총이 흘러나와 아픔을 줄여 주기 시작한다. 우리의 고통을 끌어안는 것이 그것을 해결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때로 우리는 그것을 나눌 친구가 필요할 것이며 또 어떤 경우에는 약이나 정신 치료가 필요할 것이다. 모든 종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급진적인 치유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서 온다. 그 이유는 거기에 어떤 모습으로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⑤ 내심을 보호하기
관상 기도의 효과를 일상생활로 가져오는 다른 수련은 전통적으로 알려진 "내심의 보호"이다. 이것은 어떤 정서적 혼란이든지 그것이 일어나자마자 그리고 그것에 대해 생각을 시작하기 전에 그것들을 떠나보내는 것이다. 이것은 정서 프로그램을 무너뜨리는 것보다 더 복잡한 방법인데 그것은 전 인생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심의 보호는 지향에 의해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킬 때에 오는 내적 평화의 감각에 그 기초를 둔다. 평화의 기초적인 감각이 혼란을 겪으면, 즉시 어떤 단순하고 적절한 행위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겠다는 지향을 재확인한다. 이렇게 뜻의 일치 속에 머물러 있겠다는 주의(注意)성은 비행기를 유도하는 전파와도 같다. 만일 비행기가 항로에서 이탈하면 신호가 바뀌어서 조종사에게 그 방향을 바꾸도록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말이다.

다음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우리를 항로 안에 머물게 하는 세 가지 방법이다. 첫째는 혼란한 사고들이 떠오르자마자 그것을 하나님의 품에 던지거나 아니면 예수께 선물로 드리는 것이다. 두 번째는 혼란스런 생각이 올라옴을 알아차리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온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즉 지금이 순간에 하고 있는 활동에 주의를 집중하면서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거부한다. 마지막으로, 만일 혼란한 생각들이 떠오를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으면 책을 집어 들거나, 하려고 계획하였던 일로 돌아가, 흥분하게 하는 그 상황에 대해 생각하기를 피하면서 내적 혼란을 일으키거나 혼란을 강화하게 만드는 비평의 시작을 피한다.

⑥ 거룩한 독서
또 다른 수련은 '거룩한 독서' 로서 사색적인 수준과 자발적 기도의 수준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매일 하는 '거룩한 독서'는 하나님 안에 쉬는 관상 수련으로 이끌어 주고 관상기도의 개념을 계속적으로 제공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사실상 교회의 교부들은 관상기도를 전통적으로 거룩한 독서의 마지막 단계로 보았다. 관상은 듣는 가슴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데서 오는 자연적인 결과이다. 다른 형태의 영적 독서도 여정에 대한 지식을 우리에게 주고 또 여정을 지속하려는 동기에 공헌한다.

⑦ 지원 단체에 참여
매주 하는 지원 단체는 어떤 형태의 관상 기도를 수련하여 일종의 전례처럼 침묵을 한데 모아주고, 서로 간에 용기를 북돋아 준다. 이러한 단체는 우리가 어떤 이유로든지 기도를 빼먹는 경우에 기도에 항구하도록 우리의 결단을 새롭게 해준다. 특히 침묵 속에서 기도를 나누면 믿음을 증가시킨다.

제3절 성령쇄신과 관상

성령쇄신의 결과로 생겨난 수많은 기도 모임들에서, 어떤 것은 근본주의적인 방향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근본주의적 영향을 많이 받는 곳이면 어디서나, 바울 사도가 고린도 전서 12장에 열거한 성령의 은사적 선물, 특히 방언의 은사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가톨릭적인 영향을 우세하게 지키는 모임에서는 성령칠은에 대하여 알고 이해하려는 열망이 솟았다. 이것들은 지혜, 통찰, 의견, 용기, 지식, 공경, 경외의 선물들이다. 그와 더불어 전통적인 가톨릭 신학에 기초를 두고 개념적 배경을 제시하려는 신중한 노력도 있었다. 이러한 관심 때문에 이 쇄신과 과거의 그리스도인 영성의 여러 가지 형태, 특히 관상기도와 신비 생활의 관계에 대하여 의문이 제기되었다. 쇄신이라는 맥락 안에서 계속적인 영적 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관상적 전통은 중요하게 할 말을 가지고 있다.

복음의 관상적 차원을 발달시키기 위해서, 성령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성서로 하나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을 더 깊게 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이 말씀이 자신 안에도 내재하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외적인 말씀과 내적인 말씀 사이는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서로 확인해 주고 강화시켜 준다. 내적 말씀은 고요 속에서 사랑의 지시를 받아 말씀하신다. 복음 선포나 성서를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외적으로 표현된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침묵에서 울려 와 나의 가장 깊은 존재 안에 현존하는 그 말씀과 같은 말씀이며, 그 존재 안에서 그분은 성서가 가르키고자 하는 거룩한 신비를 이해하도록 우리를 깨우쳐 주신다. 우리는 사고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현존에 잠기라는 이끄심에 끌릴 때에 사고를 넘어서 가는 것이다.

제4절 삶과 성장과 변형을 위한 지침

다음의 원칙들은 크리스찬의 영적인 여정을 현대적 용어로 다시 표현한 것이다. 이것들은 향심 기도의 수련의 개념적 배경을 제시하려고 한 것이다. 다음 것들은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를 하는 방식처럼 읽어야 한다.

1). 삼위 일체, 은총, 육화의 신비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좋은 본성을 가졌다고 믿는 것은 크리스찬 신앙의 근본 요소이다. 이 선함의 핵심이 무한한 발전의 가능성, 즉 참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신성으로 변형될 수 있다는 가능성의 기초이다.

2). 우리의 선함의 기본적 핵심이 참 자아이다. 그 참자아의 가장 중심이 바로 하나님이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것을 받아들임이 영적 여정의 첫 도약이다.

3). 하나님과 우리의 참 자아는 별개가 아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과 우리의 참 자아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4). 원죄란 말은 인간의 상태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이 상태는 각자가 하나님과 일치한다는 확신을 갖지 못하는 보편적인 체험이며 이체험이 우리의 사색적인 자아의식 안으로 들어온다. 이것은 우리에게 불완전, 분열, 고립, 죄악감 등을 일으킨다.

5). 원죄는 우리 각자가 잘못한 결과로 생긴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 심지어 참 자아로부터 떨어졌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러한 격리감이 문화 속에 팽배하여 우리가 어렸을 적에 우리 안에 심어졌으며 다음 세대에 계속 이것이 넘겨질 것이다. 원죄의 상태에서 생긴 깊은 불안감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긴급한 욕구가 일어나고 이 욕구를 잘 조절하지 못하면, 끊임없이 쾌락과 소유와 권력을 찾는 욕망이 일어나게 된다. 사회적 수준에서는 이것이 폭력과 전쟁과 구조적인 불의로 나타나게 된다.

6). 원죄의 특별한 결과는, 잉태한 때로부터 인격 속에 끼여 드는 여러 가지 습관, 어릴 적부터 자라면서 환경으로부터 받아 온 정서적 손상,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어린 나이에 알게 모르게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들, 그리고 지금은 무의식으로 들어갔지만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의 고통을 막기 위하여 발달시킨 방법들을 들 수 있다.

7). 이와 같은 이성적 판단이 결핍된 반응들이 합쳐져서 거짓 자아의 기초를 이룬다. 이것은 참 자아와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며, 거짓자아의 중심이 바로 거짓 자아 그 자체이다.

8). 은총은 우리 삶의 순간순간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현존과 활동이다. 성사란 예식적 행위로서 그 예식 안에 그리스도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현존하시어 크리스찬적 삶을 살고자 하는 우리의 위탁을 확인하시고 지탱해 주시는 것이다.

9). 세례로써 우리의 거짓 자아는 예식상 죽고, 새로운 자아가 태어난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신 죄에 대한 승리가 우리의 임의에 맡겨진다. 우리의 각 개인의 독특성은 그대로 남아 있는 채,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는 우리의 감각이 죽음을 이기고 삶을 주는 세례의 물로 무너지게 된다.

10). 성체는 삶을 축하하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물질적 요소들이 함께 모여 와서 인간의 의식 속에서 떠오르고 인간의 의식을 신적인 의식으로 변형하는 것이다. 이것은 크리스찬 공동체 안에 그리고 그 공동체를 통하여 신적인 것이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성체가 되기 위하여 성체를 받아 모신다.

11). 그리스도께서는 성사 안에 현존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곤경과 중요한 사건들 속에 특별한 방법으로 나타나신다.

12). 개인적 죄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는 것(은총)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의 진정한 욕구를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것은 거짓 자아를 강화시킨다.

13). 우리의 선함의 가장 중심 부분은 아주 역동적이며 스스로 성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 성장은 거짓 자아의 착각과 정서적 고착 때문에 방해를 받는데, 이것들은 문화적 조건화와 개인적 죄로부터 부정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이다.

14). 성서를 읽고 전례 중에 말씀을 들으며, 기도 중에 하나님을 기다리면서, 그분이 주시는 영감에 우리가 응답하면, 어떤 상황에서 이 두 자아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아는 데 도움이 된다.

15). 하나님은 피조물이 즉시 완전해지고 우리가 그분의 사랑으로 값어치 있는 존재가 되라고 요구하시면서 멀리 계시어 우리가 도저히 그분께 가까이 갈 수 없는 그러한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공포로 복종을 시키는 폭군도 아니고. 감시하는 경찰도 아니고 쉽게 유죄판결을 내리는 무서운 재판관도 아니시다. 우리는 그분이 상과 벌을 주시는 분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거룩하신 사랑의 활동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16). 하나님의 사랑은 동정적이고, 부드러우며, 빛을 비추고, 완전히 내어 주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모든 것을 일치시키는 사랑이다.

17).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면, 우리의 거짓 자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떠나보낼 수 있게 하며, 그리하여 참 자아로 가는 여정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우리 안에 있는 참 자아로 가는 여정이 하나님 사랑으로 가는 길이다.

18). 이 체험에서부터 깊은 영적 평화와 기쁨이 넘쳐흐르면서 참 자아에 대한 자각이 성장하는데, 이것은 거짓 자아가 무너지고 죽어가는 데 따르는 정신적 고통을 이겨 낼 수 있게 한다. 거짓 자아를 움직이던 힘이 사라지면서, 우리의 참 자아는 하나님의 사랑의 힘의 작용과 더불어 새로운 자아를 세워 나간다.

19). 새로운 자아의 건설에는 수많은 실수가 있고 때로는 죄로 점철된다. 이러한 상황이 아무리 심각하다 하더라도, 무한히 좋은 참 자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빌고 우리에게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한 마음가짐으로 새로워진 신뢰감과 힘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20). 끈질기게 없어지지 않으며 무기력하게 만드는 죄악감은 거짓 자아에서 온다. 참 자아는 개인적인 죄나 사회적 불의 때문에 용기를 잃게 하지는 않으며 그 대신 삶을 바꾸도록 이끈다. 이것이 바로회개로의 부르심이다.

21). 영적 여정이 진전하면 다른 사람들을, 특히 함께 사는 사람들을 무조건 받아들임이 나타난다.

22). 믿음의 공동체는 영적 여정 중에 표양과 시정과 상호 관심이라는 지원을 준다. 무엇보다도, 성찬이라는 전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비에 동참하면서 침묵의 기도를 함께 하면, 변형과 하나님과의 일치를 공동으로 추구하는 일에 그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 준다. 그 공동체 안에 그리스도의 현존이 각자에게 나타나 눈에 뜨이게 되는데, 특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공동으로 봉사하거나 기도회와 전례를 위하여 모여서 함께 할 때 특히 더욱 나타난다.

23). 인간이 생존, 안전, 애정, 존경, 지배, 권력 등과 같은 본능적인 욕구를 절제함으로써 진정한 인간적 욕구가 초점 안으로 들어온다. 이러한 욕구들 중 원천적인 욕구가 다른 사람들과 친밀을 이루려는 욕구이다. 친밀이란 사고와 감정과 문제와 영적인 영감과 같은 것들을 서로 나눔으로써 점차로 영적인 친구로 발전해 가는 것을 말한다.

24). 영적 친구 관계에서 진정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결혼 관계에서나 독신 생활에서도 행복으로 이끄는 기본적 요소이다. 몇 사람과 친밀 관계를 유지하는 경험을 쌓으면 하나님과 또는 어떤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 가는 능력을 확대시켜 주고 깊게 해준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성적 에너지는 보편적인 동정으로 변형시켜 준다.

25). 내적인 여정과 상호간에 위탁하는 정도에 따라서 그 공동체의 영적인 빛이 드러난다. 한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서로 간에 자리를 마련하고 내어 주는 것이 이 위탁의 절대 필요한 부분이다.

26). 관상 기도는 전통적 의미로 볼 때에 변형의 과정이 완성되도록 시작시키고 완성시키게 하는 역사(役事)라고 할 수 있다.

27). 성서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우리의 과거 삶 안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묵상이 관상 기도의 기초다. 기도 중에 사고와 감정을 자발적으로 떠나보내게 되면 이것이 관상 기도에서 진전하고 있다는 표시이다. 관상기도는 얼마나 사고와 감정이 기도 중에 일어나지 않았느냐 하는 데 있지 않고 것들로부터 이탈할 수 있느냐에 있다.

28). 육체와 정신과 영의 좋은 것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올바르게 이용하는 것이 참된 영적 수련의 목표다. 어떤 인간적인 성질이나, 과거 삶의 어떤 부분들은 결코 거부되어서는 안 되며 이것들을 각 단계에서 펼쳐지는 자아의식 속으로 융화시켜야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각 발달 단계에서 좋았던 것은 간직하고 부족했던 것만 뒤에 남겨 둘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과 같아지는 길은 온전한 인간이 되는 길도 된다.

29). 영적 여정의 초기에 영적인 수련은 삶의 관상적 차원의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봉헌하고 헌신하는 삶) 기초를 쌓는 데 아주 기본적이다. 매일 하는 수련에는 관상 기도 시간과 거짓 자아를 떠나 보내는 프로그램을 포함해야 한다.

30). 정기적으로 고독 속에 침묵으로 들어가면 정신이 평정되고, 내적 침묵이 형성되며, 자아 지식의 역사(役事)가 시작된다.

31). 고독이란 어떤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완전히 맡겨 드리는 태도를 말한다. 하나님께 온전히 속하게 되면, 자신의 삶과 은총을 점점 더 다른 사람들과 나누게 된다.

32). 영적 가난의 지복(至福)은 참 자아를 더욱더 인식하는 데서 생겨난다. 그것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태도이며 동시에 모든 것과 일치한다는 느낌이다. 많이 갖든 적게 갖든 내적 자유를 누리고 자신의 삶을 단순화시키는 것이 영적 가난을 가지고 있다는 표시이다.

33). 순결과 독신 생활은 다르다. 독신 생활은 우리의 성욕을 성기로 표현하는 것에서 금욕하겠다는 위탁이다. 순결이란 성적 에너지와 여기서 오는 남성 혹은 여성적 자질을 받아들이면서 이 에너지를 영성 생활에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적 에너지의 사용을 절제하고 조절하는 수련이라고 할 수 있다.

34). 순결은 사랑하는 힘을 증진하고 확대한다. 이것은 모든 것의 고결함을 감지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다른 사람들의 품의를 존중하며, 그 사람을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려는 데 이용하지 않게 된다.

35). 순명이란 하나님을 그대로 무조건 받아들이고 또 그분이 우리 삶 안에 나타내신 것을 그대로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분명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온순한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의 뜻이 나타내시는 것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우리의 분별력이, 우리 내면으로 이끌어 주시는 은총의 빛을 받아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증거를 가려내게 하고 또 결정하게 한다.

36). 겸손이란 하나님과 자신과 또 모든 현실에 대하여 갖는 솔직한 태도이다. 그것은 우리가 무력함 속에서 평화를 느끼고 우리의 소홀함 속에 쉴 수 있게 해준다.

37). 희망은 하나님의 자비와 도움을 계속 경험하여서 솟는다. 인내는 희망을 행동에 옮긴 것이다. 인내는 포기하거나, 좌절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린다.

38). 우리의 거짓 자아를 해체하고 죽이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분의 거룩하신 사랑의 힘으로 해주시는 변형으로 우리의 새로운 자아를 세우는 것이 그분의 부활하신 생명에 동참하는 것이다.

39). 처음 시작할 때에는 정서적 장애들이 우리의 자유를 묶어 두기 때문에 우리의 새로운 자아가 자라는 것에 방해가 된다. 그 뒤에는, 자기 조절에서 우러나는 미묘한 만족감으로 해서 오는 영적 자만심이 큰 방해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아 성찰이 하나님과의 순수한 일치를 막기 때문에 방해가 된다.

40). 인간적 노력은 불러 주시는 은총에 힘입은 것이다. 하나님과의 일치에 다다른 정도는 우리의 노력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 사랑의 순전한 선물이다.

41). 예수께서는 상상과, 기억과, 정서를 다스리는 어떠한 묵상이나 신체 단련 방법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체질이나 자연적인 성향에 따라서 알맞은 영적인 수련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성령께서 그분의 직접적인 인도에 우리 자신을 맡기도록 요구하실 때에 이 방법(묵상이나 신체 단련 방법)들을 버릴 용의가 있어야 한다. 성령은 어떠한 방법과 수련도 능가하신다. 그분이 주시는 영감에 따르는 것이 완전한 자유로 이르는 완전한 길이다.

42). 예수께서는 당신의 표본으로 제자들에게 길을 보여 주셨다. 즉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다른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주어라 하신 것이다. "너희는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듯이 서로 사랑하여라."



제 13장 거룩한 독서

제 1절 거룩한 독서의 과정

거룩한 독서는 수도원의 환경에서 발전된 관상기도의 방법이다. 그리스도교 공통체는 근본적으로 성서적 환경이다. 성서적 환경에 몰입하는 장소이며, 하루 동안 시간에 따라 다른 성무일도를 읽고 고독과 침묵을 지키며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다.

이러한 것에는 자의적, 도덕적, 유의적, 일치적 의미들이다. 그러나 거룩한 독서의 목적은 이것이 아니다. 수도승들은 거룩한 독서를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적 통찰을 얻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들은 논리적 묵상에서부터 정감적 기도 혹은 의지의 열망으로 넘어가서는 그 열망을 계속해서 수없이 반복하고, 마침내는 하나님 안에 쉬는 체험을 했다.

성서도 마치 읽어 치워야 할 하나의 책을 읽듯이 하는 경향이 있다. 거룩한 독서는 이와는 정반대이다. 내용을 음미해가면서 여유 있게 하나님의 계시에 잠기는 것이다.

이 독서 과정의 아주 기막힌 점은 기도 기간 중에 예수님과 한수준의 관계에서 다음수준의 단계로 옮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실천에 옳기고 복음을 살기 시작하면 우리는 도덕적 의미에 도달한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문헌 연구가 매우 가치 있기는 하지만, 말씀의 문헌적인 의미에 대하여 읽고 사색하는 것보다는 그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더욱 온전하게 그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성서의 네 번째 수준은 일치적 수준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아주 깊이 잠길 때에 나타나며, 이때에는 계시가 계속되는 것처럼 당신에게서부터 그 말씀이 나온다.

정화는 우리 인격의 어둔 면을 직면할 때에 일어나는 이것은 성서의 내용과 자신을 생생하게 동일시하는 결과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정직함이 발달되기 때문이다.

금욕주의는 금욕 수련에만 열중할 때에 자신의 정서적 프로그램을 오히려 키워 주고 그 병적인 요소를 더해 갈 뿐이다. 진정한 금욕 수련은 우리의 무의식에서 오는 동기에 대하여 어떤 처리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관상기도의 과정은 우리의 무의식에 있는 것들을 풀어주는 하나의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일치적 의미는 평화와 신적인 일치의 상징인 약속의 땅에 사실상 도착했을 때에 갖는 체험이다. ‘쉼’이라는 말에서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고전적인 의미를 갖는다. 완전한 사랑의 안식인데 이 사랑 안에서는 가장 활발한 활동중에서도 안식을 가질 수 있다.

거룩한 독서의 방법에 따르면 우리는 그저 성서를 계속해서 읽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계속해서 경청을 하다 보면 신뢰가 자라고 어떤 인간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랑이 자라난다. 성서를 쓰게 만드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그 성서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인지를 우리에게 깨우쳐 준다. 그말씀은 결국 우리의 가장 깊은 존재에 도달하게 된다. 말씀은 가장 외적인 것에서 시작하지만 가장 내적인 방향으로 작용하여 우리 안에 머물러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가 성서의 일치적인 의미를 이해하게 될 때에 외적으로 경청한 말씀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경험하고 있는 내적인 것을 확인시켜준다.

거룩한 독서가 관상으로 옮겨 가서 하나님 안에 쉬는 경험으 하면, 무의식의 내용이 의식으로 올라오면서 치유가 된다. 이렇게 되면 다시 우리 존재의 더욱 깊은 수준에서 복음을 경청하고 응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제2절 거룩한 독서의 단계

1. 읽기 :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음

거룩한 독서의 첫째 단계는 독서 혹은 읽기이다. 말씀들을 인격화하고 현실화하여, 마치 하나님께서 ‘지금’,‘나에게’ 말씀하고 계신다고 여기게 하는 것이다.

2. 묵상 : 말씀을 묵상함
거룩한 독서를 “서로간의 관계를 심화시키는 것”으로 기술하였다.
우리가 함께 나누는 인간의 삶을 가능한 한 가장 깊이까지 살고 체험하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살과 피로 나에게 드러나 계신다. 예수님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이다’.

상상력이 잘 발달되고 활성화된 사람들일 경우, 상상을 이용하면 그들의 묵상을 생생하게 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받을 것이다.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서는 이러한 접근법을 “관상”이라 부른다.

돔 체프만은 이것을 간결하게 요약했다. “네가 할 수 있는 대로 기도하라. 할 수 없는 것은 하지 말라.” 참되고 진실할 때, 가장 단순한말은 날조되고 빌려온 최고로 과장된 웅변술보다 확실히 더 웅변적이다.

3. 기도 : 말씀이 마음을 건드림

지적인 추리와 사고가 점점 줄어들고, 마음은 단순하게 솟아나는 사랑과 열망으로 가득 차며, 이것은 친밀한 내적 대화 형태를 취할 수 있다. 비록 우리가 활동하지 않는 것 같아도 은총은 제 갈 길을 가고, 우리의 탁월한 지식이 없어도 성령의 일은 진행된다.

4. 관상 : 침묵으로 들어감,
“말씀에 깊이 잠김”
관상은 이상한 신천지로, 그곳에서는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모든 것들이 뒤집혀 있는 것같이 보인다. - 그곳에서는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존재방식을 배우고, 우리의 사고와 개념, 상상, 감각과 느낌을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믿음을 위하여 버리게 되며, 하나님의 부재가 그분의 현존‘이고’ 그분의 침묵이 그분의 언어 ‘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기술하기를 관상은 “하나님께서 은밀하고 평화롭고 사랑스럽게 흘러들어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만약 방해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혼을 사랑의 영으로 태울 것이다.”

왜냐하면 관상은 열정을 위한 능력, 그리고 삶에 대한 불타는 사랑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내적인 삶은 최소한의 내적 침묵을 요구한다. 그래서 관상은 궁극적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가는 움직임이다. 한 랍비의 이야기가 이 사실에 함축되어 있는 것들을 뛰어난 감수성으로 잘 보여준다.

제3절 거룩한 영적 독서

1. 영적 독서에 대한 이해
독서는 정신을 이끌어 성경을 주의 깊게 보게 해준다. 묵상은 이성의 지도아래 감추인 진리의 지식을 깊이 생각하는 정신의 주의 깊은 활동이다. 수득적 관상일 경우에는 우리가 주도하여 쉼을 얻는다. 주부적 관상의 경우에는 성령의 은사가 보다 깊은 쉼을 가져다준다. 묵상이 없는 독서는 무미건조하다. 독서가 없는 묵상은 잘못된 것이다. 묵상이 없는 기도는 열의가 없다. 기도가 없는 묵상은 결실이 없다. 이처럼 스콜라적인 영적 독서의 단계는, 독서, 묵상, 반응, 그리고 휴식이다.

2. 일상생활에서의 기도
3. 영적독서 전통으로의 복귀
4. 집중기도의 역할
5. 다른 기도와 함께 하는 영적 독서의 역할
6. 실질적인 제안
7. 공동 기도를 위한 스콜라적인 영적 독서 방법
1). 독서
2). 묵상
3). 기도
4). 관상
8. 공동기도를 위한 수도원적 영적독서방법
9. 개인적인 영적 독서

제 4절 수도원 전통에 따른 거룩한 독서

1. 개인독서
1).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한다.
2).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한다.
3). 성령께 도움을 청한다.
4). 성서 말씀을 작은 소리로 천천히 읽고 듣는다.
5). 성서 말씀 중에 마음에 닿는 구절이 있으면, 거기에 잠시 머무른다.
6). 같은 방법으로 성서를 읽어 내려간다.
7).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기도로 끝마친다.

2. 공동독서
3. 반추기도



제 14 장 향심(마음의)기도

1. 향심기도의 발상

향심기도는 14세기 무명의 작가가 쓴 「무지의 구름」과 십자가의 성 요한 등과 같은 사람들의 그리스도인 전통에서 나온 하나의 기도 방법이다. 향심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현존으로 들어가게 하여 듣고 받아들이는(受容的) 관상적 태도를 길러 준다. 향심기도는 관상기도의 전통적 가르침을 다시 찾은 것으로, 너무나 바쁜 마음과 삶 때문에 오는 장벽을 줄여 줌으로써 관상을 준비하도록 해주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고안된 방법이다.

시작은 1970년 초 토마스 키딩 신부의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전통을 어떤 형태로 만들어 활동적인 사목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게 할 수는 없을까? 또 동양적 수련이나 명상 기술을 지도받은 젊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전통에도 그와 유사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신들의 그리스도교 전통으로 되돌아올 수 있게 하는 방법을 만들 수는 없을까?" 그 후 "중심으로 돌아가자!"는 토마스 머튼의 표현을 따라 '향심기도(Centering Prayer)'로 부르게 되었다.

2. 향심 기도의 첫 단계들

"향심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직관력을 세련시켜 관상 기도로 쉽게 들어가게 하는 방법이다. 향심 기도에서 가장 근본적인 마음가짐은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드리는 것이다. 크리스찬의 수련은 인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만일 참고 기다린다면 하나님은 결국 자신을 드러내 보이실 것이다. 물론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향심 기도란 주의(注意, attention)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지향(志向, intention)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구별을 하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떤 사고 내용에 대해 주의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계시리라고 믿는 당신 자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갈 지향을 갖는다.

3. 향심기도에서 의지와 지향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영원으로부터 한 말씀을 하시며 이 말씀을 침묵 속에서 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이 침묵 속에서 그 말씀을 듣는다."라고 했다. 이러한 말을 빌리면 침묵이 하나님의 첫 번째 언어이고, 나머지는 모두 유치한 번역이라고 볼 수 있다. 향심기도나 다른 전통적인 수련의 방법들은 우리의 감지기관을 아주 순수하게 만들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과 우리의 가장 깊은 존재에게 아주 단순하게 하시는 말씀을 더욱 잘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방법들이다. 그러므로 향심기도는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에 관상기도 자체가 아니고 관상을 준비하는 기도이다. 그렇지만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그것은 관상기도라는 사다리에서 첫 단이라고 부를 수 있다.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향심기도가 어느 때에 엄격한 의미의 관상이 되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수련을 통하여 우리가 그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성령께서 우리를 향하여 움직여 오신다는 것을 알뿐이다(그림 1 참조).

우리의 수련이 더욱 습관화되어 감에 따라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이해의 은사가 더욱 강해지고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떠맡아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 습관적으로 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꼭 기도 중에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고 일상생활 중에 그 효과를 경험하게 된다. 향심기도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면 우리의 내적 침묵의 능력이 향상되고 일상생활 중에 성령의 섬세한 움직임에 대하여 민감해지면서 우리를 정화와 거룩함으로 인도한다.


이 수련 중에 우리의 활동이 한 몫을 하기는 하지만 아주 부드러운 활동이다. 우리의 활동이 아주 최소한으로 될 때에 우리의 공헌(기도에 대한)이 시작되고, 우리의 활동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에 공헌이 끝난다. 향심기도의 기본적인 수련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에 동의한다는 지향을 나타내는 단어 -예를 들면, "아빠", "예수님", "평화" 혹은 이와 유사한 다른 단어들- 를 선택하는 것과 우리의 지향이 점점 흐려져 갈 때에 그 단어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우리의 지향을 온전히 명료하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도구와 같이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4. 상징으로서의 거룩한 단어

거룩한 단어는 당신이 어떠한 것을 선택하였든지 관계없이 거룩하다. 그 이유는 그 단어의 뜻이 거룩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지향이 거룩한 때문이다. 거룩한 단어는 절대 신비이며 당신 안에 머물고 계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 드린다는 당신의 지향을 나타낸다. 그것은 당신의 의식 속에 지나가는 어떤 사고에 당신이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되돌아가야 하는 초점이 된다.

거룩한 단어는 당신이 당신의 원천(source)으로 파고들 수 있게 만든다. 거룩한 단어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강의 표면에서 강 밑으로 우리의 의식을 옮겨 주는 방법이나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려는 하나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거룩한 단어는 여러 가지 사고들을 줄여서 하나님께 열어 드린다는 하나의 생각으로 집약시키는 방법이다. 그렇지만 조심스럽게 구별해야 할 것이 있다. 향심기도에서 기도의 목적은 우리의 모든 사고를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아의 존재의 근저와의 접촉을 더욱 깊게 하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갖는 지향이 이 기도의 근본이다.

5. 동의한다는 몸짓으로서의 거룩한 단어

거룩한 단어는 우리의 가장 내적 존재 속에 하나님께서 현존하시는 것을 우리의 영인 의지가 동의한다는 표식이다. 그 단어는 상상 속에 나타나지만 일상적 의식의 흐름의 수준에 직접적이고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지향만을 나타내는 것이고, 이 지향은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현존에 나를 열어 드리고 맡기기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지향을 나타내는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할 때에, 우리의 의지의 움직임이 상상 속에 아주 섬세하게 나타난다.

거룩한 단어의 일차적인 기능은 사고들을 밀어 내려고 하거나 서서히 사라지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현존에 머물고, 기도시간 동안에 성령의 활동에 우리를 맡겨 드린다는 지향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향심기도의 가장 큰 효과는 자신의 중심으로부터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외부 세상과 상호관련을 맺지 않는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이전보다 더 잘 상호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나 환경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지 않으면서 현실(reality)이 보여 주는 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향심기도는 단지 하나의 기도 방법이 아니라, 우리의 전 존재가 복음과 그 가치에 응답하도록 만들어 주는 과정을 시작하는 기도이다.

6. 향심 기도의 요약

1). 신학적 배경
오순절의 은총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로서 우리 안에 계심을 확인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각자 안에 각성을 주시는 분으로서 언제 어디서나 계시다. 그분은 살아 계신 주님으로서 언제나 우리 안에 사시도록 성령을 보내 주시며, 기도와 활동 중에 성령의 열매와 참된 행복(마 5장)을 경험하고 또 나타내도록 힘을 주심으로써 당신의 부활을 증거 하게 하셨다.

2). 거룩한 독서
거룩한 독서는 그리스도와의 우정을 키우는 가장 전통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대화 중에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대화의 주제를 알려 주시듯 성서에 귀를 기울이는 방법이다. 매일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말씀을 사색하면, 그저 안다고 하는 관계를 넘어 우정과 신뢰와 사랑의 태도로 발전시켜 준다. 대화는 단순해지고, 6세기의 대 그레고리오 성인이 크리스찬 관상 기도의 전통을 요약하면서 말한 "하나님 안에서 쉼"이라는 통공(혹은 합일, communion)의 상태로 이른다. 이것이 16세기까지 관상 기도에 관한 고전적인 의미였다.

3). 관상 기도
관상 기도는 성세의 은총과 정기적인 거룩한 독서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전한 것이다. 우리는 기도가 사고와 감정이 언어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가지의 표현일 뿐이다. 관상기도는 사고와 단어와 정서를 넘어서서 절대 신비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가슴과 마음을 열어 드리는 것이다. 호흡보다 더 가까이 계시고, 사고보다 더 가까이 계시며, 선택보다 더 가까이 계시고, 우리의 의식 그 자체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우리 안에 계심을 믿음으로 알고 있는 그 하나님께 우리의 인식을 열어 드리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우리가 동의하기만 하면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어 줄 수 있게 우리를 내적으로 정화시켜 주는 과정이다.

4). 향심 기도의 방법
향심 기도는 거룩한 독서로 시작된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깊게 해 주도록 만들어진 것이며, 관상 기도의 은총에 우리의 기능들을 준비시켜 줌으로써 관상 기도를 촉진시키게 하는 방법이다. 향심 기도의 방법은 관상으로 가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을 줄이는 방법이며 인간의 기능들을 이 은총에 협조하도록 준비시키는 방법이다. 향심 기도의 방법은 우리의 일상적 사고의 흐름을 꺼 버리려고 만들어진 것이다.

5). 향심기도의 실행
향심기도를 체계적으로 하기 위하여,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을 수 있는 편안한 자세를 취하라. 그리고 눈을 감아라. 사고들의 흐름을 늦추게 하기 위하여, 하나의 생각만을 하여라.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당신이 편하게 느끼는 한 음절 혹은 두 음절의 단어를 선택하라. 어떤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때에도 거룩한 단어를 사용할 때와 마찬가지의 절차를 따른다. 당신이 어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면, 당신의 지향을 나타내기 위해 그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6). 향심기도 중의 사고들
우리가 정신을 가라앉히려고 할 때 의식의 흐름 속에 여러 가지 종류의 사고들이 떠오른다. 사고의 종류에 따라 적절한 반응이 따르게 된다.

1). 상상으로 하는 공상.
가장 합당한 반응은 그 소음을 받아들이고 가급적 거기에 주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 상황에서 주의가 분산되지 않고 대화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2). 정서적으로 흥미를 끌며 떠오르는 사고들.
이러한 흥미를 끄는 사고들에 빠졌을 때에 자신에게 짜증 내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짜증도 또 다른 하나의 사고이기 때문에 당신을 내적 침묵으로부터 멀리 가게 만든다. 내적 침묵이 이 기도의 일차적인 목표이다.

3). 내적 성찰, 그리고 심리적 개안.
이 기도에서는 아주 밀접한 종류의 자기 부정이 필요하다. 영적인 행복의 시간인 피로 회복과 같은 경험이 기도의 부산물이긴 하지만 이것만이 기도의 목적은 아니다. 이 목적은 우리가 가장 집착하고 있는 것 -말하자면 우리의 깊은 사고들과 감정들이 솟아나는 그 원천- 즉 거짓 자아를 부정하는 데 있다.

4). 자아 성찰.
만일 당신이 이 기도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성찰하려는 뿌리 깊은 습관을 극복하면, 당신은 평화를 얻고 그것을 소유하려는 생각을 안하게 되며, 그리하여 그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5). 내적 정화.
어떤 형태의 묵상이나 기도든, 사고를 초월하는 것이면 내적 정화의 작업을 갖게 한다. 이 작업은 하나님이 하시는 정신 치료의 학교이다. 이것은 깊이 뿌리박고 있는 긴장을 사고라는 형태로 표출하도록 우리의 신체를 도와준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치료에서 오는 사고들은 그것들이 어디서 그리고 왜 오는지 본인은 알지 못한다. 그 사고들은 어떤 힘을 가지거나 정서적으로 충전된 채 떠오른다. 어떤 이들은 최근의 어떤 사건과 관련지을 수 없는 분노, 슬픔, 두려움 등을 느낀다. 이러한 것들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하여 일생 동안의 해결되지 못했던 심리적 문제들이 점차로 해소되고, 본능적 욕구에 기초를 두고 행복해지려고 어렸을 적에 마련하였던 정서적 반응 체제들이 무너지면서 거짓 자아는 참자아에게 자리를 내어 준다.

7). 하나님 안에서 쉼

내적 침묵이나 "하나님 안에서 쉼"은 사고와 상상과 정서의 저편의 일이다. 이러한 인식은 당신에게, 당신의 존재의 핵심은 내적이어서 파괴될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에게서 사랑을 받고 있고 그분의 거룩한 생명을 나누어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 중에 내적 침묵의 분명한 경험을 즐기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고요, 평정과 동시에 간헐적인 사고들이 떠오름을 늘 체험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체험을 하지 못한다. 어떠한 형태와 정도의 내적 침묵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되 바라지는 말라. 바람은 또 다른 사고이기 때문이다.

8). 향심기도 실행을 위한 몇 가지 지침과 설명

지침들
1. 하나님이 당신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심에 동의하는 지향의 상징으로서 거룩한 단어를 선택하라.
2. 편안히 앉아 눈을 감고 하나님께 동의하는 지향의 표시로 그 거룩한 단어를 조용히 떠올려라.
3. 어떤 사고가 떠올랐음을 인식하면 조용히 그 단어로 돌아가라.
4. 기도가 끝날 때 눈을 감고 2, 3분간 침묵 속에 머물러 있어라.
5. 향심 기도가 아닌 것.
1). 이것은 기술이 아니다.
2). 이것은 정신 이완 훈련이 아니다.
3). 이것은 자기 최면이 아니다.
4). 이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다.
5). 이것은 심령 현상과 같은 것이 아니다.
6). 이것은 하나님 현존의 "느낌"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7). 이것은 논리적 묵상이나, 정감적 기도가 아니다.

6. 관상 기도는
1) 하나님과의 관계이면서 동시에 그 관계를 키워 나가는 수련이다.
2)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운동이다.
3) 그리스도와의 대화를 넘어서 그분과의 통공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다.
4) 우리가 하나님의 언어인 침묵에 습관 들이게 한다.

결론

얼마나 많은 사고들이 이 기도 중에 있었나. 혹은 얼마나 평화를 즐겼나로 이 기도를 판단하지 말라. 이 기도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은 일상생활에서 당신이 큰 평화와 겸손과 사랑을 갖게 된 것과 같이 장기적으로 맺어지는 기도의 열매이다.



제 15장 예수기도

1. 예수님 기도의 여러 가지 정식
주 예수 그리스도여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 죄 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 예수여-자비를 베푸소서
예수 그리스도여-자비를 베푸소서
예수님 자비를
그리스도여 자비를
예수님-주님
예수 그리스도여
주 예수여
예수님

2. 아빠스의 추천의 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에서 당신 자신을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참길로서 계시하신다.

이 기도는 육의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영의 눈으로 예수님을 볼 수 있도록 힘을 기울이는 믿음의 기도이다.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 마음 안에 그분의 고요함과 영적 현존을 심어준다. 이 거룩한 이름은 그분의 인성과 신성을 똑같이 아주 친근하게 다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3. 마음 집중기도 안내
그리스도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성령안에서 아버지께로 향하기 위해 우리는 잠시 일상적인 업무와 생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고독과 고요함 속에서 “은밀히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이 말씀을 실천할 시간을 꼭 가져야 한다.

4. 마음 집중기도를 위한 지침
조용한 장소에서 하루에 두 번, 15분씩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1). 먼저 믿음 안에서 자신의 마음 안에 하나님이 오시도록 기도를 드린다.
2). 다음, 살며시 눈을 감는다.
3). 마음이 고요히 가라않고 집중이 되었으면 기도문을 선택한다.
4). 그대가 이 기도를 바치면서 무엇인가를 깨닫고 인식하게 되더라도 다시 단순한 마음으로 고요히 기도문으로 되돌아가라.
5). 기도가 끝났으면 천천히 자신의 밖으로 나온다.

5. 예수기도 기도의 효과
아주 분명한 효과는 긴장과 압박감을 풀어 주는 것이다. 따라서 깊은 휴식을 취할수 있고 마음이 상쾌해지고 활기를 띠면서 새로운 기운이 생긴다.

6. 예수님 기도의 묵상법
반복은 자신의 자연적이 영향을 초월하고 거룩한 존재와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정신을 집중시켜 더욱 깊은 능력을 키우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7. 기도문 사용하기
사도시대 이후 지금까지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혹은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기도문이 줄곧 쓰여 왔다.

8. 기도할 때 취할 신체적인 자세
규칙적인 예수님 기도 묵상을 하기위해서는 조용하고 고독한 장소일수록 좋다. 먼저 눈을 살며시 감고 눈꺼풀위에 그대의 주의를 집중시켜라, 그 다음 자신의 감정과 의지를 서서히 가라앉히면서 자신의 턱과 안면근육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 다음 천천히 신체의 다른 부분, 목, 어깨, 가슴, 허리, 허벅지, 다리, 발 등 으로 옮기면서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해준다.

9. 예수님 기도를 호흡하는 법
온몸이 편안한 자세가 되었을 때 서서히 기도를 시작한다. 먼저 속으로 열을 세어라. 열에서부터 시작해서 아홉, 여덟, 일곱까지 천천히 세어 내려간다. 일곱에서 잠시 멈춰서 생각해라. ‘나는 지금 마음속 깊은 곳으로 내려가고 있는중이다.’ 계속 여섯, 다섯, 넷을 천천히 세어 내려가라. 넷에서 멈춰서 ‘마음속 깊이깊이’ 내려가고 있음을 다시 생각하라. 다음 셋, 둘, 하나에서 끝을 맺는다. 여기에 도달하면서 그대는 내적, 외적으로 깊은 고요 속에서 둘러 싸이게 된다. 예수님 기도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예수님 기도의 통상적인 완전한 정식은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우리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이다.

10. 그리스도 현존에 대한 인지
이 기도를 호흡과 일치하면서 계속 해도 좋고 아니면 “예수님” 하고 한 단어만 부드럽게 그리고 길게 부르는 것도 좋다. 예수님이란 단어가 그대 의식에서 점점사라질 때, 때때로 그것은 내적으로 깊은 심층의 단계에 와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어느 정도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직접 대면해 있는 상태에 와 있음을 뜻한다.

11. 내적인 기능을 고요히 간직하기
이러한 마음 상태에서 구원의 사건과 그리스도의 신비 혹은 그 밖의 것을 묵상할 때 우리는 즉시 풍요로운 수확과 결실을 맺을 수 있는 묵상 안에서 살게 된다.

12. 기도문의 실천
그대의 의식 속에 무엇이 들어오든지 항상 받아들이려는 긍정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 그냥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못 들어오게 막는다든지 들어온 것을 억지로 내 쫒으려고 하지 말아라.

13. 기도 중에 졸음이 오는 문제
실제로 경험을 하고 보면 이 짧은 깊은 휴식이 긴 낮잠만큼의 효과를 가져다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분이 우리 앞에 현존하고 계심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믿음을 가지고 이 기도를 바쳐야 한다. 이 기도문을 매일 자주 반복해서 바쳐라. 가능한 하루에 두 번 15분씩 이 예수님기도 묵상시간을 가지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다.

 

◘ 예수살기 영성수련 가이드 ◘

                   방영식

자아 성찰하기

IQ 지수 (지성) => EQ 지수(감성) => MQ 지수(도덕성) => SQ 지수(영성)


* 영성지수(SQ: Spirituaility Quotient)

1.내면성지수=>내적 성찰(Inner Reflection), 자기정화 (Purgaion), 조명(Illumination) => 합일

* 三學(삼학)수련: 戒律(계율) => 禪定(선정) => 智慧(지혜, 보리심)

2.외면성지수=> 생활 수련 = 의,식,주 수련(류영모, 간디), 시간관리, 재정관리 등등

3,공동체성지수=> 지역과 사회, 지구촌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영성

4.우주, 생태성 지수 => 자연과 우주와의 교감과 관계성



영성수련에 들기 : 서양적 수련 <=> 동양적 수련 (몸 => 마음)


1) 調身(조신): 몸다스리기 => 2)調息(조식): 호흡다스리기 => 調心(조심) : 마음다스리기

* 생체순환 => 몸풀기 (신체근육이완) - 펴기, 굽히기, 두두리기(사지, 머리), 눕기,
=> 고개 흔들기(뇌파진동), 팔흔들기, 온몸 흔들기,
=> 당기기(귓볼), 누르기(턱, 귀위, 눈), 맛사지(얼굴), 주무르기(발다닥), 흝기(온몸)

* 호흡하기 => 복식호흡, 들숨과 날숨.

* 소리명상 => 아!~~~ 이!~~~ 우!~~~ 쉬!~~~ 허!~~~ 오옴! ~~~
=> 새소리, 바람소리, 낙엽소리, 물소리, 음악(명상, 교향악, 팝, 째즈)

8공덕음 (八功德音)

(1) 극호음(極好音) : 극호음은 맑고 아름다워 싫증이 나지 않으며 많은 호감을 가지게 하는
음성으로서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한다.
(2) 유연음(柔軟音) : 대자대비심에서 나오는 음성으로서 사람의 마음 속으로 부드럽고 유연하게
스며 들어간다.
(3) 화적음(和適音) : 듣는 이의 마음을 아주 편안하게 해주어 이치를 깨닫는 데 도움이 되는 음성이다.
(4) 존혜음(尊慧音) : 청중을 존중히 여김으로 스스로 지혜가 솟아나도록 하는 음성을 말한다.
(5) 불여음(不女音) : 결코 가볍거나 경망스럽지 않은 음성을 말한다. 위엄이 있어서 청중에게 두려운 마음으로 경외하도록 해주면 굴복하지 않을 수 없는 음성이다.
(6) 불오음(不誤音) : 말의 논리가 정연하여 오류가 없으며 듣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지혜를 얻고 잘못된 견해를 버리도록 해준다.
(7) 심원음(深遠音) : 말의 소리가 목구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단전(丹田)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로 사방에 울리며 모든 이치를 깨달아 청정한 행(行)을 더욱 높게 해주는 음성을 뜻한다.
(8) 불갈음(不竭音) : 말의 소리가 거침이 없고 힘차게 나오되 그치지 않아, 사람들로 하여금 무진상주 (無盡常住)의 과(果)를 이루게 하는 음성을 뜻한다.


* 마음다스리기 (정신집중명상)

=> 가부좌명상: 앉기 명상 => 손바닥 내리기 => 손바닥 올리기
=> 지구명상: 손에 지구를 품고 명상하기


* 동적명상수련: 걷기 명상 => 틱 낫한


* 불교의 리더십 수련 (사섭법)
중아함경, 권9, 40경 수장자경(手長者經)에서 부처님은 중생을 구제하려면 지도자는 4섭법을 통하여
자신의 연격을 연마해야 한다고 가르침.

(1) 보시섭(普施攝) : 지도자는 자기에게 있는 것을 남에게 기꺼이 베풀 줄 알아야 한다. 힘닿는 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베풀어 주어 감동하게 함으로써 중생을 교화할 수 있어야 참된 리더이다. 하지만 남에게 베푼다는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가 어려운 덕목이다. 불교 리더는 재물이나 지식이나 어떤 것 도 혼자 독점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이익보다는 항상 남을 먼저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2) 애어섭(愛語攝) : 항상 부드럽고 고운 말을 사용해야 한다. 중생에게 감동을 주면서 이끌려면 지도 자는 친근감을 주어야 하며 온화한 말을 사용해야 한다. 남을 무시하거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지도자는 항상 겸손하고 편안한 말씨로 쉽게 다가가야 한다.

(3) 이행섭(利行攝) : 불교 지도자는 항상 대중들을 이롭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알아서 처신해야 한 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늘 남을 이롭게 해야 한다.

(4) 동사섭(同事攝) : 지도자는 분별심이 없이 모든 사람들과 고락을 함께 하여야 한다. 언제나 상대방 과 같은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하며, 중생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일체가 되어야 한다. 지도자 는 나와 남을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여야 한다.


도덕경

15장 道(도)를 체득한 사람은 ... (道人의 성품)

吉地善爲士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도를 체득한 선비는 미묘현통하여 그 깊이를 알수 없다.
故强爲之容 (고강위지용) 억지로 형용을 하라 한다면
豫若冬步川 (유약동보천) 살얼음판을 머뭇거리고 건너는 듯하고
猶若畏四隣 (예약외사린) 사방의 이웃을 어려워하고.
嚴若客 (엄약객) 하고 근엄하기는 초대받은 손님같고
煥若氷將釋(환약빙장석) 수월함은 얼음이 녹는 듯 하도다.

敦兮(돈혜)여! 其若樸(기약박) 순박함이여! 아직 손질하지 않은 통나무 같고
曠兮(광혜)여! 其若谷(기약곡) 광할함이여! 빈 계곡처럼 트이고
混兮(혼혜)여! 其若濁(기약탁) 혼란스러움이여! 흐린 물처럼 탁하다.

孰能濁以靜之徐淸(숙능탁이정지서청)
누가 능히 자신은 흐린 듯하며 탁한 것을 점점 맑게 할 수 있을까.
孰能安以動之徐生(숙능안이동지서생)
누가 능히 자신은 편안하면서 병든 세상을 공들여 살려낼수 있을까.


제 11장 비어있기 때문에 아름답다 (비움의 영성)

三十輻(삼십폭)이 共一穀(공일곡)이니 서른 개의 수레 바퀴살은 하나의 바퀴통에 모이나니
當其無(당기무)하여 有車之用(유차지용) 그 바퀴통의 빈 것 때문에 수레로 사용된다.
土延埴(토연식) 以爲器(이위기)하니 진흙을 빚어 그릇을 굽나니
當其無(당기무)하여 有器之用(유기지용) 그릇 속이 비었으므로 그릇으로 이용할 수가 있다.
鑿戶牖(착호유) 以爲室(이위실)하니 문과 창을 만들어 방을 들임은
當其無(당기무)하여 有室之用(유실지용) 방안이 비었으므로 방 구실을 한다.
故有之以爲利는 無之以爲用 이니라. 그러므로 그 있는 것의 이로움은 비어 있음을 활용하는 것이다.


제49장 성인은 고정관념이 없다. (열린 마음의 영성)

聖人은 無常心하니 성인은 고정된 마음이 없으니
以百姓心爲心이로다. 백성의 마음을 곧 자기의 마음으로 삼는다.
善者를 吾善之하고 선한 사람에게는 나도 선으로 대하지만
不善者도 吾亦善之하니 德善이라. 선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선으로 대한다. 이것이 성인의 큰 선이다.
信者를 吾信之하고 신의가 있는 사람에게는 나도 신의를 대하지만
不信者도 吾亦信之하니 德信이라 신의가 없는 사람에게도 신의로 대한다. 이것이 성인의 큰 신의다.
聖人在天下에 噏翕(흡흡)할제 성인은 세상에 있을 때에 백성들의 모든 의견을 수렴하여
爲天下渾其心(혼기심) 하여 천하를 살필 때 성인의 마음은 백성들과 혼연일체가 된다.
百姓皆注其耳目이나 백성들이 모두 그의 이목에 집중하니
聖人皆孩之 성인은 백성들을 순진무구한 아이들처럼 되게 한다.

출처 : 神我無我~! I and my Father are one[요10]
글쓴이 : 꿈ego여행_관찰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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