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0주간 수요일>(2009. 8. 19. 수)
<선한 포도밭 주인>
포도밭 주인이 품삯을 지불하는데,
아침부터 일한 사람과 오후에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 같은 품삯을 줍니다.
그러자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이 항의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한 시간만 일한 사람보다 더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노동 시간이 다른데 같은 품삯을 받는다는 것이 불공평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의 항의가 정당하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손해를 보았기 때문에 항의를 하는 것이 아니고,
시기 질투 때문에 항의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기로 되어 있는 품삯을 받았습니다.
손해 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시간만 일한 사람들은 자기들보다 덜 받거나
아니면 자기들이 그들보다 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인의 처사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고 항의를 합니다.
인간의 기준과 하느님의 기준은 다릅니다.
인간들은 대졸 초임과 고졸 초임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규직 사원과 일용직 사원은 월급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과 말단 공무원은 월급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기준입니다.
유아 세례를 받고 평생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과
죽기 직전에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황이었던 사람과 시골의 신부였던 사람의 천국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죄 한 번 안 지은 사람과 죄속에서 살던 사람의 천국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기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기준은 다릅니다.
처음부터 제자였던 열두 사도와 나중에 사도가 된 바오로,
하느님 나라에서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합니까?
살아서 교황이었다고 죽어서도 교황 대접을 받아야 합니까?
직급과 직무에 따라서 천국을 따로 만들어야 합니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천국을 따로따로 만들어야 합니까?
그렇게 직급에 따라서 따로 만들어져 있다면, 그곳은 천국이 아닙니다.
(성직자 묘지에서,
주교였던 분의 무덤과 신부였던 분의 무덤이 왜 달라야 하는지,
저는 그런 것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최단 시간에, 그리고 최초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오른쪽 십자가에 매달렸던 죄수입니다.
성경에는 그 사람의 이름도 과거도 안 나와 있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성인이었는지, 얼마나 악한 죄인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데리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두고 누가 감히 예수님께 항의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보면
집을 나가서 방탕하게 살다 돌아온 작은 아들을 위해 잔치를 하는 아버지에게
큰아들이 화가 나서 불평합니다.
나는 성실하게 일만 했는데 나에게는 준 것도 없고,
저 못된 놈을 위해서는 잔치를 하다니...
그 모습은 바로
포도밭에서 하루 종일 일했으니 품삯을 더 받아야 한다고 항의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 자신도 모르게 큰아들 같은 모습이 될 때가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인간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대대로 순교자 집안이었다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이 받은 은총을 시기 질투할 자격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순교자의 후손이라면 그런 태도를 보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성당에 오래 다닌 것을 내세울 것도 없습니다.
영세 받은지 얼마 안 되었다고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전에 어떤 군종 성당에 강론을 하러 갔다가
사무실에 그 성당 사목회 조직표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회장은 대령이었고, 부회장은 소령이었고,
각 부서의 부장들은 대위들이었고,
그 부서의 차장들은 중위 이하 계급이었습니다.
군대는 특수한 사회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성당인데, 군대조직을 성당에 그대로 옮겨놓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는 군종 신부는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합니까?
교회는 하느님의 기준으로 움직이는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군대가 아닌데도 그런 식으로 조직되어 있는 본당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본당 신부님이 어떤 사정이 있어서 제가 미사를 대신 드리러 갔다가
미사 후에 사목회 임원들과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 성당은 국내에서 제일 큰 자동차 회사가 있는 지역의 성당이었고,
신자들도, 사목회 임원들도 대부분 그 회사의 직원들이었습니다.
사목회 조직을 보니 회사의 조직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습니다.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일까?
교회의 조직마저 인간 사회의 기준대로 만들어야 하는 것인가?
믿음의 깊이, 성덕의 깊이는 무시되어야 하는 것인가? 깊이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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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한 시간만 일한 사람과
아침부터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 같은 품삯을 받는다는 복음 말씀을 읽고
반성하기는커녕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건 아주 옛날부터 있었던 악습인데,
계속 고해성사를 안 보고 미루다가 죽을 때가 다 되어서 고해성사를 보는 악습입니다.
사도시대, 초대 교회 시절부터 그랬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서는 살고 싶은 대로 마음껏 살다가
다 늙어서 할 일이 없게 되면 그때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사람도 있고,
계속 냉담하다가 늙은 다음에 성당에 나가겠다는 사람도 있고...
실제로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먹고살기 바쁘니까 정년 퇴직하게 되면 그때 성당에 나가겠습니다."
저의 설득과 권유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년퇴직을 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병자성사도 받지 못했고, 고해성사도 보지 못했고, 그냥 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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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불공평하다고 불평하고 항의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이 하느님 뜻에 맞게 살고 있는지, 그것부터 반성할 일입니다.
오래 전 일인데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연쇄 살인 집단이 있었습니다.
모두 다 잡혀서 사형 당했지요.
그러나 그들은 사형 당하기 전에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고 견진까지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그들이 진짜로 회개를 했다면 지옥은 면제받았을 것입니다.
연옥을 거쳐서 언젠가는 천국에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만나는 일도 생길 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 그런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 천국이라면 안 가겠다고 하겠습니까?
최초의 순교자 스테파노가 살해될 때, 그 현장에 바오로가 있었습니다.
사실 바오로는 스테파노를 죽인 살인자 집단에 속한 인물입니다.
천국에서 스테파노 성인과 바오로 사도가 만난다면...
스테파노 성인은 바오로 사도를 외면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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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세상은 불공평합니다.
능력이 다르고, 기회가 다르고, 환경과 여건이 다릅니다.
다르니까 다른 만큼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하고
인생도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신앙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날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그렇다면 불공평한 세상을 공평한 하느님 나라로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마다 능력이 다르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같은 형제 자매이어야 합니다.
사람마다 환경과 여건이 다르고, 사는 형편도 다르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똑같은 형제 자매이어야 합니다.
조선시대 천주교에서는 신자들이 모였을 때
왕족과 양반과 상민과 천민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미사를 드리면서 양반 자리, 백정 자리를 따로 만들어놓지 않았습니다.
구분한 것이 있었다면 남자와 여자가 조금 떨어져 앉았다는 정도입니다.
김대건 성인이 양반 계급에 속했다는 것을 누가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그분이 양반 계급이 아니라 천민 계급이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있습니까?
한국의 103위 성인 명단을 보면 왕실의 후손도 있고, 양반도 있고,
평민도 있고, 천민도 있습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어린이도 있습니다.
누가 그걸 가지고 시비를 걸겠습니까?
하느님 앞에서는 인간의 사고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그저 공평한 정도를 넘어서
인간 세상에서의 가치 기준이 역전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교황이었다면 시골 신부보다 더 많은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성직자였다면 평신도보다 더 많은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공부를 많이 했다고 지금은 잘난체 할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무식한 사람보다 더 많은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일생을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살았다면 하느님께 돌려드릴 것도 많아집니다.
죽기 직전에 잠깐 은총을 받은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이 돌려드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받은 은총을 시기 질투하는 것은 죄입니다.
스스로 은총을 잃는 짓입니다.
자기보다 못 배우고, 후배이고, 하급자라고 해서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한국의 어떤 주교님은 십년 동안 보좌신부만 하다가 교구장이 되었습니다.
옛날 어떤 교황은 신부도 아니고 부제였는데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 전에 초대 교회 시절 어떤 교황은 노예 출신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자신이 받은 은총에 감사하면서, 남이 받은 은총을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지상에서 어떤 처지에 있었든지 상관 없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모두 함께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어야 합니다.
첫차를 탔든 막차를 탔든...
하늘나라로 가는 차는 하나뿐이고, 도착지점도 하나뿐이고...
우리는 하나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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