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1일 성 알퐁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학자 기념일 ·─━☆ 조영만 세례자요한 신부님 ·─━☆
(INTRO)
알퐁소 주교는 불과 16세의 나이로 교회법과 민법의 박사 학위를 받을 만큼 유능했으나 사회적 기득권을포기하고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여 서른 살의 나이로 사제로 서품 받습니다. 두 개의 수도회를 창설하였
으나 정작 본인은 설교와 저술에 더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특히 윤리 신학의 대가로 존경을 받았으며 수
도회를 통해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구제하는데에 여생을 보냈습니다. “사람아, 네가 나를 사랑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너를 사랑했다는 것을 생각하라. 네가 태어나기 전, 세상 그 자체마저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도 나는 너를 사랑했노라. 내가 존재할 때부터 너를 사랑해 왔노라." 알퐁소 성인께서 가지셨
던 이 사랑에 대한 확신을 오늘 미사 중에 우리들 안에서도 다시금 체험될 수 있도록 잠시 마음의 준비를
갖추도록 합시다.
(강론)
<교육, 밭을 갈다.>
교육이라는 말의 어원이 그렇답니다. 교육이 영어로는 'education'이고 이 말은 라틴어 'educare'에서파생되었습니다. educare라는 동사는 ‘밭을 갈다’, ‘경작하다’, 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아무래도 옛날
사람들은 교육을 통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일을 마치 밭을 가는 일과 같다고 생각한 듯싶습니다.
그냥 맨땅에서는 성장도 소출도 없습니다. 갈아야 합니다. 다듬고 보살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소출을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고로 자식들 하나라도 더 배우게 하고 교육시키려고 무던한 애를 쓴 세월들이
었습니다. 그리고 자식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선생님들에게는 아무리 젊은 선생님이라도 깍듯이 예를 갖추
어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까지도 하였습니다.
물론 세상은 변했습니다. 그러나 교육의 본질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밭을 갈아 그 인성이 변하게 하고그 성품을 살찌우며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가르쳐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것
입니다.
과연 지금 제가 말씀드린 이 교육의 본질이 오늘날에도 적용되고 유효하냐? 속 시원하게 답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지금은 누가 교육 시키고 있습니까? 학교가 한 아이의 성품과 인성을 염려하고 그 아이의 행동
을 계획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학부모들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매라도 한차례 들라치면 아주 그냥 난리가 납니다. 오로지 성적, 그거 하나 봅니다. 그걸로 좋은 학교 나쁜 학교, 좋은 선생 나쁜 선생은 판가름이 나버
립니다.
학교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학원으로 몰아넣습니다. 거기에는 더 이상 고상한 교육의 본질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경쟁만이 있습니다. 점수만이 절대 가치를 누립니다. 교육도 시장에
넘어간 것입니다. 학교가 교육이 시키는 것이 아니라 돈이 교육을 시키고 교육을 부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시장이라는 곳이 인간 형성이라는 교육의 본질에 적당하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시장은 이익을 지향하는 곳입니다. 교육 또한 결국 투자를 통한 이익 창출이 그 목적으로 전락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일입니다. 제가 아는 친구 녀석은 직장 때려치우고 다시 한의대를 갔습니다. 학비를 어떻게 하냐? 물었
더니 학자금 융자를 받아서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4학년인데 진 빚이 5,000만원이랍니다. 이제 네 학기가
남았으니 한 3,000만원 정도 더 투자하면 한의사 자격증 따서 한 5년 안에 다 갚을 수 있다고 합니다.
투자를 했으니 본전을 뽑고, 더 큰 투자를 하면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시장에서의 교육개념은 그렇습니다. 교육에 관해 더 큰 투자를 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교육 시장은 좌지우지 될 것입니다.
가진 사람은 일 년에 2000만원쯤 하는 특목고에 보낼 수 있습니다. 물량공세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장에는 못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은 법입니다. 그들의 자녀들은 우열반에 밀려 나가떨어지게 되어있습
니다. 예전에는 개천에서 용난다는 표현이 통했지만 앞으로의 세상은 갈수록 그 가능성은 줄어듭니다.
시장에 맡겨진 교육을 통해 더 이상 교육이 밭을 경작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의 성을 구축하는 든든한 성벽이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있는 사람들은 교육의 기회를 장악함으로써 더욱 자신들의 성을 높이 쌓을 수 있
습니다. 서울대 의대의 입학생 40%가 그 부모가 의사라고 했습니다. 결국 있는 사람들이 교육을 자기 기
득권을 공고히 하는 권력으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번 서울 교육감 선거에서도 서울의 25개 구(區)에서 17개 구가 그래도 평등한 교육 기회를 주장하고 지독스런 경쟁에서 아이들을 좀 자유롭게 하자던 후보자가 1위로 뽑혔으나 나머지 8개 구에서 지나치게 압
도적인 표차로 시장논리 교육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후보가 1위로 뽑히는 바람에 결국 전체적으로는 8개
구의 지지를 받았던 후보가 교육감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 여덟 개 구의 대부분이 강남, 땅부자 동네였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주소입니다. 출신을 따지고서열을 따지고 있고 없음을 따지는 일이 너무나 보편화되어 있기에 이제는 여기에 입을 대는 것조차 힘이
떨어집니다.
출신을 따지고 서열을 따지고 있고 없음으로 이미 그 인생을 반토막 내어버리는 세상에서는 결코 예수를예수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돈이. 시장이. 자기의 권력과 실력이 하
느님을 앞지르고 생명의 보편적 존엄성을 잊어버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고향 사람들, 유독 그들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의 출신성분을 따지고, 서열을 따지고, 없는 집 자식의 볼품없는 집안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없고 그의 출신과 서열과 배경
만이 남습니다. 그러니 그 시야에서 예수가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고 맙니다.
고향의 불행이요, 동시에 이 시대의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알아보는 눈에서 우리가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 “예언의 정신”을 읽을 줄 아는 일입니다. 참된 권위는 서열과 출신성분
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언과 실천이 얼마나 일치하고 있는가?”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무더운 여름 아이들은 방학인데도 학교를 가고 학원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가 받아오는 성적 한칸만 보지 마시고 지금 우리 아이들의 인성과 성품이 과연 밭을 갈듯 제대로 잘 갈아지고 있는지 그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참된 교육열의 부모요, 그것이 예수를 예수로 알아보는 신앙의 시작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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