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 29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 º☆………─▶조영만 세례자요한 신부님◀─………☆º
<마리아냐? 마르타냐?>
“마리아냐? 마르타냐?”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이미 좋은 몫을 택했다.”(루가 10,41) 예수님의 이 한 말씀에 의해
“마리아냐? 마르타냐?” 하는 질문은 이미 판결이 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리아의 길, 기도와 침묵,
묵상과 영성이 활동과 봉사, 섬김과 실천 이라는 마르타의 길보다 한 긋빨 더 쳐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영성과 실천이 그렇게 두 갈래로 딱 나뉠 수 있는 것일까? 를 생각하면 이 또한 성급한 결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성이 없는 실천은 자기 과시에 불과합니다. 길에서 죽어가던 42만 명의 사람들을 품에 안으며 나는
단지 ‘한 사람’ 속에 있던 예수를 일일이 끌어안은 것이라 하셨던 마더 데레사를 단지 활동가 내지 실천에 분주
했던 마르타로 분류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겠지요. 영성, 기도와 경청이 없이 어이 활동이 힘을 얻을 수 있었겠
습니까?
오히려 이 시대에는 더 많은 마르타, 더 많은 마더 데레사를 필요로 합니다. 실천이 없는 영성이야말로 인간의
영혼에 거품만 잔뜩 끼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성당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활동이 신명도 나고 기쁨도 있었지만 점차
세월이 흐르며 지쳐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좀 쉬고 싶다는 마음이 자연 생기겠지요. 맞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물어야 합니다. 내가 과연 활동과 봉사 때문에 이렇게 지치게 된 것인가? 정말 그런가?
어쩌면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 중의 하나가 영성과 실천을 따로 떼어 놓으려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하
는 생각을 합니다. 영성의 바탕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나의 영혼을 소중히 가꿀 줄 아
는 마음,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영성은 자기애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실천과 봉사의 바탕은 무엇입니까? 그 역시 사랑입니다. 타인에 대한 사랑이요, 내가 받은 하느님 사
랑에 대한 응답이 실천과 봉사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대전제를 통해 영성과 실천은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소통이 안 되면 지칠 수 밖에
없습니다. 흔히들 기도도 일처럼 수행합니다. 묵주기도 5단, 평일 미사 한 번, 레지오, 까떼나, 성경 필사... 이런
것들이 마치 의무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기도가 온전한 사랑의 열매로 남기란 대단히 어렵게 됩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내가 하는 활동도 버거운 신앙의 짐짝으로 여겨지게 되지요. “좀 쉬고 싶다.”는 마음속에는 어
딘지 모를 공허함이 들어있다는 외침이고, 이 외침의 웅변은 기도를 통해서도 사랑을 일구지 못하고 활동과 봉
사를 통해서도 사랑이 아니라 의무감과 책임감만이 팽배해 있음을 지적하게 만듭니다.
저는 마르타를 사랑의 여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슴 속의 사랑을 맨발로 뛰쳐나가 끌어안던 여인, 그래서 그녀
는 예수와 그의 동료들을 섬기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오빠의 죽음에도 이를 영성화 시키지 않고 뛰쳐나가
예수를 부여잡게 만듭니다.
교회의 일로, 또 신앙적인 책임으로, 저나름의 의미와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선택했던 이 길에서 지치고 계시는
형제 자매들이 계시다면 저는 다시 한 번 여러분 가슴 속을 흔들었던 그 사랑으로 위로를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 사랑!”(1요한 4,10) 내가 하느님을 향해
드리는 사랑은 이렇게 지치기도 하고 좋았다 나빴다 상처 받기도 하지만, 하느님은 이런 나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한 그 사랑을 단 한 번도 지치지도 포기하지도 거두지도 않으셨음을, 그 사랑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교회의 일이 여러분을 지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하느님의 그 사랑이 자꾸만 자리를 잃어가고 있기에 지
쳐가는 것이고, 하느님의 일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내가 맡은 직무와 의무가 먼저 앞서 하느님 일을 한다는 기쁨
보다는, “나만 또 이렇게 해야 하나?” 라던 마르타의 불평이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앞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앞으로의 세기에 어떤 방면으로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제시될 것이 <실천>입니다. 이미 세상의 모든 진
리는 너무나도 많이 확보되었습니다. 몰라서 못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소립니다. 알아도 너무 알고 배워도 너무
배운 것이 도리어 발목을 잡습니다.
새로운 리더쉽이라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아는 그것을 실천하는 일, 이것이 앞으로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덕
목이 될 것입니다. 많이 아는 사람이 대접 받는 세상이 아니라 아는 것을 실천하고 옳은 것을 실행하며 바른 것
을 펼 줄 아는 사람들이 대접 받는 세상이 옵니다.
<마르타 영성>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지요. 무분별한 실천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기 위한
모든 실천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12)
좀 쉬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신앙인 여러분, 활동을, 기도를, 신앙을 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쉴 수는 없습
니다.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활동을 기도를 신앙을 오로지 사랑 때문에 합니다. 쉼으로써 영적 진보를
쌓는 것이 아니라, 쉼으로써 도리어 사랑이 식어버리는 수많은 안타까움을 보아왔기에, 오늘 마르타 축일에 다
시 한 번, 마르타 영성의 '긴장'을 여러분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사랑하시고, 또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오로지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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