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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선교란 무엇인가?

도구 Ludovicus 2008. 4. 26. 08:19
 

선교란 무엇인가?


우제국(가톨릭대학 교수․신부․선교학)



1. Ⅰ. 서 론

2.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인 ‘선교 교령’ 탄생 25주년과 바오로 6세의 사도적 권고서인 「현대의 복음선교」(Evangelii Nuntiandi) 선포 15주년을 기해서 1990년도 말 「교회의 선교 사명」(Redemptoris Missio)이라는 선교에 대한 새로운 회칙을 발표함으로써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새롭게 일깨우며 선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동 회칙 2항 참조). 이 새 회칙은 무엇보다도 소련과 동유럽의 변화에 따른 오늘의 세계 정세야말로 만인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합당한 호기회임을 직시하고 교회의 선교적 노력을 촉구한다. “오늘의 시대는 이 분야(선교)에 있어 새로운 계기를 교회에 제공하고 있다. 즉 이데올로기와 독재 체제 정치 제도의 붕괴와 통신 수단의 발달로 인한 세계의 개방성 등을 들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복음의 씨앗에 보다 잘 준비된 인류의 지평선을 교회에 열어 주셨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복음화1)와 온 인류를 향한 선교를 위해 교회의 모든 노력을 다할 때가 왔음을 느끼게 된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 누구도, 그리고 교회 내의 그 어떤 기관도 모든 백성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이 최상의 임무에서 제외될 수 없다”(3항).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마른 16,15 참조)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받은 교회는 그 동안 끊임없이 복음 선포를 자신의 근본 과업으로 인식하고 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구원의 기쁜 소식에서 소외된 채 살고 있다. 복음 선포가 시작된 지 이제 3천년의 문턱에 다다르고 있지만 선교는 아직도 시작에 머물고 있으며 그러기에 전교회의 혼신을 다한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다(1항 참조). 그러나 이러한 상황 앞에서도 회칙은 선교와 복음의 ‘새로운 봄’이라는 희망적이고 고무적인 표현을 서슴없이 사용한다(2항, 86항, 92항).

이제 200년의 선교 역사를 지닌 우리 한국 교회의 선교 실정이 어떠한지 자문해 보게 된다. 그러나 그 질과 양에 있어서 글자 그대로 ‘시작’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을 도무지 떨쳐 버릴 수가 없다. 200주년과 ’89년도 세계성체대회를 준비하면서 한때 대내외적으로 보였던 한국 교회의 선교적 열성이 역사의 한 장으로 전락되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우리 교회도 선교의 ‘새로운 봄’을 다시 맞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3항). 이때 비로소 우리가 자주 거론하는 북한 선교를 위한 우리의 자세와 준비도 올바로 방향지어질 것이다. 본소고는 이러한 우리의 현실과 교회 내적 요구에 부응하여 선교와 그 사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위하여 마련된 것이다. 내용 전개에 있어서는 성서 안에서 선교와 복음화의 개념을 살펴본 후 교회 문헌상에서의 신학적 의미를 고찰함으로써 선교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 교회 선교의 원천으로서의 성삼위의 선교를 논하면서 교회의 선교 사명을 재음미하는 것으로 제한하고자 한다.


3. Ⅱ. 성서 안에서의 개념

4.

선교의 개념은 애초 그 사용이 종교적인 세계 안에서만 국한되던 것이 아니었다. 그 개념이 뜻하는 바는 정당하고 합법적인 권한을 가진 자로부터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부여된 과제나 임무를 의미한다. 때문에 선교는 어떤 권한자로부터의 파견 행위를 전제로 한다. 파견은 상사로부터 이루어지며 절대적인 순종과 사명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일단 파견 받은 자는 파견한 자의 대리인으로서, 파견자와 똑같은 권위를 갖고 행동하게 되며 일반적으로 메시지를 전한다. 이 같은 선교의 의미는 종교적 환경 안에 그대로 도입되어 하느님으로부터 메시지 전달을 위해 파견되는 것을 뜻하게 된다.

성서 안에서 선교의 개념과 실재성은 ‘파견하다’라는 동사의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2). missio(파견=선교)라는 명사는 mittere(파견하다) 동사에서 유래한다는 것은 불가타 본문에 의거하여 말할 수 있다. 수없이 많은 성서 구절들이 첫 권한자인 하느님으로부터 다양한 사람들에게 부여된 파견(선교)에 관하여 언급한다(창세 45,5; 출애 3,13.14.15; 이사 6,8; 예레 1,7; 에제 2,3.4).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자들은 영을 받아(민수 11,25; 신명 34,9) 합당한 자격을 갖추게 되며 구원적 경륜 안에서 말씀과 표적(signum)으로 하느님의 협력자로서 사명을 다하게 된다(출애 7-10장 참조). 그리고 하느님께서 끝까지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써 그들의 파견을 보장하신다(출애 3,12).

신약에 와서 이 선교의 개념은 보다 새롭고 충만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데 그것은 이 개념이 신적인 인간이신 성자(요한 3,17; 갈라 4,4)와 성령(요한 14,26; 루가 24,19)께 적용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신약의 새로움은 그리스도께서 결정적이며 마지막으로 파견된 선교자이시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는 신약 성서의 가장 핵심 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요한 복음에는 60번 이상이나 그리스도를 파견된 선교자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요한 3,34; 5,24; 7,16; 12,44.45; 특별히 17장 전체가 파견과 연관된 개념들로 가득하다).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은 당신 외아들까지 이 세상에 파견하시는 엄청난 일을 하신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명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는 무조건적인 하느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결과인 구원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적 사랑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적 사랑을 드러내셨고(루가 15장 참조) 하느님의 구원이 구현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다(마태 4,17; 마르 1,15; 루가 4,43). 하느님이 인간을 무한히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은 구원이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처지에 있는 모든 인간에게는 기쁜 소식 즉 복음(evangelium)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몇몇 사도들과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 ‘복음’이란 개념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채택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3) 즉 인간을 구원하시고 죄 많은 인간을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시키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역사 안에 개입하신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의 개입을 곧 복음이란 개념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복음 선포를 evangelizare 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묘사했다.4) 오늘날 우리가 선교 개념과 함께 사용하는 복음화(evangelizatio)라는 명사화한 용어는 본시 성서적인 개념은 아니지만 evangelium과  evangilizare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5)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구원을, 성령을 통하여 깊이 체험한 사도들은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널리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제 사도들의 파견은 아버지를 통하여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점이 종래의 파견과 구별되는 것이다(갈라 1,1; 고린 1,1 참조). 성부께로부터 파견 받은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권위에 의하여 사도들을 모으고 그들을 주축으로 교회를 세우고 그들을 파견하신다. 교회는 단지 마지막 선교자인 그리스도의 선교에 참여할 뿐이며 그분의 권한에 의하여 그분의 가르침을 전하고 이를 증거하기 위하여 파견된 자이다(마태 10,6; 루가 10,3; 요한 20,21).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하사하시어 그들이 파견자로서 합당한 자들이 되게 하시고(요한 20,23 참조) 그들과 끝까지 함께하시며 친히 표적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전하는 바가 참됨을 입증해 주고 계신다(마르 16,2).


4.1. Ⅲ. 교회 문헌 안에서의 신학적 의미

4.2.

그러므로 교회는 본성상 선교하는 자(선교 교령 1항)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교회의 본성을 바르게 직시한 교황 바오로 6세는 「현대의 복음선교」에서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 곧 복음화 즉 선교에 있음을 천명한다(14항). 그러므로 교회가 복음을 전할 때에만 교회로서 제구실을 하는 것이며, 복음을 전하지 않을 때는 자기 존재의 본의미를 상실하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선교 교령에서는 특별히 교회의 선교적 활동을 설명하는데 있어 선교(missio)라는 라틴말의 복수인 missiones를 사용한 점이 주목된다. 이로써 일반적 의미에서의 교회의 선교와 전문화한 선교적 활동을 구분한 감을 주고 있다.6) “교회로부터 파견된 복음의 전파자들이 온 세계에 가서 복음 전파의 임무와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백성들과 집단에 교회를 부식(implantatio)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독특한 사업을 선교들(missiones)이라 한다”(선교 교령 6항).7) 여기에서 교회의 부식이 교회의 선교적 활동의 특별 혹은 직접적인 목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즉 교회는 구원의 도구와 성사가 되기 위하여 아직 현재하고 있지 않은 곳에 존재하도록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부식’이란 표현은 그 후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사실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교회를 심는 것만이 선교의 유일한 과업으로 공의회가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잘못 이해되기도 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복음이 선포되어 방인 교회가 설립된 곳에는 선교가 완성되어 더 이상 선교 활동이 필요치 않은 것으로 자칫 오해될 수도 있었다. 물론 교회는 처음부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을 자신의 선교적 활동의 커다란 과제로 인식해 왔고 지금도 그것에는 변함이 없다.8) 그러나 선교 교령은 선교 활동의 과제로 교회의 부식뿐 아니라, 회개(2항, 3a 항, 5항, 7항)9)와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성장(5a항, 7b항, 9항, 19c항, 36a항)10)도 함께 언급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선교 교령의 ‘교회의 부식’에 관한 문제에 관하여 쉐모아(A. Seumois) 신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11) 그는 우선 교회적 활동의 근본적 형태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사목적 활동과 사도적 활동이 그것이다. 사목적 활동은 교회가 이미 존재한 곳에 속한 신자들을 위한 것이고 사도직 활동은 그리스도를 아직 믿지 않고 교회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그 대상으로 한다. 그리고 사도직 활동은 다시 일반적 사도직과 선교적 사도직으로 세분되는데 사도직의 이러한 두 가지 형태는 그 내용이나 방법에 의해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에 의해서 구분된다. 그래서 선교적 사도직은 방인 교회 설립을 그 목적으로 하며, 이미 존재하는 교회의 기초 위에 전개하는 일반적 사도직은 이 교회에 속하지 않은 개개인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쉐모아 신부는 개인적 회개를 위한 사도직 활동의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협의적 의미에서 선교적 활동의 목적이 교회의 부식(implantatio)임을 강조한다.

가톨릭 선교 신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쉬미들린(J. Schmidlin)12)에게서도 교회의 부식에 대한 견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서 이것은 무엇보다도 개인적 회개13)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쉬미들린에게 있어서 개인적 회개와 교회의 설립은 유일한 선교 목표의 두 가지 차원 혹은 두 가지 측면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측면은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이라고도 불리며, 개인적 차원은 사회적 차원의 조건이 되고 또한 사회적 차원은 개인적 차원의 결과이기도 하다. 쉬미들린은 각 개인의 참되고 진실한 회개가 교회의 선교적 활동이 목표라는 것을 강조하며, 동시에 선교적 활동의 목표가 그리스도 신비체와 하느님 나라의 확장과도 일치해 있음을 말한다. 즉 그는 선교의 목표 한에서 사회적 차원을 언급하면서 지역 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 설립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차원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될 수 있는데 하나는 종교 - 내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측면이다. 종교 - 내적 측면이란 온 세상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사회적 측면이란 사회적으로 조직된 교회의 확산을 뜻하며, 일정 지역에 이러한 측면에서의 교회의 확장과 부식은 어느날 그 성취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곳에 교회의 선교가 끝나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 나라의 확장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성장을 위해 선교는 계속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14)

이들의 이러한 교회의 선교관은 풍부하고 복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겠다. 그리고 ‘74년 시노드 이후15)와 바오로 6세의 사도적 권고서인 「현대의 복음 선교」 발표 이후 가톨릭 교회 내에서 선교하는 용어를 대신하다시피한 ‘복음화’의 개념과도 부합된다고 할 수 있겠다. 복음화의 개념은 선교 개념에 있어서 근본이 되는 하느님께로부터의 파견 행위보다는 파견자에게 부여된 임무의 본성과 더욱 관련이 되어 있으며 대단히 풍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16) ’74년 주교 시노드의 기초 작업 자료(Instrumentum laboris)는 복음화를 다음과 같이 규명한다. “복음 안에 선포된 그리스도의 신비에 사람들을 인도하도록 하는 모든 활동을 통틀어 복음화라고 한다. 그러므로 애덕의 증가와 성사 집행 없이는 온전한 의미에서 복음화를 이룰 수 없다. 더구나 그리스도께 대한 기쁜 소식의 선교 없이는 복음화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신약 성서에 의하면 복음화의 중심점은 그리스도 신비의 선포인 것이다.”17)

특히 「현대의 복음선교」에서는 복음화 개념은 아주 역동적이고 그 의미가 풍부한 개념으로 폭 넓게 규명되고 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교리를 가르쳐 세례를 베푸는 일뿐만 아니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파견에 따라 이 세상의 근본적인 변화, 즉 구원을 위해 노력하는 구원의 성사로서의 교회의 모든 증거적 행위까지를 통틀어 복음화라 일컫고 있다. 그러므로 본사도적 권고서는 복음화를 이중 어느 한 가지로 축소시키려 하거나 단편적으로 규정하려 할 때 그것을 약화시키거나 그르치게 할 위험이 있음을 서슴없이 지적한다(현대의 복음선교 17항). 그러면서 복음화의 역동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복음 선교는 여러 가지 요소로 성립되는 복잡한 과정입니다. 그러한 요소들이란 인류의 쇄신, 복음적 생활의 증거, 명백한 교리 전달, 마음의 귀의, 공동체에 대한 참가, 성사 배령, 사도직 활동 등이며, 이 모두는 서로 배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상호 보완적인 것입니다… 이번 시노드의 공적은 이 요소를 대립시키지 않고, 오히려 조화 있게 생각하여 교회가 해야 할 복음 선교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점입니다”(현대의 복음선교 24항). 그리고 동 권고서는 복음화의 내적 변화 성취에 있음을 천명함으로써(현대의 복음 선교 18항)회개가 그 근본임을 분명히 한다. 따라서 교회가 복음화 활동을 전개한다는 것은 하느님 구원 계획과 그리스도의 정신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바로잡아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적으로 변혁시키는 것을 말한다. “교회로서 복음 선교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보다 넓은 지역에서 혹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하는 것만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계획에 배반되는 인간의 판단 기준, 가치관, 관심의 초점, 사상의 동향, 사상의 원천, 생활 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역전시키고 바로잡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현대의 복음선교 19항). 그러므로 복음(현대의 복음선교 15항). 교회는 끊임없는 회개로 자신이 먼저 복음화되면서 이 세상을 복음화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다(현대의 복음선교 15항).

이상에서 우리는 선교와 복음화의 개념과 그 신학을 성서에서부터 시작하여 교회 문헌에 이르기까지 살펴보았다.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성서안에서 선교는 하느님으로부터의 파견 행위와 파견된 자에게 위임된 자격과 사명을 뜻하며, 특히 신약 성서의 중심은 인류 구원을 위해 파견되신 그리스도의 선교와,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파견된 교회의 선교이다. 선교 교령에서는 교회론적인 관점에서 선교를 보다 전문적 의미에서(복수를 사용)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가 존재하지 않은 곳에나 백성들 안에 교회를 설립하기 위한 활동”으로 규명하였다. 그러면서 신앙을 굳건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신자들에게 행해지는 복음 선포를 위시해서 회개와 그리스도 신비체로서의 교회의 성장을 위한 노력 또한 중요한 선교적 행위임을 밝히고 있다. 복음화는 무엇보다도 기쁜 소식의 선포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 선포가 복음화의 절정과 핵심을 이루지만 여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복음화의 개념을 대단히 역동적이고 그 내용이 풍부하여 하느님 나라의 선포(현대의 복음선교 22항)와, 하느님을 모든 이의 창조주와 아버지로 드러냄(현대의 복음 선교 26항)과 종말적이고 초월적인 구원(현재의 복음선교 27항)을 위한 인간의 근본적 변화를 그 핵심으로 하고 있으나 정의와 평화와 인간 증진을 위한 노력도 도외시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방법과 내용으로써 복음 선포, 증거적 생활이 간과될 수 없으며,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께 완전히 일치하는 삶이 그 정점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복음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면서 비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선교와 복음화의 개념은 서로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동의성과 상호 보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도 복음화는 선교의 한 방법이자 그 목적이라 할 수 있다.18)


5. Ⅳ. 성삼위의 선교19)와 교회의 선교

6.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많은 교부들은 미구에 선교 교령이 될 의안(Schemapropositionum)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교회의 선교적 활동이 보다 신학적 토대 위에 기초되고 교회 헌장과도 보다 조화 있게 작성되길 바라는 의견들을 표명했다.20) 따라서 신학 전문위원들은 교부들의 바람을 수렴하여 의안을 다시 준비했는데 이들이 구상했던 선교의 신학적 토대의 방향은 동 전문위원 중에 한 사람이었던 이브 꽁가르(Y. Congar)신부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 잘 드러난다. “만일 선교를 신학적으로 교회의 사명 안에 기초하기를 바란다면 이 선교를 무엇보다도 성부의 계획과 성자와 성령의 선교 안에 그 토대를 둘 필요가 있다.”21) 이 같은 의견에 대한 교의적 원칙을 설명하는 선교 교령은 앞 부분 특히 2, 3, 4항에서 교회 선교의 원천으로 성삼위 선교를 깊이 고찰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 전반을 규명하는 선교 교령은 성삼위의 선교를 그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고 하겠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 요한 4,16). 이 성서의 말씀은 하느님께 대한 정의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심오한 표현이다.22) 그런데 사랑은 본성상 자기 확장의 경향이 있다. 사랑을 나누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 역시 이 원리로 설명된다. 그리고 이것을 일컬어 사랑의 외향적 성향이라 한다. 하느님 사랑의 외향적(ad extra) 성향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이 세상 창조에서 잘 드러난다. 인간을 위해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시고23) 마지막에는 인간을 당신의 모습을 따라 만드신다(창세 1,26).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은 여기에 머물지 않으시고 당신 모습을 지닌 인간을 성삼위의 생명에 참여시키고자 하는 엄청난 구원의 계획을 드러내신다. 그래서 구세사가 시작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하느님성에 참여시키기 위해, 즉 인간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구약의 오랜 준비 끝에 끝내는 당신 사랑하는 성자르 이 세상에 파견하신다(선교 교령 3항). 이처럼 성삼위 선교는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신비로운 하느님 사랑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성의 원초적 근원은 하느님의 원천적 사랑(amor fontalis)이다(선교 교령 2항). 다시 말하면 교회의 선교는 성부의 파견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선교 교령 2,3,4항). 그렇기 때문에 선교 교령은 교회의 선교성뿐 아니라 자기 존재의 마지막 이유로 불릴 수 있는 것, 즉 사랑의 원천인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분명히 밝히면서(선교 교령 2항) 자기 선교성의 기초가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 계획에 의거하여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파견과 성령의 파견 안에 있음을 명백히 선언함(선교 교령 2항)으로써 교회 선교의 기원의 심오함과 아울러 선교 사명의 중대성을 드러낸다고 보겠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느님 사랑에 그 원천을 두고 성자와 성령의 파견에서 비롯된 교회의 선교의 근원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교회 선교의 이유와 그 사명을 구체적으로 논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본다.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주축으로 한 교회 설립과 그 파견은 결코 우연적이 아니다. 하느님 구원 계획에 의해 필연적인 것이다. 그 까닭은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교회의 선교는 육화하신 그리스도의 선교를 연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사랑의 결과로 계획되었고 성자의 육화와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 부활로 성취된 인류 구원의 계획을 하느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계속 구현되도록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구원을 위해 한번이자 마지막으로 성취하신 바가 교회를 통해서 시간과 공간안에서 구현되어 가도록 하셨다. 이제 인류는 교회의 복음 선포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의 말씀을 듣게 되고, 교회의 성사를 통하여 구원의 은총을 부여받게 된다. 그러므로 본성적으로 선교자(선교 교령 2항)인 교회는 또한 ‘구원의 보편적 성사’(성교 교령 1항)이기도 하다. 선교자 교회에 대한 이 같은 정의는 교회가 구원의 표지일 뿐만 아니라 구원의 ‘도구’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는 곧 성삼위의 원천적 사랑에 근원을 두고 성자로부터 파견된 교회를 통해서만이 하느님 구원 계획이 온전한 의미에서 실현되며, 그 구원의 충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성삼위의 선교는 “교회 없이는 수행될 수도 없고 더욱 교회를 반대하고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복음 선교 16항).24)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만민에게 복음이 전달되고 구원의 보편적 성사인 교회가 온 세상에 현재하도록 선교자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선교 교령 5항). 여기에서 교회의 존재 이유와 목적이 곧 선교에 있음이(현대의 복음선교 14항) 보다 깊이 이해된다.


7. Ⅴ. 맺는 말

8.

지금까지 선교(복음화)의 이해를 위해서 그 성서에서의 개념과 신학적 의미, 그리고 그 원천으로서 하느님의 사랑을 고찰하면서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숙고하였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신비체인 교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 사명과 파견에 대한 앞의 모든 설명은 전문적 사목자와 선교사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성세성사로 그리스도의 왕직, 사제직, 예언직에 참여하는 모든 신자 각자에게도 똑같이 해당된다. 특별히 바오로 6세의 「현대의 복음선교」에 의하면 신자 개개인이 그리스도 신앙인으로 불린 근본 이유는 바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앙화이다”(1 고린 9,16)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며 우리의 각성을 촉구한다. 지면 관계상 선교의 방법론에 관해서는 논하지 못했으나 한마다로 가장 좋은 방법은 선교를 위한 기도와 희생 25), 권면과 생활 증거(표양)이다. 전민족 복음화를 위해 신앙인 각자가 기도하며 이웃의 소금과 빛(마태 5,13,14)의 구실을 하며 살 때 그 자체가 하나의 강력한 선교 활동이 될 것이며, 그러한 생활이 곁들인 권면이라야 힘을 발휘할 수 있다.26)

끝으로 바오로 6세께서 1975년 복음화의 날을 맞이하여 선교의 사명에 충실할 것을 권고하신 말씀을 옮기며 이 글을 맺고자 한다. “나는 당신들이 소명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다짐하고자 합니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 활동은 그 자체가 임의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계획과 구원의 신학에 그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선택은 착각이 아니고 당신들의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며, 당신들의 희생은 그 결과가 어떠할지라도 실패의 것으로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 이 문서는 효성동성당의 조효숙 헬레나 자매님의 도움으로 입력되었습니다.

<사목, 1992년 1월호, pp. 4-16 / 인천교구 시노드 홈페이지에서>

출처 : 오늘보다는 내일을
글쓴이 : 안 엘리지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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