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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그리스도왕대축일(091122)

도구 Ludovicus 2009. 11. 22. 08:21

<그리스도 왕 대축일>(2009. 11. 22)

 

<주님>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

이 나라들은 구약성경 시대와 신약성경 시대 당시에

그 지역을 장악했던 제국의 이름들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제국들의 다툼 속에서

글자 그대로 동네북이 되어서 얻어맞기만 했습니다.

때로는 나라가 망하기도 하고

백성들이 몽땅 포로로 끌려가서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그 제국들의 황제들은 하나같이 자기들을 ‘신’이라고 했습니다.

절대 권력을 쥐고 있었으니 그런 착각을 한 것입니다.

 

‘신’이라고 자칭하는 황제들 때문에

야훼 하느님만을 섬기는 유대인들은 이중으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정치적인 박해와 종교적인 박해를 함께 받았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온 세상의 주인이라고 자칭하는 황제들의 박해를 받으면서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에 대해서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그 묵상의 결과를 기록했습니다.

그것이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의 내용입니다.

 

창세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하느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류의 조상 ‘아담’을 만드셨다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신’이라고 자칭하는 황제들도

아담의 후손일 뿐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창세기의 천지창조 부분은 역사서도 아니고 과학책도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고백서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으로 믿는다는 신앙고백입니다.

더욱이 그 신앙고백은 ‘시’의 방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고 다스리신다는 신앙고백에 대해서

그리고 그 고백의 시적인 표현에 대해서

과학자들이 진화론이 어쩌고 저쩌고 시비를 거는 것은

웃기지도 않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진화론’은 아직도 여전히 증명되지 않는 가설일 뿐입니다.

또 진화론은 진화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일 뿐

진화의 원인, 이유, 진화의 주체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합니다.

누가, 왜, 그렇게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여간에 성경은 온 세상의 주인이 하느님이시라는 고백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성경의 맨 마지막 부분인 묵시록에서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심판과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합니다.

 

묵시록도 역시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으면서

이 세상의 주인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믿음과

하느님께서 언젠가는 박해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희망,

그 믿음과 희망 속에서 박해를 참고 견디면 얻게 될 영원한 행복과 생명,

그런 것들을 묵상하고 기록한 것이 묵시록입니다.

 

창세기는 세상 처음의 일을 묵상한 책이고,

묵시록은 세상 마지막의 일을 묵상한 책입니다.

그리고 둘 다 주인공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바로 그 하느님의 왕권과 주권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우주 공간과 시간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분이 누구인가?

바로 그것을 묵상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멍청한 과학자들은 말합니다.

우주는 저절로 생겨나서 때가 되면 저절로 끝날 것이라고.

자기들이 모르는 것은 그냥 다 저절로, 우연히 생긴 것이라고 우깁니다.

그들 말대로라면 이 세상에는 가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우연히 태어난 것이고,

죽는 것도 우연히 죽는 것이라면,

왜 우리가 좀 더 가치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 애를 써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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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왜 태어났는가?”

“나는 왜 사는가?”

 

그 물음에 대해 ‘나는 그냥 우연히 태어났을 뿐이다.’

라고 대답한다면, 그 인생은 참으로 딱하고 불쌍한 인생입니다.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우연히 만나서 인간이 된다?

한 남자와 여자가 하룻밤 쾌락을 즐긴 결과물일 뿐이다?

그렇게 태어났고,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이 그냥 살고 있다?

 

인간이 그런 정도의 가치밖에 없다면,

인간의 생명과 인생이라는 것이 그런 정도의 가치밖에 없다면,

사람이 하는 일들에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믿습니다.

태초부터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선택하셨고,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에 나를 세상에 내보내셨고,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도록 인생이라는 숙제를 맡기셨다, 라고.

 

그래서 내 인생은 나의 것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동시에 나를 위해서,

더 참되고 더 선하고 더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과정, 그 과정이 곧 인생입니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인생을 막 살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때가 많습니다.

모든 가치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 두기 때문입니다.

 

독재자들을 보면 모든 판단 기준이 자기 자신입니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옳은 것이다?

내가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마음대로 헌법을 뜯어고치고,

체육관에서 만장일치로 대통령 선출을 하는 생쑈를 벌이고...

(그러다 심복부하의 총에 맞아 죽었지만.)

 

자기 판단만이 옳고 중요하니까 산도 강도 마음대로 파헤치고,

쇠고기도 마음대로 수입해서 억지로 먹으라고 하고...

 

그런데 그게 어디 정치인들만의 모습이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고, 그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모두가

다 그런 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우상 숭배란 단순히 우상을 섬기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깨달아야 할 것을 깨닫지 못한 채

그저 눈에 보이고 증명할 수 있는 것만 믿는 것이 우상 숭배입니다.

 

영혼의 아름다움은 보지 못하고

몸의 아름다움만 중요시하는 것, 그것도 우상숭배입니다.

나눔의 풍요로움은 깨닫지 못하고

혼자 재물을 움켜쥐면서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 그것도 우상숭배입니다.

 

사람이 한 번 죽으면 그만이지, 라고 생각하면서

현세의 삶에만 집착하는 것, 그것도 우상숭배입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하느님께서 해 주셔야 한다고 고집부리는 것,

(그런데 바라는 것이라고는 그저 물질적인 것, 현세적인 것들...)

겉으로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그것도 우상숭배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나’입니다.

그럼 ‘나’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나’입니다.

‘나의 주인은 나’라고 하는 그 ‘나’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그 ‘나’는 누가 만들었고, 누가 이 세상에 내보냈습니까?

죽은 다음에 어디로 갈 것인지, 어떻게 될지는 누가 결정합니까?

 

하루 뒤에 할 일을 계획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좀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 년 뒤의 일을 계획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십 년 뒤, 이십 년 뒤의 일을 계획할 것입니다.

 

자, 그럼, 하루 뒤에도 자신이 살아 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십 년 뒤에 살아 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1979년 10월 25일 밤에 부하의 총에 맞아 죽을 것이라고 알았다면??

그래도 독재를 했을까요?

 

세상의 진정한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인생의 진정한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주님으로 부릅니다.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려면 모두 다 하느님 뜻에 맞게 일해야 합니다.

각자의 인생이 가치가 있으려면 각자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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