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2009. 9. 20)
<순교>
순교란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입니다.
신앙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그보다 덜 중요한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이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목숨으로 증명하는 일이 순교입니다.
순교자들의 순교 정신을 본받는다는 것은
신앙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 정신을 본받는 것입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현 시대에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칠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신앙을 증명할 기회는 많이 있습니다.
신앙이 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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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는 순교자들을 공경하고,
말로는 순교 정신을 본받는다고 하면서도
신앙이 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그건 다 거짓말이 됩니다.
본당신부로 살면서 그런 경우를 숱하게 보았습니다.
미사 참례를 하고 있는데,
주문 배달을 요구하는 전화가 걸려옵니다.
그 전화를 받고 그냥 성당에서 나갑니다.
조금 있으면 영성체 순서라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미사참례를 끝까지 마치는 일보다 배달이 더 중요합니다.
그걸 보고 있는 주례사제는... 속이 터질 뿐입니다.
주일날 학교에서 무슨 행사가 있다고
너무나도 쉽게 성당보다는 학교를 선택합니다.
주일날 가족들의 모임이 있다고
너무나도 쉽게 성당을 버리고 가족의 행사를 선택합니다.
무슨 친목 모임이 있다고, 중요한 손님이 왔다고,
이런 일이 있다고, 저런 일이 있다고...
그래서 예수님은 맨나중에 시간이 날 때, 그때나 찾습니다.
아니면, 그냥 잊어버리고 있다가 아쉬울 때나 찾습니다.
우선 순위가 맨 뒤로 밀리는 신앙생활은 신앙생활도 아닙니다.
그건 그냥 취미생활입니다.
신앙이란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되지 않는다면 예비신자 교리를 전혀 듣지 않고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제가 지금 하는 말이 공감되지 않는다면
믿음도 없이 종교를 선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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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당시 대학생이던 저는 어떤 동아리의 신입 회원이었습니다.
그 동아리는 당시 반정부 시위를 거의 주도하던 운동권 동아리였습니다.
어느 날, 동아리 MT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신입회원이었던 저는 무조건 참석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바로 부활절이었습니다.
그 MT에 참석한다면 성토요일과 부활대축일날에 전혀 성당에 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망설일 것도 없이 바로 결정했습니다.
MT를 포기하고 성당에 가기로.
교리교사로서, 성가대원으로서 성당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부활대축일이니 당연히 성당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 이상 중요한 일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부활절이 지난 후에 나라 전체가 점점 더 시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5월 17일에 계엄령과 휴교령이 선포되었고, 많은 학생들이 잡혀갔습니다.
저의 친구들, 제가 알고 있던 동아리 회원들이 모두 체포되었고,
간부급 회원들은 교도소로, 덜 중요한 회원은 삼청교육대로,
그 나머지는 군대에 강제로 징집되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계엄령과 휴교령이 해제될 무렵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부활절날의 MT 참석자 명단이 형사들 손에 넘어갔고,
그 명단에 이름이 들어 있었던 학생들이 모두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만일에 제가 성당에 가지 않고 MT에 참석했다면...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오늘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라는 선택의 갈림길은 늘 찾아옵니다.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신앙을 최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1980년 당시의 민주화투쟁은 우리 모두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긴 해도, 일단 성당에 먼저 가야만 했습니다.
'우선 성당에 먼저'... 그것이 신앙인의 원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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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가 없는 시대에서는 순교의 필요성을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 별로 어려움이 없다면 순교 정신을 강조할 것도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박해는 사실 엉뚱한 곳에서 옵니다.
날씨 좋은 날 놀러갈 일이 많다는 것도 하나의 박해입니다.
경제가 어렵고 먹고살기 힘들다는 것 자체도 박해가 될 수 있습니다.
학교에, 또는 직장에, 또는 어떤 모임에 속해 있다는 것 자체도 박해가 될 수 있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일 같은데도
이쪽이냐, 저쪽이냐, 무엇을 선택해야 하느냐? 라고 고민할 일이 자주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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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저에게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주일미사 한 번 빠지는 것을 왜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라고.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냐?
성당은 매주 가는 곳이니,
기도는 아침 저녁으로 하는 일이니,
부득이하게 한 두번 생략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
그런다고 해서 예수님을 아주 잊어버리는 것도 아니고,
급한 일을 먼저 처리한다고 그걸 그렇게 심각한 문제로 생각해야만 하느냐? 라고.
'그럴 수도 있지.' 라는 말이 허용된다면,
조선시대 천주교에는 순교자가 한 명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아예 천주교가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죽어도 그럴 수 없다, 라고 고집을 부린 분들이 순교자들입니다.
그냥 정부에서 하라는 대로 하는 척 시늉만 해라,
일단 풀려나면 나중에라도 몰래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서학을 안 믿는 척 거짓말 한 번 해라,
임금한테 충성한다고 서약 한 번만 해라,
신주단지 앞에서 절을 하는 척만 해라, 라고
가족들이 설득하고 달래고 타이르고,
친척들이 나서서 설득하고, 친구들이 나서서 설득하고,
사또가, 이방이, 형방이 다 나서서 설득하고 타이르고...
그래도 순교자들은 죽어도 그럴 수는 없다, 라고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너무나도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고, 바보 같았을 것입니다.
아니면 미친 것으로 보였거나...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한 발 양보하면 다 잃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먹고살기 바쁜 세상에서,
사회생활도 해야 하고 직장생활도 해야 하고 가정생활도 해야 하고 학교생활도 해야 하고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성당일이 뒤로 밀리는 수도 있지... 뭘 그러냐?
라고 저에게 따지지 마십시오.
그럴 수도 있다, 라고 대답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유혹을 받았지만 단호하게 물리치셨고,
사도들도, 사도들의 제자들도 다 그런 말을 물리쳤습니다.
이천 년 동안 계속된 유혹과 박해가 그런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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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도 있지... 라는 말과
그럴 수는 없다... 라는 말의 차이는 너무나도 큽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행하려면,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게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는 융통성이란 없습니다.
순교 정신을 본받는다는 것은
자기 삶에서 신앙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앙인의 기본 자세입니다.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신앙인이라면 아주 아주 당연하게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성당 일을 잠깐 뒤로 미룰 수도 있지... 라는 말,
살다보면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일도 있는 법이지... 라는 말,
모두 다 사탄의 유혹이고 박해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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