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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십자가현양축일(090914.월)

도구 Ludovicus 2009. 9. 14. 08:11

<성 십자가 현양 축일>(2009. 9. 14. 월)

 

<십자가의 예수님>

 

천주교 성당에서,

인자하게 미소짓고 있는 예수님을 만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고통에 찌들고, 괴로워하고, 비참하게 죽어 가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또 성모상을 보면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성모상보다는

뭔가 슬퍼하고, 눈물짓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성모상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고통스러워하는 예수님 모습이나

슬픈 표정의 성모상을 보면서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얻게 됩니다.

 

그것은 내가 울고 있을 때,

예수님과 성모님도 함께 울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고통 속에 있을 때,

예수님과 성모님도 함께 고통을 겪으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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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실력의 의사라도

환자의 고통을 진심으로 함께 아파하는 의사,

환자는 그런 의사에게서 더 위로를 받고,

그런 의사를 믿고 의지하게 됩니다.

 

차갑고 냉정하고 사무적인 의사라면

실력이 좋더라도 환자는 그 병원에 가기 싫어하게 됩니다.

 

몸의 병을 고치는 것이 의사가 하는 일의 전부는 아닙니다.

환자의 마음까지 생각하는 의사가 진짜 의사입니다.

왜 어떤 병원에 환자가 더 많이 가고,

어떤 병원에는 환자들이 안 가려고 하는지...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환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아파하는 의사의 마음은 분명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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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의 직분은 피의자를 기소하고 교도소에 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검사라면 흔히 사람들을 그냥 다 죄인 취급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기 쉽습니다.

 

그러나 피의자나 피고의 처지를 딱하게 생각하고 도와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따뜻한 검사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따뜻한 검사라면 그의 직무 수행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판사들 중에도 그렇게 피고의 처지를 헤아려주고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노력하는 판사들도 있습니다.

그냥 법대로 판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판사라면 그의 판결을 신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검사든 판사든 범죄자를 처벌하는 직분이지만,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그 마음은 분명 예수님을 닮은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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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매달려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우리와 함께, 또는 우리 대신에 고통을 짊어지신 모습입니다.

 

바로 그 모습은 우리가 슬퍼할 때 함께 슬퍼하고,

우리가 고통스러워할 때 함께 고통을 겪으시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마음놓고 울 수 있고,

하소연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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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사랑이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적당히 한 발쯤 떨어져서

무슨 큰 선심이나 쓰는 것 같은 태도는 참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을 위로할 때, 온갖 미사여구로 위로의 말을 하거나,

어디서 주워들은 철학 이론, 심리학 이론, 그리고 성경 구절까지 동원해서...

뭔가 심오한 진리를 깨달은 척 이야기를 하거나,

인생 철학의 정답 같은 말만 하거나...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제가 고통 속에 있었을 때, 저는 그런 말을 듣는 것이 더 힘들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제가 문병객들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지금 신부님의 병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셔서 주신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이 병고는 큰 은총입니다."

라는 말.... 사실 저는 그 말이 지겨웠습니다. (신부가 이런 말을 해도 되려나?)

 

그러면서 많이 반성했습니다.

신부로서 고통 중에 있는 신자들에게 나도 그런 식으로 다가갔었구나, 라고.

 

'고통이 곧 은총'이라는 말은 당사자가 스스로 깨닫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다짐했습니다.

앞으로는 환자들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겠다고.

'이 병을 십자가로 알고 받아들이고, 참고 견디고... 어쩌고 저쩌고...'

라는 말, 겉으로만 그럴듯한 말은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환자 신세가 된 후에 생각해보니,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주실 때 그런 식으로 말씀하신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냥 한 동작, 한 말씀으로 병을 고쳐주셨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병자에게 '그 병은 은총이니라.' 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진짜 모습은,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렸던 그 모습일 것입니다.

라자로를 살려내신 것은 그 다음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고,

우리의 모든 고통을 함께 겪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그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 곧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사랑의 상징입니다.

모든 것을 함께 하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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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한다는 것은

내가 가진 것 중의 여분을 나눠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것을 그냥 다 주는 것입니다.

 

문병가서 병자 옆에서 함께 아파하는 척 슬픈 표정을 짓는 것?

어디서 주워들은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말도 안되는 신학 이론을 말하는 것?

그럴듯한 인생 철학?

그다지 간절하게 느껴지지도 않는 기도를 길게 하는 것?

그런 거짓 사랑 말고...

 

그 병자 때문에 너무 마음이 아파서 자신도 병이 날 것 같은 그런 마음이 진짜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모든 것을 함께 하신 사랑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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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Fr.송영진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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