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가톨릭

[스크랩] 진복팔단 팔복성당에서 초대합니다.

도구 Ludovicus 2008. 8. 14. 23:50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제가 아버지처럼 존경하는 이현주 목사님

제가 형님처럼 존경하는 김민해 목사님을 모시고 

소박하지만 행복한 저희 팔복성당에서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17일 주일 미사를 끝으로

참으로 많이 울었던,

그래서 행복했던 팔복성당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현주 목사님께서 저희 성당에서 드림예배를 드리고자 하셨는데 

기회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형님을 모시고 

더불어 드림을 실천하는 분들을 모시고

저희 성당식구들과 함께 자리를 마련할까 합니다. 

 

요즘 이별연습을 합니다. 

오늘 미사 끝에

임쓰신 가시관 노래를 부르며 

누룩누룩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신자들에게 미안해서

눈물도 닦지 못하고 

눈물이 마를 때까지...,

 

그동안 저희 성당과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신

이현주 목사님과 김민해 목사님 그리고 많은 분들에게 

기도의 빚을 갚고자 합니다.

 

오늘 개 40근 짜리 예약을 했습니다. 

닭도 준비할 것입니다. 

물론 막걸리와 맥주, 소주

아니 미사주도 준비하겠습니다.  

 

가슴 가득 설렘과 사랑만 품고 오시면 됩니다. 

 

드림 예배 일정

 

일시: 10일(주일) 오후 2시   

장소: 팔복성당

 

오시는 길

 

저희 성당 전화번호: 063-211-8043

제 손전화: 011-674-0814

전화로 문의하시고요.

 

대중교통과 택시를 이용하실 분은

팔복동 지구대(파출소) 옆

미성공업사 골목으로 200미터 들어오시면 됩니다.

터미널에서 3-4천원 요금이 나옵니다.   

 

오전 10시에 저희 성당 미사가 있고요.

11시 30분 정도부터 오병이어 점심나눔을 합니다.

미사도 하시고 점심도 함께 하실 수 있겠습니다.   

 

설레임으로

최종수 신부 올림

 

기사쓰는 '기자신부'..."촛불집회 전국중계 큰 보람"

[집중 인터뷰]전주 팔복성당 최종수 주임신부
2008년 07월 14일 (월) 11:38:32 유철미 기자 ycm1202@naver.com

‘추부길 목사님께 보내는 사탄신부의 글’이란 서신 형식의 글로도 유명한 최종수 신부(전주교구)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기사 쓰는 기자신부라고 칭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그는 또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서 활동하고 있다. 인터뷰 하기가 쉬울 것 같지 않았다. 전주 팔복성당에 전화를 했더니 직접 통화하는 게 나을 거라며 성당 관계자가 휴대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역시 휴대폰이 좋긴 좋다. 핫라인을 통해 바로 인터뷰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들은 이야기지만,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라 얼떨결에 인터뷰를 승낙했다고 한다. 성당에서 만날 수 있을까 했는데 선뜻 사제관(집)으로 초대하였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후 바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 '정치참여는 보다 구체적인 기도'라고 역설하는 팔복성당 최종수 신부

"저에게 정치참여는 보다 구체적인 기도입니다" 

앉자마자 이런 질문부터 시작해서 좀 그런데요. 신부님도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적극적으로 사회 문제에 참여하고 계시잖아요. 종교인의 정치 참여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적지 않은 비판의 목소리가 있어서요.

▲강론 때 왜 정치 문제를 얘기 하느냐고 불만을 표현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어요. 그런데 저는 신부는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2008년이 됐죠. 그동안 수십억명의 신부들 그리고 수조명의 신자들이 이 땅에 하늘나라를 만들기 위해 애써 왔는데 하늘나라는 오지 않았죠. 정치하면 국회에서 싸움하는 정치를 생각하시는데 그게 아닙니다.

정치는 보다 효과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길이란 이야기죠. 우리나라는 대의 민주주의 나라 아닙니까?  그런데 그 대의 민주주의란 것이 소수(상위) 10%의 얘기만 하고 있거든요. 흔히 이 정부가 이야기 하는 ‘민영화는 곧 선진화’란 공식이 바로 이런 현상입니다. 

소년소녀 가장에게 매월 얼마씩 후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가가 세금을 잘 거두어서 소년소녀 가장을 위한 복지정책을 잘 수립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거죠. 국민들이 국가에 무엇을 요구한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 내가 바라고 믿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행함'이 바로 정치지요. 저는 소박하고 진솔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 줄 아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서 정치를 하는 거고요. 그래서 저는 ‘정치참여는 보다 구체적인 기도’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정치 혐오증은 도를 넘어선지 오래다. 정치란 단어만 들어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싸움하고 욕하고 헐뜯고 다시 화해하는 척하고.. 하지만 우리나라는 분명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며 모든 국민이 정치참여가 가능한 국가다. 그리고 대의 민주주의 국가기 때문에 정치인도 필요하다 그러나 정치는 정치인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내 바람을 실천에 옮기는 것, 내가 꿈꾸는 사회를 만드는 행동 그게 바로 최종수신부가 말하는 정치다.

"전두환도 국민들이 들고 일어났을 때 결국 뒤로 한 발 물러섰잖아요..."

이번 촛불집회가 정의구현사제단의 참여로 그 성격 또한 많이 달라진 것 같은데요.

▲사실 정의구현사제단이 촛불집회의 추위를 계속해서 보고 있었죠. 그러다가 6월 30일 전격적으로 참여를 선언하게 된 겁니다. 국민들을 위한 버팀목과 방패가 되고자 함이죠. 그리고 비폭력과 평화라는 촛불집회의 기조를 저희가 앞장서서 지키고자 함이고요.

물론 촛불집회가 미국산 쇠고기 파동으로 시작된 것이지만 저희 사제단이 바라는 건 전면 재협상 그리고 대운하와 민영화 반대와 같은 전반적인 문제를 아우르고 있는 겁니다. 결국 논점은 하나죠. 바로 ‘국민을 위한 정부가 되어 달라’는 간절한 요구인 셈이죠.

현 정부를 이야기 할 때 ‘소통의 부재’라는 키워드가 늘 따라 다니는 데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사실 저도 너무 답답합니다. 전두환도 국민들이 들고 일어났을 때 결국 뒤로 한 발 물러섰잖아요. 그런데 현 정부는 21세기를 살면서 눈 막고 귀 막고 있는 거죠. 거기에 조.중.동과 같은 메이저 신문들이 정부의 나팔수 역할을 하며 촛불집회에 대한 물타기나 하고 있으니... ‘원인이 잘못됐으니 고쳐 달라’는 정당한 국민적 요구에 왜 저렇게 소통하지 않으려 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냥 조.중.동 이용해서 현상만 부각 시키는 거죠. 예를 들면 촛불집회가 과격해졌을 때 경찰 피해가 어땠는지만 이야기하지 다친 시민들, 그리고 그 시민들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안 들으려 하는 거죠. 집회 참석한 인원만 해도 그래요. 7월 5일 서울에 4~50만의 시민들이 집회에 참여했거든요. 그런데 경찰은 뭐라고 합니까. 경찰 추산 5만. 이게 말이나 됩니까? 집회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이런 경찰 셈을 보면 황당하죠.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왜곡 하니 어떻게 경찰을 그리고 정부를 믿을 수 있겠어요.

"촛불의 불씨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건 아주 중요하죠"


우리지역도 촛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 되고 있는데요. 어떻게 보세요.

▲서울은 인구 천만이 사는 도시잖아요. 어쩔 수 없는 정치의 중심지고요. 그래서 말도 많고 탈도 많죠. 반면 전주는 그렇지 않죠. 전주는 참 특이해요. 상대적으로 사람들이 많은 것도 아니고, 거친 모습도 없잖아요.

재밌는 건 전주가 가진 전통이라는 문화와 잘 어울어진 놀이마당이 벌어지죠. 전북도립국악원에서 나오셔서 공연하는 모습이 전주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장 중요한 건 각 지역에서도 촛불을 들고 있다는 자체가 중요한 것 같아요. 촛불의 불씨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건 아주 중요하죠.

기사 쓰는 신부로 유명합니다. 언제부터 글을 쓰게 되셨나요?

▲제가 꿈꾸는 세상을 위해서 현장에서 주로 뛰다 보면 한계가 많더라고요. 예를 들어 새만금에서 집회를 열어도 중앙 언론에서 조명해주지 않으면 그냥 울림 없는 메아리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얼 하든 관심이 중요한 거니까요. 그래서 직접 기사를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글 쓴지 4년 정도 된 것 같네요.

#참고로 최종수 신부는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사랑수’와 '아세만세'는 최종수 신부의 다른 필명이다.

"지금 성당은 노동자의 집을 개조해서 만든 겁니다"

사실 신부님의 본업은 사제인데 너무 부업(?)에 관한 이야기가 길었네요.(웃음) 너무 단순한 질문이지만 왜 신부가 되셨나요?

▲흔히 이런 질문에 소명에 관한 이야길 많이 하는데요.. 먼저 어릴 적 에피소드가 좀 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죽을 위기를 겪었죠. 경기를 일으키고 밤새 헛소리에 식은땀을 흘렸죠. 뭐 별다른 방도가 없는 상황에서 어머니가 기도라도 하신다고 새벽에 교회를 가셨어요.

그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형이 제 병간호를 하고 있었는데 제가 경기를 일으키는 게 너무 무서워서 방구석에서 덜덜 떨었다지요. 물론 저도 들은 이야기지만요.(웃음) 새벽 5시가 다 돼서 어머니가 기도를 마치고 들어오셨어요. 이미 새벽 4시에 종을 쳤는데 밤새 사경을 헤매던 제가 창으로 기어가 새벽예배 종소리 울린다며 교회에 가자고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사건으로 교회엘 나가게 됐고 나중에 카톨릭에서 영세를 받고 사제가 돼야겠다는 확신이 내 안에 생긴 거죠.

   
▲ 가난한 사람들만 생각하면 눈물 먼저 흐르는 최종수 신부는 '울보 사제'다

그럼 어떻게 팔복동 주임신부님을 맡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성당을 개척한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캐나다 교포사목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4년 전이죠. 2004년 8월 말에 전주 공단지역 팔복동 신설본당에 부임하게 되었죠. 이제 곧 만 4년이 돼 가네요.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참담했죠.

사람 키만큼 자란 잡초가 무성했거든요. 그거 전부 우리 신자들과 다 베었어요. 신자 중에 한 분이 ‘호랑이가 새끼치고 나와도 모르겠다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웃음)


잡초 사이에 조립식으로 된 노동자의 집이 있었는데 녹슬고.. 오랫동안 비어 있던 곳이어서 안은 쓰레기 더미고.. 폐가였죠.. 참 막막하더라고요. 지금 본당이 그 노동자의 집을 개조해서 만든 겁니다.


이 곳 팔복동에 공장들이 많잖아요. 사실 잘 사는 곳은 아니죠. 수년간 조금 산다는 사람들은 전부 다른 지역으로 떠났으니까요. 제가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쌀이 없어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 병자 방문을 갔는데 칠(팔)십 노인 부부가 연료가 없어 전기장판에서 지내는 걸 보고........

#갑자기 최종수 신부의 목소리가 떨린다.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떨구기 시작한다.

『“아버님, 사제가 누구예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는 사람, 하느님의 정의를 보여주는 사람이 아닙니까? 지금 쌀이 없는 사람들, 굶는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는 일을 하고 싶은데, 일자리 없는 사람들, 연료 없어 냉방에서 지내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제가 그들에게 하느님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요. 쌀을, 기름을 넣어주면서 일자리를 찾아주면서 그들에게 하느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들에겐 기름이 하느님이고 쌀이 하느님이 아닐까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가 ‘당신은 이 세상에 살 때 냉방에서 지냈으니까, 끼니는 굶었으니까 죽어 거지 나자로처럼 아브라함의 품에, 하느님의 품에 안겨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하고 저 세상에 가면 다 바뀐다는 희망만으로 위로할 수는 없잖아요.” [공동선(Common Good)통권 61호(2005-03-11) 발췌] 』

#그렇게 한참을 울었나 보다.

"아직 세상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너무 많아...제가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원래 눈물이 많아요. 저한테 울보 사제라고들 해요.(미소) 가난한 사람, 외로운 사람들 생각만 하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납니다. 4년간 팔복동에서 사제로 살면서 참 눈물을 많이 흘렸던 것 같아요. 제 좌우명이 루카복음 4장 18절 말씀인데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자를 자유케 하고’함께 잘사는 사회 하느님이 보시기 좋은 사회,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사회를 항상 꿈꾸죠.

갑자기 우셔서 당황했습니다. 저도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네요.(웃음) 팔복성당의 주임신부로서, 또 함께 잘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신부기자로서 어떤 계획들을 가지고 계신가요?

▲팔복성당 꾸려나가랴 매일 촛불집회 참석해서 기사쓰느랴. 너무 힘들었어요. 특히 대운하 반대 100일 순례를 마치고 6월 말까지 거의 한 달간을 매일 밤을 새다 시피 했어요. 취재하고, 기사 쓰고 송고하고 나면 새벽 3시 넘어서 잠들고 그랬죠. 그랬더니 보름 전인가 혈압이 150까지 올라가서 위험했죠.

제가 원래 저혈압인데 혈압이 그렇게까지 올라가니깐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응급차를 불러서 큰 위기는 모면했습니다. 아직 세상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벌써 하느님 곁으로 가기엔 제가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웃음) 이제 조금 몸을 추스릴까 생각하고 있어요.

<취재 뒷얘기>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4년동안 활동안 부지런한 신부기자

종교인이 정치에 참여한다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최 신부는 인터뷰를 통해 정치란 늘 한 자리, 좋은 자리를 위한 정치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해 주기 위해 무척 노력했다. 최 신부가 살아 온 모토인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다.

오마이뉴스는 시민기자로서 수 십 편의 기사를 올린 최 신부는 벌써 기사를 쓴지 4년 정도 됐다고 한다. 이 기간동안 약 180만 원정도 고료를 받은 것 같다고 웃으면서 말한다.

   
'신부들의 인생은 150원인생이'라며 웃음을 지어 보이는 최종수 신부.

1시간이 조금 넘게 진행된 인터뷰를 마치고 팔복성당으로 향했다. 최종수 신부를 만나기 위해 팔복동의 미로 같은 골목을 헤매야 했던 것처럼 이리 저리 성당을 찾아 움직였다. 노동자 쉽터로 사용 했었던 조립식 건물 안에 본당을 마련해 놓고 컨테이너 박스를 몇 개 붙인 사무실이 한 눈에 들어 왔다.

고딕풍의 으리으리한 성당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자신 있게 팔복성당을 소개하는 최종수 신부의 모습에선 기쁨이 넘쳐 보였다. 팔복성당에 대한 깊은 애정을 엿 볼 수 있었다. 얼마나 계실 건지 물어 보니 만 4년을 채웠기 때문에 새로운 곳으로 발령을 받을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는 신부들의 인생은 ‘150원 인생’이라고 한다. 150원짜리 우표가 붙은 발령통지가 어디로 가야할지 정해주기 때문이란다. 요즘 우표값이 280원으로 올라서 신부님들 몸값이 조금 올랐다는 농담에 요즘은 전자 메일로 발송한다는 농으로 받아친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더불어 사는 삶. 150억을 가진 사람도 해내기 버거운 그 일은 오늘도 150원 짜리 인생을 살고 있는 최종수 신부는 꿈꾸고 있었다. 

 / 유철미 기자

출처 : 主式會社 드림
글쓴이 : sarangsu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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