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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티칸 시국의 탄생

도구 Ludovicus 2008. 6. 28. 10:15

바티칸 市國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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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6월 7일 오전 이탈리아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앞 광장.
 
무솔리니 이탈리아 총리가 사절단을 이끌고 바티칸으로 들어서자
몰려있던 군중들은 환호했다.
무솔리니는 곧장 가스파리 추기경을 만나 라테란 조약 비준서를 교환했다.
바티칸시가 독립국가인 바티칸 시국(市國)으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뉴욕타임스에 실린 기사.
 
'비준서가 교환되자 교황청의 스위스 근위대는 이탈리아로부터 넘겨받은
영토를 향해 행진했다.
굳게 닫혀 있었던 바티칸의 한쪽 성문도 활짝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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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의 한쪽 성문은 이탈리아 왕국이 로마를 강제로 합병하고
교황권을 박탈한 1870년부터 굳게 닫혀 있었다.
이른바 '로마문제'의 시작이었다.
세속적 국가인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하느님의 지배를 받는 교황(領)
의 정신적 수도 '로마'의 충돌이었다.
 
라테란 궁전에서 양측이 조약에 서명한 것은 이보다 4개월 앞선 2월 11일.
로마 교황청은 이탈리아를 국가로 승인하고, 이탈리아는
바티칸시에 대한 교황의 절대적 주권과 독립을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조약으로 60년에 걸친 '로마문제'는 해결됐다.
 
교황청의 정치적 지원이 필요한 무솔리니정권과 세계가톨릭교회의 상징으로서
신권(神權)을 회복해야 할 교황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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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비오 11세
 "이탈리아는 하느님께 돌아왔고, 하느님께서도 이탈리아에 돌아오다."
만족감을 표시했다.
 
CIA'월드 팩트북'은 바티칸 시국을 이렇게 소개한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 면적은 0.44km².
 국경 길이는 3.2km. 국가 총 인구는 약 821명으로 추정.'
 
국가로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수치들이다.
그러나 바티칸은 작고, 적기에 더 위대하다.
 
1982년 6월 경. 가톨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바티칸 도서관에서 머리를 맞댔다.
"폴란드에서 공산주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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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 치하 속의 폴란드가 계엄령 선포에 이은 검거선풍으로
잔뜩 얼어붙어 있을 때 였다.
레이건 행정부의 안보담당보좌관 리처드 앨런은 이들 정교(政敎) 수장의
회동을 '인류 역사상 최대의 비밀동맹'이었다고 회고한다.
 
그해 11월, 자유노조 지도자 레흐 바웬사는 감금에서 풀려났고 자유진영의 자금 정보(情報)가 물밀듯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로마교황청은 정치적 의견을 피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추진하고,
 또한 그것을 관철시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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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친 칼 번스타인은 바티칸 교황청이 동유럽의 정
혁명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바티칸 외교'는 새 장을 열었다고 분석했다.
 
시민혁명으로 중세의 절대군주와 귀족계급은 몰락했으나 교회는 여전히 힘을 잃지 않고 세속에 간섭해 왔음을 서구의 근대사는 보여준다.
"프랑스 대혁명"의 그 기나긴 장정(長程)은 교회의 입김을 '세상 밖'으로 몰아내려는 안간힘이었다. 그러나 교회의 날개는 꺾이지 않았다.
 
1989년 공산권 몰락 이후 바티칸 교황청은 이들 지역에 화해의 손길을 내
며 새로운 헤게모니의 세계지도(地圖)를 그려왔다.
사회주의 이념의 빈자리"종교적 열정"으로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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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한 명의 터키인 청년에게 권총으로 저격을
했다. 하지만, 그는 의식을 되찾자마자 그의 감옥을 손수 찾아갔고 고해성사 와  함께 등을 두드리고 손을 잡아주며 자비로이 청년을 용서해 주었다.
 이 모습은 전 세계의 신문과 TV 및 라디오를 통해 알려졌으며, 그의 행동은 
세계인들에게 진정한 용서와 사랑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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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가톨릭동진(東進)이랄까?
그 선봉에 "세기의 성인"이라 불리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있다.
그는 정치적인 동시에 종교적이고, 세속적이면서 동시에 영적(靈的)인 양면정책으로 세계의 '분리된 형제들'을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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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무솔리니에 의해 바티칸시국(市國)으로 독립했던 로마가톨릭.
바티칸은 지금 '진정한 신성로마제국'으로 다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2000년 바티칸 교황은 지난날 교회가 인류에 저지른 과오에 대해 사죄했다.

용서와 화해를 구하는 교황에게서 이들은 '질투하는 신(神), 여호와'를 보는가?
바티칸의 영향력은 2005년 4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거했을 때도 증명됐다.
교황의 시신을 알현하기 위해 찾아온 조문객만 400만 명. 로마 인구 300만 명보다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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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발터 카스퍼 독일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티칸이 세계 11억 가톨릭 신자'정신적 수도'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는 기적이다. 모든 길은 로마가 아닌 바티칸으로 통했다."
비록 로마에 둘러싸여 있지만 로마 위에 군림한다는 바티칸의 자존심이 읽힌다.

세계 3대 박물관 '바티칸'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영국의 대영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불리는 바티칸 박물관에는 그 명성에 걸맞게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천재들이 만들어낸 세계 최고의 미술 작품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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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삐냐 정원'에 위치하고 있는 솔방울 조각


바티칸 박물관은 16세기 초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그 기초를 다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율리우스 2세는 바티칸을 세계를 아우르는 권위를 갖춘 도시로 만들기 위해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초빙해 뛰어난 미술 작품들을 만들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박물관의 본관은 '피오 클레멘티노미술관', '도서관', '회화관' 등으로 나뉘며, 각실에는 '보르지아실', '라파엘로실', '지도실' 등이 있다. 또한 벽화로 유명한 '시스티나성당', '파오리나성당', '니코로 5세 성당' 등도 박물관의 일부로 여겨지고 있다.


세계의 보물 다 모였네!

박물관에는 수많은 조각품과 회화 등 세계 미술 역사를 수놓은 작품들이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관람하는 만큼 박물관을 빠른 속도로 관람하기는 쉽지 않았다. 쉴 만한 자리도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체력소모 역시 만만치 않았다.

잠시 쉬기 위해 '삐냐 정원'에 나가면 푸른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한 가운데에는 지구본이 있으며 지구본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쿠폴라'의 모습도 볼 수 있다. 특히 솔방울 조각(그림 2) 주변에는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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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베데레 뜰'에 있는 조각상들


'삐냐 정원'을 지나 팔가형 모양의 '벨베데레 뜰'에 가면 수많은 조각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데 '라오콘 군상' '헤르메스' '아폴로' 등이 그것이다. 작품들을 보면 당시 미술이 이미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헤르메스'(그림 4)는 산탄젤로 성 근처에서 발견된 것으로 하드리아 시대의 그리스 청동상을 복사한 것이다. 이 조각은 오랫동안 많은 예술가들에게 사랑을 받아 왔으며, 완벽한 인간의 완벽한 육체적 균형미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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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로 황제의 욕조


원형 전시관(Sala Rotonda)에 들어서면 헤라클라스의 청동상 아테나 등의 작품을 볼 수 있는데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네로의 욕조(그림 5)다. 이 작품은 네로의 궁전에서 가져온 엄청난 큰 욕조로 자주색의 통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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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티칸 박물관에서 바라본 로마시내


'거인' 미켈란젤로의 숨결이 묻어나는 곳!

이밖에도 수많은 미술 작품들이 저마다 위용을 뽐내고 있다. 하나하나 언급하는 것도 기억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최소한 한 가지 정도는 누구나 공통적으로 기억하고도 남을 만하다. 바로 '씨스티나 예배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일 것이다.

길이 40.23m, 폭, 13.41m, 높이 20.73m에 이르는 이 곳 벽과 천장에는 천재의 위대함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이름만 들었던 미켈란젤로의 이 거대한 작품에 관광객들은 모두 넋을 잃고 바라보기만 했다. 인간의 한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었다. 사진촬영이 금지돼 있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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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 내부와 주차장 모습


 

출처 : 진실한 사랑으로
글쓴이 : 올리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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