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오늘의 말씀

[스크랩] 4월 18일 (금요일) 야고보 아저씨의 복음묵상

도구 Ludovicus 2008. 4. 18. 00:30

야고보 아저씨의 복음묵상
4월 18일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4,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지자불혹, 인자불우, 용자불구


  오해나 의심은 도저히 말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의혹이 이는 것은 사람들의 본성인가 봅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들도 의혹을 해명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하여 어떤 사실을 규명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보편타당하다고 믿고 있는 사실을 발표하고 모든 것을 그 공식에 맞추어 정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공리(公理)라든지 정리(定理)가 생기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자신이 있다고 하면서도 정말 자신할 수 있고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또한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 것은 그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데 어찌 그런 확신할 수 있는 일만 있겠습니까?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확신이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불확실성의 시대’(The Age of Uncertainty)는 1975년 미국의 ‘존 K.갈브레이드’(John Kenneth Galbraith) 교수가 그의 저서 표지제목으로 붙여서 유명해진 말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지난 2백 년에 걸친 경제의 변화와 그에 따른 경제사상사를 각각의 시대의 역사와 관련지어 쉽게 다루고 내일에 대한 자기 나름의 전망을 제시한 것이라고 이야기될 수 있습니다. 일찍이 지난날에는 사회경제체제의 지도 원리에서 사람들에게 확신을 줄 수 있는 철학이라는 것이 있고, 그것이 체계성을 갖고 사람들의 판단력을 위한 기준이 되고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그처럼 확신을 갖게 하는 철학이 없어졌다는 데서 불확실성의 시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경제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 현상에는 철학이나 가치관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불신이 확대되고 확신이 없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신을 가져온 사람들을 나무라지만 아무도 확신을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이 없고, 확신을 심어줄 수 있는 것도 우선 불신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데서 많은 문제가 파생되어 나타납니다. 신뢰의 문제는 바로 오랜 동안의 불신이나 확신으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뢰와 확신을 자신만의 의견이나 견해로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견해나 의견만이 옳다고 진실을 왜곡하거나 진실을 그냥 덮어버리거나 눌러 버린다면 우리 사회는 어둠 속에 파묻힐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도 사랑도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살아날 틈을 찾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지자불혹, 인자불우, 용자불구’(子曰 知者不惑, 仁者不憂, 勇者不懼)라는 말이 논의의 자한편에 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지혜 있는 사람은 미혹되지 아니하고, 인한 사람은 걱정하지 아니하고, 용감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말입니다. ‘군자는 낙천적이고 천명을 알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고, 사물을 잘 살피어 판단이 분명하기 때문에 미혹되지 않고, 마음이 안전 되고 공을 위해 바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라고 주석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지혜 있는 사람들은 믿음에 전혀 두려움 없이 믿음을 가지고 진리를 대할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믿지 않을 것이고, 스스로 불신하기 때문에 세상을 바로 보지도 못하고 걱정하고 불안할 것입니다. 바로 미혹하고 망설이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사랑에 대하여 어정쩡하게 머뭇거리고 있는 비겁한 나의 모습입니다. 신앙 안에서도 생명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의 철학에 동조하면서 천명을 따르지도 못하고 천지 만물 안에서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나의 모습입니다. 생각하고 비판 능력이 있다고 자부하면서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헛된 것에 눈을 돌리고 있는 그런 소인배가 바로 내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토마스는 주님께 궁금한 것을 여과 없이 묻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저희보다 먼저 가셔서 저희가 거처할 곳을 마련하신다고 하시지만 저희는 찾아갈 수도 없습니다. 길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토마스가 모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는 사실적인 것을 원하고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 당시에 모든 제자들에게나 사람들에게 정말 애매모호(曖昧模糊)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나 자신을 살펴봅니다. 나는 토마스처럼 솔직하지도 못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하기도 하고, 잘못된 것을 사람들에게 진실인 양 전하기도 하고, 길이며 진리를 벗어나서 살면서도 그 길을 가는체 위장하기도 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길이며 진리이시고, 생명이신 주님을 모독하는 그 일이 악마의 전유물이 아니라 바로 나의 삶이되기도 합니다.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하느님께 갈 수도 없으며, 이 세상에 만들지도 못한다는 것을 아직까지도 확신하지 못하고 사는 자신이 참으로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정말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주님을 미혹하지 않고, 불확실한 앞날을 전혀 걱정하지 않으며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고, 두려움 없이 신앙을 증거 하는 순교자적 신앙과 믿음을 갖게 해 주시기를 간청할 뿐입니다. 미혹하고 불안하고 용기가 없는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순교자와 함께하는 하루-

그는 무서운 눈초리로 배교한 교우들에게 “여러분, 하느님을 배반하고 저주하다니 이 무슨 짓입니까? 당신들도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와 꼭 같습니다. 아! 진실로 육신을 잡아먹으니 슬픈 일입니다.”라고 통곡하였다.

  성 류정률 베드로(103위 성인전)에서


 




- 사랑방 가족 야고보 아저씨 -



출처 : 내가 네 힘이 되어 주겠다
글쓴이 : 오아시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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