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오늘의 말씀

[스크랩] 2008년 3월 11일 사순 제 5주간 화요일

도구 Ludovicus 2008. 3. 11. 07:35

 

 

 

                   

                    2008년 3월 11일 사순 제 5주간 화요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8,21-30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22 그러자 유다인들이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니, 자살하겠다는 말인가?” 하였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24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25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요?”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 26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27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28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29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

 

 

                           인순 가순 백업순(人順 家順 百業順)


   어제는 강의를 끝내고 기차를 타고 집에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많은 시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수업을 한 뒤라서 무척 피곤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그 시간이 참으로 귀하게 느껴져서 책도 보고, 기도도 하고 조금도 쉬지 않고 무언가를 했습니다. 그런데 한 5년 전부터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에 빠져 듭니다. 묵주기도를  하면 그래도 잠이 들지 않아서 한 시간 반이면 아마 묵주기도를 20단은 바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기껏해야 10단을 바치고 나머지는 기도를 다하지 못하고 졸고 있거나 잠에 빠집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고통의 신비’를 바치기 시작하면 두 단을 다 마치지 못하고 어느 새 잠에 듭니다. 악마가 나를 유혹해서 기도를 못하게 하려고 잠들게 하는지,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잠시라도 쉬게 하시려고 하시는지 수면제를 먹어도 잠이 오지 않는 내게 기차를 타고 고통의 신비를 바치려고만 하면 꼭 잠들게 합니다. 그런데 어제는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젊은 아기 엄마 둘이 차에 탔는데 5개 월 쯤 된 아기를 각각 안고 내 앞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번갈아 가면서 울어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들은 아기들을 달래느라고 정신이 없고,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보다 못한 옆자리의 할머니가 자원을 해서 아주 열심히 달래 주었지만 방법이 없는 모양입니다. 울어대는 아기와 달래는 엄마간의 치열한 방법이 동원되고 있었습니다. 우는 모습이 배가 아픈 것 같았습니다. 계속 설사를 하는지 냄새가 그랬습니다. 기저귀를 연신 갈아주면서 주변 사람들 눈치를 보느라고 더 힘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뒤로 기대면서 우는 아기를 달래는 법을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귀를 간질이면 울음을 멈춘다고 하던데 내 새끼손가락은 그 아이의 귀보다도 더 큰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울음을 참는 방법을 스스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어떻게 달래고 있는지? 화를 삭이고, 가슴을 진정시키고, 스스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울던 아이가 울음을 그치고 흐느끼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엄마의 어깨 너머로 나를 보면서 웃으려고 하다가 다시 우는 그 아이를 보면서 그 아이가 나 때문에 우는 것을 아닌지 또 생각해 보았습니다.

   모든 것을 참고 견디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어떤 때는 자기 자신을 달래지 못해서 저 아이처럼 흐느끼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 내가 울고 있는 저 아이를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안타까워하실 주님의 눈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조건 참는 것만은 능사가 아닐 것이지만 평생을 그렇게 살아서 가슴에 묻고, 참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는 자신이 더 초라해 보였습니다. 불같이 화내고, 완전히 스트레스를 날려 버렸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크고 작은 스트레스들이 나를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중국 음식점에서 본 글이 생각납니다. ‘인순, 가순, 백업순’(人順 家順 百業順)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하늘의 도리에 따르고, 가정이 또한 순리에 따르며, 모든 일 또한 순리에 따라 해야 한다.>라는 말일 것입니다. 모든 일이 억지로 되어서 되는 일이 아니고, 하늘의 도리에 거스르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겸손하면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의 뜻에 의탁한다면 그 것이 곧 순리에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울고 있는 아이를 억지로 달랠 수 없고, 안 되는 일을 억지로 한다고 잘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같이 터져 나오는 울화를 억지로 잠재우고, 가슴에 묻는다고 잘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감정도 억지로 만들어서 될 일이 아니며, 화사한 웃음도 억지로 지어서 만들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를 달래고, 나를 다듬는 것도 억지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내 마음에 열화처럼 타오르는 분노도 억지로 참고 누른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터져 나오는 기쁨으로 행복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에 웃음이 가득합니다. 죄를 지어 용서를 청하며 주님께서 나를 안아주시는 그 생각만으로도 죄송스러운 마음이 가득해서 눈물을 펑펑 쏟고 있다면, 그 눈물을 어찌 참고 막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은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대로 그렇게 나를 내어 놓고 따를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들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화를 낼 수도 없으신 주님, 답답하신 주님, 가슴 아프신 주님, 누가 주님의 마음을 감히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달랠 수 없는 이 철부지를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내가 감히 어찌 짐작인들 하겠습니까? 내 부모의 마음도 모르고, 자식들의 마음도 모르고, 가족들의 마음도 모르는 이 어리석은 내가 어떻게 주님의 마음을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주님을 거스르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용서하소서. 주님!!!

 

 

                          ~ 이창순 야고보 선생님의 묵상글 ~

 


 

                              -순교자와 함께하는 하루-

 

“너는 하느님을 본 적이 있단 말이나?”

“궁궐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백성이 어떻게 임금님이 계신 줄을 믿을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그들이 자기 눈으로 임금님을 본 다음에 믿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백성이 임금님을 눈으로 보지 못해도 임금님 계신 줄은

압니다. 마찬가지로 창조된 만물을 보면 자연의 어버이이신 하느님이

존재하심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습니다.”

김 루시아(김대건 신부의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중에서)

 

 


   

출처 : 사랑이 머무는 자리
글쓴이 : 요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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