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오늘의 말씀

[스크랩] 2008년 3월 9일 사순 제 5주일

도구 Ludovicus 2008. 3. 9. 16:19

 

 

 

                   

                       2008년 3월 9일 사순 제 5주일 복음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1,1-45<또는 11,3-7.17.20-27.33ㄴ-45>

 

그때에 마리아와 마르타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듣고 이르셨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5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6 그러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 7 예수님께서는 그런 뒤에야 제자들에게, “다시 유다로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17 예수님께서 가서 보시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다.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34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36 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고 말하였다. 37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몇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 주실 수는 없었는가?” 하였다.

 

38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입구에 돌이 놓여 있었다. 39 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였다. 40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41 그러자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42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43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44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어려서 가장 무서웠던 것이 상여(喪輿)집입니다. 상여는 죽은 사람을 장사지낼 때 관을 얹어서 여러 사람들이 가마를 메듯 상여를 메고 운구하는데 쓰는 아주 호화스러운 어깨에 메는 가마입니다. 전에는 꽃상여는 별로 없었고, 단청을 하는 사람들이 용이나 봉황을 조각하여 색칠하고, 큰 연꽃을 조각한 후 아주 멋지게 장식하고, 온갖 매듭이나 수술을 달아 조립하여 상여를 만듭니다. 상여의 네 귀퉁이에 반듯한 대나무를 꽂아 차일을 만들어서 조립을 하면 아주 근사하고 멋진 상여가 됩니다. 상여의 모양은 가마와 비슷하나 약간 더 깁니다.

 

그래야 시신을 모신 관을 길게 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몸채 좌우에는 밀 채가 앞뒤로 길게 뻗어 있어 양쪽 끝에 채 막대를 가로로 대고, 앞채막대 좌우로 2줄씩 끈을 달아 뒤채막대에 붙잡아맨 다음, 중간에 일정한 간격으로 멜 방망이를 좌우로 끼워 사이에 사람이 들어가 끈을 어깨에 메고 운구를 하게 됩니다. 몸채는 단청식으로 여러 가지 채색을 하여서 죽어서야 가마를 타고 호사를 한다고 했습니다. 상여를 메는 사람을 상여꾼·상두꾼·향도군(香徒軍)이라 하며, 대개 천민들이 메는 것이 상례였으나 후에는 동네 청년들이나 망인의 친구들이 메기도 하였습니다. 초등학교 때에는 각 동네에서 상여를 메고 선소리꾼의 구성진 소리에 맞추어 외나무 다리를 건너는 것이나, 높은 언덕을 오르는 것을 경연대회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대개 상여 틀을 분해·조립할 수 있도록 만들며, 옛날에는 마을마다 상여 한 틀을 공동으로 마련하여,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상여집을 짓고 그곳에 보관하였습니다. 그래서 상여집 앞을 지나려면 빨리 뛰어가거나 그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어려서 이모님댁을 가려면 상여집 앞을 지나야 했습니다. 그러면 정말 귀신이 금방 나타나서 나를 잡아갈 것 같아서 무척 무서워했지만 성당에 다니면서 그 두려움이 많이 없어졌고,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상여 뒤를 쫓아가면서 그 상여에 아주 친숙해졌습니다.

 

   그처럼 우리 민족들은 귀신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지금도 공동묘지를 가거나 밤이 되면 무서워합니다. 우리에게는 귀신 숭배 사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헛된 것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귀신 숭배 사상에 젖어 있는 것은 사람의 영혼을 하느님께서 주신 영원한 존재로 알게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에게 믿음으로 고백하는 우리는 그런 귀신숭배 사상에 젖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귀신숭배(鬼神崇拜)


   옛날에는 생명을 마친 후에, 육체는 각종 장의적(葬儀的) 절차에 따라서 없어지지만, 영혼은 육체를 떠나 단독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예기(禮記)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무릇 천지의 사이에 태어나는 자는 모두 이름 지어 명(命)이라 한다. 그 만물로서 죽은 자는 모두 이름 하여 절(折)이라 한다. 사람으로 죽은 자는 귀(鬼)라 한다.]

 

   사람이 죽은 후 영혼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으며, 이 영혼은 사람의 능력을 초월하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영혼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그에 의지하려 하며, 사람의 생활과 사회관계를 환상적 귀신세계에 부가시킴으로써 그에 의탁하여 각종 예배 활동을 하는데 초혼, 상장의식, 조상제사 등이라는 것이다.

 

   중국 고대인들은 영혼의 불사(不死)에 관하여 우선 귀(鬼)의 정체를 여러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고대인들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붙어있는 영혼과 사람이 죽은 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영혼을 구별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붙어있는 영혼은 두 종류가 있는데, 즉 귀(鬼)와 백(魄)이다. 혼(魂)은 사람의 정신에 붙어 있어서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작용을 하고, 백(魄)은 사람의 육체에 붙어 있어서 육체적 활동을 일으키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았다. 이 혼백(魂魄)은 사람이 죽으면 정신과 육체를 떠나는 것이다.

 

  여기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魂)과 백(魄)이 나뉘어지는 것으로 보고 혼백이 가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가족이 지붕 위로 올라가서 하늘을 보고 혼이 돌아오도록 소리쳐 부르고, 그래도 깨어나지 않으면 입 속에 생쌀을 넣고, 입관 시에 익은 고기를 영혼에게 바친 후 체혼(體魂), 즉 육신을 땅에 매장하도록 권하고 있는 것이다.

 

  [예기에서도 혼기(魂氣)는 하늘로 돌아가고, 형백(形魄)은 땅으로 돌아간다.]

  이 관점에서 보면 단지 혼(魂)만이 귀신(鬼神)으로 변하여 죽지 않고, 백(魄)은 육신의 소실에 따라서 소멸된다. 그러면 소멸되지 않는 귀혼(鬼魂)은 사람이 죽으면 어디에서 머물며, 어떻게 생활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겼는데, 고대인들은 당시의 생활에서 그 답을 찾았다. 즉 씨족이 집단으로 생활하던 시기에는 일반적으로 죽은 씨족구성원의 귀혼(鬼魂)은 어둠 속에서 씨족과 함께 생활하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사자(死者)를 씨족이 생활하던 구역 내에 매장했다. 그러나 사회가 계급으로 분열된 뒤에는 귀혼의 세계 역시 계급으로 나뉘어져 어떤 귀혼은 하늘로 올라가 신이 되고, 어떤 귀혼은 음지에서 생활하며, 어떤 귀혼은 세상에서 머물 곳을 찾지 못하여 유랑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창덕 신부의 ‘位格的 天思想의 來愿과 그 含意’ 옮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썩는 냄새를 나는 나자로를 살려 주십니다. 그를 사랑하셨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시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그의 세상 삶을 일시적으로 연장시켜 주시는 소생(蘇生)의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더러운 죄로 썩어가고 있는 저를 나자로와 같이 소생시켜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생명의 주님께서 이 죄인을 사랑하시어 살려 주시고, 뉘우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 이창순 야고보 선생님의 묵상글 ~

 


 

                           -순교자와 함께하는 하루-

 

“너는 궁녀이면서 어찌하여 천주교를 믿느냐?”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무입니다.”

박 루시아(김대건 신부의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중에서)

 

 

 

 



   

출처 : 사랑이 머무는 자리
글쓴이 : 요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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