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오늘의 말씀

[스크랩] 2008년 3월 7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도구 Ludovicus 2008. 3. 7. 08:23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8년 3월 7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제1독서 지혜서 2,1ㄱ.12-22

1 악인들은 옳지 못한 생각으로 저희끼리 이렇게 말한다.
12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13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지녔다고 공언하며, 자신을 주님의 자식이라고 부른다.
14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 15 정녕 그의 삶은 다른 이들과 다르고, 그의 길은 유별나기만 하다. 16 그는 우리를 상스러운 자로 여기고, 우리의 길을 부정한 것인 양 피한다. 의인들의 종말이 행복하다고 큰소리치고, 하느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자랑한다.
17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18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19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21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22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복음 요한 7,1-2.10.25-30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2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가 있는 사제관에는 창문이 여럿 있습니다. 침실에 놓여 있는 창문, 거실에 있는 창문, 또한 창고로 쓰고 있는 방에 놓여 있는 창문. 맞다. 창문이 또 하나 있네요. 화장실과 주방에도 창문이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각각의 창문에서 보이는 광경은 다 다릅니다. 심지어 똑같은 방향에 위치한 창문이라 할지라도 다른 느낌의 풍경을 제게 보여줍니다.

사실 우리 성당은 주변의 건물들 사이에 가려 있어서 멋진 풍경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벽만 보이는 창문보다는 조그맣기는 해도 성당 마당이 보이는 창문이 훨씬 애착도 가고 자주 그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벽만 보이는 창문은 벽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한 번도 열어보지 않게 되네요. 하지만 이 벽만 보이는 창문 역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환기를 위해서는 가끔 열어주어야 하거든요.

이렇게 각각의 창문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각각의 창문이 다른 풍경과 의미를 전해주듯이, 우리 각각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영향들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이는 긍정적인 영향을 줌으로 인해서 하느님을 찬미 찬양할 수 있도록 하는 반면에, 또 어떤 이는 부정적인 영향을 줌으로 인해서 미움과 다툼의 부정적인 마음을 심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의미 있게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변이 다 건물이라 사제관 창문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맘에 드는 창문이 있는 것처럼, 내 능력이 비록 부족할지라도 분명히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스스로 능력 없다면서 쉽게 포기하기에, 벽만 보인다고 절대로 열지 않는 창문처럼, 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이렇게 닫힌 마음으로는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을 알아볼 수가 없는 법입니다. 이천년 전의 이스라엘 사람들 역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요. 그들이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닫혀있는 고정관념 때문이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기 때문에,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라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에 대해서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말하는 예수님은 불경스러운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죽여서 제거해야 할 인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 현명해 보입니까? 그들의 판단과 선택이 과연 올바르게 느껴지십니까?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과 말씀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닫혀있는 고정관념이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닫힌 고정관념은 지금 우리 각자에게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생각으로 하느님의 일보다는 세상의 일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가득한 세상으로 만들지 못하고 미움과 다툼이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많습니다. 스스로 포기하지 마시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십자가의 길’을 바칩시다.



부족함에서 배우다(‘행복한 동행’ 중에서)

첼리스트 정명화가 ‘평생의 스승’이라고 부르는 그레고르 파티고르스키. 러시아에서 태어난 그는 9세에 첼리스트로 데뷔해 15세에 오케스트라 수석단원이 될 정도로 일찍부터 그 재능이 남달랐다. 1925년 푸르트벵글러가 그의 연주를 듣고 베를린 필의 수석으로 기용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바이올린의 하이페츠, 피아노의 루빈슈타인과 함께 트리오로 활동했는데 이들을 사람들은 ‘백만 불의 트리오’라고 칭송했다. 그는 첼리스트 중에 가장 많은 작곡가로부터 곡을 헌정받은 기록을 남기기도 했는데,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대략 25명의 작곡가가 그에게 곡을 헌정했다.

그런 그가 말년을 보내던 때의 일이다. 이 천재적인 음악가에게 음악을 사사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모두 재능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파티고르스키는 특히 한 학생에게 마음을 쏟았다. 파티고르스키는 이 젊은 음악가에게서 넘치는 재능을 읽었지만, 이상하게도 청년의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어느 날, 홀로 연주하고 있는 청년의 연주 소리를 듣게 된 파티고르스키는, 자신이 직접 가르칠 때보다 청년이 홀로 연주할 때의 솜씨가 훨씬 훌륭하다는 걸 알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나와 있을 때는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는데.... 혹, 내 연주에 주눅이 들어오히려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그날 이후, 파티고르스키는 젊은이를 가르칠 때면 일부로 몇 군데씩 틀리게 연주해 빈틈을 보였다. 그러자 젊은이는 용기를 내 틀린 곳을 스스로 찾아내며 자기만의 연주를 하기 시작했고, 곧 숨겨진 제 기량을 발휘해 멋진 첼리스트로 성장했다. 가르치는 자의 완벽함이 때로 걸림돌이 될 수 있듯이, 때론 부족함 속에서 우리는 배울 것을 건질 수 있다.
출처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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