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오늘의 말씀

[스크랩] 2008년 3월 7일 사순 제 4주간 금요일 야고보 선생님의 묵상글

도구 Ludovicus 2008. 3. 7. 18:44

 

 

                   

                      2008년 3월 7일 사순 제 4주간 금요일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7,1-2.10.25-30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2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두자고(懸頭刺股)로 살아야 하겠지요.


   내가 젊은 청년이었을 때 내 고향에 교도소가 생겼습니다. 높은 담장을 쳐 놓고 죄수들이 점점 많아지고 시설이 좋다고, 교도소장은 은근히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천주교 교리 시간이 있어서 가서 봉사하고, 매 주일이 되면 총집교회라고 교화위원들이 강의도 해 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어떤 날 교리를 배우던 청년 하나가 검정고시 공부를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는데 교도소에 와서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검정고시에 좋은 책을 구해서 교도관에게 부탁하고 교도과정에게 다시 부탁하고, 교도 소장에게까지 부탁한 다음에 그 사람을 조금 지도해 준 적이 있습니다. 그가 검정고시에 합격한 날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교도소를 방문했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기쁜 마음으로 그를 격려하고 “참으로 고생했다.”고 그를 위로해 주면서 꼭 안아주었습니다. 제 가슴에 안겨서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습니다. 청바지처럼 보이는 죄수복은 이상한 냄새가 나고, 바짝 마른 그의 박박 밀어 짧은 머리가 내 턱을 찌르고 있었지만 그는 정말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고 아무 말 없이 그냥 바지를 내렸습니다. 허벅지가 까맣게 멍이 들고 검푸르게 문신을 한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그제야 그가 졸음이 몰려올 때 볼펜으로 사정을 두지 않고 허벅다리를 찌르며 일 년 동안 낮에는 징역을 살고, 밤에는 공부를 한 그가 보였습니다. ‘현두자고’(懸頭刺股)란 말이 생각났습니다. 공부를 하는 사람이 졸음을 쫓기 위해서 <머리를 노끈으로 묶어 높이 걸어 매달아 잠을 깨우고, 또 허벅다리를 찔러 잠을 깨운다.>는 뜻으로 학업에 매우 열중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달 현, 머리 두, 찌를 자, 넓적다리 고>라는 글자가 의미하고 있는 것과 같이 정말 그의 허벅다리는 그냥 고운 살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를 붙잡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랑스러웠습니다. 감형이 되어 무기에서 유기로 그리고 또 감형이 되어 세상에 나와 그렇게 살기를 기도했습니다.

 

   그 청년은 내 인생에 있어서 아주 귀한 스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문드러지고 까매진 그의 허벅다리를 생각합니다.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나의 부모님은 큰 기대와 기쁨으로 평생을 고생하시며 돌보고 사랑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사는 모습을 보시고 행복해 하시고, 가슴 아파 하시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의 부모님들도 그렇게 사셨을 것이고, 그가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을 때 얼마나 가슴 아프고 얼마나 마음 조리며, 얼마나 고통스러웠을 것인지 생각해 보면, 그의 그 눈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생각합니다. 그의 고입 검정고시 합격이나 대입 검정고시 합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그 뉘우침과 간절한 소망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나를 이 세상에 내신 부모님과 하느님의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삶으로 허송세월한 자신이 정말 부끄럽기 한이 없습니다. 부모님께서 내게 기대하시는 것은 지금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보다 더 잘사는 것입니다. 무엇이 잘 사는 것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세상을 살았습니다. 어느 때는 내 정체성과 신원을 모르면서 그냥 물결치는 대로 살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 모습이 아닌 아주 파렴치한(破廉恥漢)으로 살고 있어도 사람들은 나를 아주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얼마나 더럽고 치사하며, 엉터리로 살고 있는지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시니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신원(身元)을 가장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당신의 허벅다리를 찌르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생명을 전부 내어 놓으십니다. 당신은 스스로 이 세상에 오셨으면서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맞도록 살기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세상 모든 사람의 간절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음을 수용하십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거나 알고 있는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출신성분을 가지고 그 사람을 전부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알고 있는 목수 요셉의 아들로만 예수님을 알고 있다면 그것은 편견이고, 아집이며, 선입견이 가득한 것입니다. 아무도 사람들을 그렇게 볼 수 없고, 판단할 수 없으며, 그렇게 도매금으로 넘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도매금으로 거룩한 사람들의 속에 파묻혀 있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그리고 함부로 말하면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살인을 하였다는 것을 뉘우치고 있답니다. 그리고 자기 합리화로 뻔뻔하게 살았던 삶을 부끄러워하고 있답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만 주님께서 죄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모습을 어여삐 보시기를 소망할 뿐입니다. 주님께서 부족한 저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 이창순 야고보 선생님의 묵상글 ~

 


 

                                -순교자와 함께하는 하루-

 

“우리 천주교에서는 사람을 해치는 것을 엄히 금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입으로 감히 사람을 죽이지 못합니다.”

 권선도 베드로(김대건 신부의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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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천주교인터넷선교단
글쓴이 : 요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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