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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예비신자 교리 교안 (제 1주) 종교가 필요한 우리

도구 Ludovicus 2008. 2. 29. 13:17
1. 세 가지 선택.

사람이 일생에 삶을 크게 변화시키기까지는 세 가지의 선택이 따른다고 합니다. 첫째는 일평생을 같이 살을 맞대며 살아갈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이고, 둘째는 삶의 행로를 밝혀줄 직업을 선택하는 일이며, 셋째는 세계관을 선택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배우자를 잘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한평생 가정생활의 행, 불행을 결정 짖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며, 직업을 잘 선택해야 하는 것은 어떤 직업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나 자신의 사회생활의 성격이 어떻게 변해 가느냐를 가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계관을 잘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내가 가진 세계관이 어떠하냐에 따라 내 자신이 이고 사는 하늘이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태어나서 성인이 되고 나의 독립된 공간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배우자와 직업 못지 않게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세계관입니다. 세계관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 우주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주를 본래 있었던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창조주 하느님의 피조물로 보느냐에 따라서 이 세상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결정하게 됩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동물처럼 막 살 것인가? 아니면 인간 교유의 품위를 지키면서 보람되게 살 것인가는 본인의 행동에 따라 달라지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것을 결정 짖게 하는 노선(路線)을 선택하는 것이 세계관입니다. 그래서 세계관은 인간의 가치관(價値觀)과도 잇닿아 있으며, 또 종교관(宗敎觀)과도 관계를 잇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여러분 인생 일대의 매우 중요한 기로에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지금 신앙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이곳에 오셨지만 이 신앙생활 시작이 누구의 부름에 의해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지를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분명 이웃 사람, 혹은 친지, 지인을 통해서 이곳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난 이 사람의 소개로 왔다 라고 말씀하실 겁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의해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2. 나는 어느 부류에 속하는가?

간혹 종교적인 이야기를 하다 보면 "종교는 사람이 만들어 낸 환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마음이 심약한 사람들이 의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바쁜 세상에 종교가 무슨 소용 있나, 교회에 다닌다고 밥이 나오나 술이 나오나?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솔직히 저도 신앙생활하기 전까지는 배부르고 할 짓 없는 사람들이 거들 먹 거리며 다니는 곳쯤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또 교인들이라 하고서는 나쁜 짓 거리는 찾아가면서 하고 있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에 전 철저히 무신론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자는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일루와 내가 술 먹여 줄게, 누님들이나 열심히 다니쇼, 누님들이 천당가면 그 때 나 데리고 가쇼",라고 핀 찬을 주기도 했었습니다.

그때 제가 가졌던 사고는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인데, 이왕이면 편하고 즐겁게 기쁨을 누리고 사는 것이 장땡"이라는 생각 때문에 틈만 있으면 환락과 희락을 가지려했고 쾌락적인 삶을 더 추구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한평생 온갖 것을 누리고 산다고 하지만, 인간의 종말은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하다가 한 줌의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인생"이기는 잘사는 사람이나 못사는 사람이나 매한가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단순히 생각한다면 애써 온갖 고통과 고난 속에서 노력을 하며, 크게 돈을 벌었다 하더라도 사람이 죽으면 겨우 한 평 반 짜리 땅 속에 묻히긴 매한가지고, 그렇게 벌어도 가지고 갈 것은 하나도 없으니, 이왕이면 인간으로 주어진 것을 죄다 누리며 살다가 죽자는 이야기가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이러한 삶을 살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후회를 하면서 죽어갔습니다.

저는 신앙을 갖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런 방탕했던 삶에서 벗어나 신앙생활을 하게 해주시고, 또 새로운 삶을 열어주신 하느님께 내 자신이 조그만 밀 알이 될 수만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처음 오셨을 때, 잠시 말씀을 드렸지만, 저의 삶 57년 중 신앙생활을 시작한 14년의 삶이 가장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43년의 삶이 보 잘 것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43년의 삶은 지금 저의 삶보다 더 풍요로웠고 재미있었고 즐거웠던 시절이었으며,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재산의 10배는 훨씬 웃도는 상류의 생활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활 중에 많은 분들의 죽음을 보아왔습니다. 살아생전 그렇게 잘 나가는 생활이었지만 마지막의 그들은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좀 더 살고 싶어서, 삶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동안 삶의 가치관을 올바르게 가지지 못했던 점에 대해 후회를 하면서 다시 태어난다면 정말 멋진 생을 만들겠노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면적의 밭을 가진 농부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농사를 짓느냐에 따라서 수확하는 양은 분명 다를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믿느냐, 안 믿느냐", 또 "무엇을 어떻게 믿느냐"의 선택에 따라 삶의 질은 가름됩니다.

종교 또는 신앙을 바라보는 관점과 수준은 같은 땅덩어리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살면서도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듯이 저마다 바라보는 관점은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경험으로 여러분은 이곳에 잘 오셨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신앙을 어느 정도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오실 수 있었고, 조금만 마음의 문이 열린 가운데 하느님과 예수님을 생각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은총을 수두룩하게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부르심에 응하지 않으면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저와 같이 스스로 찾아오게끔 만든다는 것도 여러분은 신앙생활 중에 잊지 마시고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하느님을 찾는 인간. 인간을 찾는 하느님.
※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느님을 찾는다.
※ 인간은 절대자를 갈망한다.

사람은 다급할 때, 자신의 이상과 상관없이 무의식중에 "하느님 맙소사", "아이고 하느님" 또는 "하느님 아버지"라고 하면서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의가 보루 되면 여지없이 "하느님 무서운 줄 알아라", "하느님이 노할 일이다."
"하늘만이 아실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하게됩니다.
인간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식이 다급하면 부모를 먼저 찾는 것과 같이 무의식중에 자신을 창조 시켜준 하느님에 대한 의지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부단히 무언가를 추구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은 보다 많은 금전을 소유하여 권력도 가지고 싶어하고 명예를 가지고 싶어하며, 어떤 사람은 열정적인 애정을 나누며 자신을 불태우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현세적이며, 지상적인 그 어떤 것을 찾아 누릴지라도 만족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 채워진 마음 속에는 이보다 더한 근원적인 것에 대한 또 다른 그리움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만족을 찾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무한히 바르고(眞) 착하고(善) 아름다운(美) 삶을 영원히 누리고 싶어하는 본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삶의 모든 것에서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을 자신 모르는 곳에 품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최고의 진선미(眞善美)이신 절대자 하느님을 갈망하게 됩니다.

인간이 하느님께 대한 이러한 갈망을 가지는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나는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하느님만이 나의 이런 갈망을 채워줄 수 있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가톨릭 교리서 45항)

그래서 교회는 "인간은 하느님을 찾는다. ... 인간은 자신을 존재하도록 부르시는 분께 대한 갈망을 간직하고 있다."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가톨릭 교리서 2566항)



4. 인간은 종교가 필요하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스스로 종교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식할 때가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종교만이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는 의식주라던가 교통수단 같은 물질적인 문제는 "과학기술 개발"로 해결할 수 있고, 희로애락과 같은 정서와 감정에 관한 문제는 "수양"으로 해결할 수 있으며, 교양이나 생활정보에 관련된 지식의 문제는 "학습(學習)"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생(生)사(死)존(存)망(亡)과 같은 인간의 한계를 "무한히 초월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고서는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항상 삶의 극한 상황이나 절망 속에 빠졌을 때, 이 늪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최후의 희망 수단으로 종교에 의지해 왔습니다.
종교는 이처럼 문제 해결 면에서도 필요할 뿐만 아니라 관계(關係)의 측면에서도 우리들 생활 안으로 필요해 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와 자녀를 결합시키는 따스한 도덕적 관계를 효심(孝心)으로 설명합니다. 이와 같이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피조물인 인간을 결합시키는 가장 아름다운 은애(恩愛)의 관계를 종교심(宗敎心)으로 설명하며, 종교라는 단어 자체는 종교라는 말뜻 그대로 근본(宗)에 대한 가르침(敎), 또는 근본(宗)이 되는 가르침(敎)을 가리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관계는 "세계와의 관계"와 "동료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절대자이신 하느님과의 관계"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습니다. 또 이렇게 볼 때, 종교는 관계에 대한 근본에 대한 가르침 도는 관계에 있어서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라고 알 수 있게 됨으로 당연히 종교심은 "관계의 근본을 지향하는 마음"이라고 풀이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인간은 그 본성으로나 소명으로나 종교적인 존재이다. 하느님에게서 와서 하느님께 돌아가는 인간은 오직 하느님과 맺는 관계 안에서 자유로이 살아갈 때에만 그 삶이 충만해진다."(가톨릭 교리서 44항)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5. 하느님도 사람을 찾고 있다.
※ 부르시는 하느님.

인간이 살아가면서 절대자의 필요를 느끼고 절대자이신 하느님을 찾는 것과 같이 하느님께서도 인간을 찾고 계시며, 하느님이 인간을 찾을 때는 직접 계시를 통해서도 부르시지만 지금 여러분이 이곳에 오심과 같이 이웃을 통해서, 친지를 통해서, 또는 기인을 통해서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구약성서 창세기 12장 1-2절을 읽어보면 하느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난데없는 부르심에 응답한 아브라함은 마침내 모든 민족들을 위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십계" 영화 보셨죠? 모세는 불붙은 떨기에서 드려오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됩니다.
"모세야, 모세야."(출애 3,4.) 모세도 이 음성에 응답하여 하느님의 주도 하에 이집트로 들어가 그곳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해서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대업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아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 너희 먹을 것이 없는 자들아, 오너라. 돈 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 값없이 물과 젖을 사서 마셔라."(이사 55,1)
이 말씀에는 어떤 조건이 붙어있지 않습니다.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고, 돈 없어 배고파하는 자에게는 돈을 받지 않고 양식을 판매하며, 내게만 오면 어떤 조건도 없이 물과 젖을 먹게 해주시겠다는 극진히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아셔야합니다. 만약 하느님의 부르심에 재빨리 응답하지 않으시면 하느님은 당신이 스시고자 하는 곳에 나를 쓰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도 응답하게 하신다는 것을 앞으로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잊지 마셔야 합니다.



6. 부르시는 하느님께 대한 응답이 신앙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신앙(信仰)행위이자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말은 좀 전에 말한 종교심과는 다릅니다. 종교심은 인간의 한계를 매워가기 위해 절대자이신 하느님 그리게 하는 것이고, 믿음은 절대자이신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행위입니다. 즉, 종교심에서 한 걸음 나아간 것이 신앙심입니다. "종교심"은 일반적으로 "찾아 나서거나", "독백"을 하면서 절대자를 갈구하지만 할 수 있지만, "신앙심" 곧 믿음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으로 불러주신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는 "신앙이란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며, 내어주는 동시에,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는 인간에게 당신 말씀을 통하여 풍요한 빛을 주시는 하느님께 응답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가톨릭 교리서 26항)

여러분은 이 "응답"이라는 의미를 중요하게 받아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오로지 내게 주어진 일들에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가겠다는 확고한 용기와 결심이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신앙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넘치는 사랑으로 마치 친구를 대하시듯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과 사귀시며, 당신과 친교를 이루도록 인간을 부르시고 받아들이신다(계시헌장 2항). 이러한 초대에 합당한 응답이 바로 신앙이다"(가톨릭 교리서 142항)

하느님을 믿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종교심 차원에 머물러 있다면 그의 믿음은 단지 기복(祈福)단계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심은 반드시 영원한 생명을 받는 구원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종교심을 승화의 단계인 신앙심으로 끌어올릴 때, 비로소 우리는 구원의 은총을 얻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7. 자연종교와 계시종교.

종교에는 자연종교(自然宗敎)와 계시종교(啓示宗敎)가 있는데, 자연종교는 출발점이 사람이고, 계시종교의 출발점은 하느님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사람의 종교심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자연종교이고, 하느님의 계시에 의해서 생겨나 사람들에게서 "신앙심"(절대자이신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마음)을 요구하는 것을 계시종교라고 하겠습니다.

자연종교라는 말은 엄격한 의미에서 서양에서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 생겨난 합리주의의 종교를 일컫기 위해 생겨났으며, 여기서는 이성이 납득할 수 있는 자연법칙, 우주의 운행 원리를 가지고 신(神)이라 보고 이 신을 이신(理神)이라 부른 반면 계시종교는 하느님의 계시로부터 생겨난 종교로서 그리스도교는 자연종교와는 다른 계시종교에 속합니다.

계시(啓示)란 하느님이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드러내 보이는 것을 말하며, "자기를 현시 하다"라는 그리스어 "apokalypsis"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사실 어떤 종교도 각각 제나름의 형태로 계시가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특이한 환상적 영상(映像)에 의하여 나타낼 수 있고, 또 지적, 윤리적으로, 그리고 정신적 내면의 소리로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계시는 역사적인 객관적 사건을 통해서 나타난 계시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통해서 당신 자신의 존재와 인류구원 계획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계획과 사랑 그리고 구원과 섭리 등을 드러내셨는데, 이러한 하느님의 계시는 곧바로 사람들에게 이를 그대로 받아드리고 응답하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느님의 요구에 응답을 한 것을 믿음, 곧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8. 하느님께서 이끌어주신다.
※ 하느님께서 먼저 당신을 부르신 것이다.

여러분은 이곳 성당으로 나오게 된 것을 스스로가 원해서 나왔다고 생각하신다면 오산입니다. 여러분은 분명하게 하느님께서 먼저 불러주심에 응해서 오신 것이며, 이 부르심은 누군가의 입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요한 6,44)
이처럼 여러분을 성당으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올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 주실 것입니다. 이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교회는 이에 대해서 확신 있게 증언을 합니다.
"믿음이 있으려면 먼저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도와주셔야 하고, 또한 성령의 내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성령께서는 마음을 움직이시고, 하느님께로 회개시키시며, 마음의 눈을 열어주시고, 진리에 동의하고 믿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을 모든 이에게 베푸신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가톨릭 교리서 153항)

하느님의 영을 우리는 성령(聖靈)이라고 말합니다.
이 성령께서는 여러분이 교리를 배워나가는 과정에서 많은 작용을 하시고 도와주시며, 여러분 안에 믿음이 생기도록 마음과 지혜를 열어주실 것이니, 어색해 하지도 마시고 바오로 사도가 준 다음과 같은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로마 8,15)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를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1고린 12,3)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여러분은 차츰 하느님을 "아버지"와 같은 분으로 체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구원자"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하니 성령의 속삭임을 듣기 위해 마음의 문을 여시고 그동안 잘못된 세계관과 습관을 뜯어고치려는 겸손과 지혜의 마음으로 임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 ┗━ 영원에서 영원으로 ━┓
글쓴이 : 섬돌선교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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