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신자 교리 (제 2주)
눈앞에 열리게될 새로운 세계
1. 안목이 바뀔 것이다.
여러분은 이제부터 교리를 배우면서 믿음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점점 신앙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이고, 저는 여러분들이 그냥 남들 따라 장바구니를 들고 무엇을 살까 목적도 없이 시장에 가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여러분의 주님을 찾을 수 있도록 안내할 것입니다.
믿음의 공부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아주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받으리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을 바로 알아야 하고 믿음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 즉, "믿음을 알 수 있도록 지도해줄 교사"가 필요하지만 우선적으로 여러분 스스로가 믿음을 바로 받아들이려는 "지성적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를 "지성적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일찍 청년시절로 동경으로 유학을 가서 종교학을 전공하면서 자신이 같고 있던 모태신앙(母胎信仰)과 동양 유수의 종교, 이를테면 유불선(儒佛仙)의 사이에서 처절한 갈등을 겪어내고 마침내 자신은 천상 가톹릭 신자임을 선언하고 살았던 구상시인(1919-2004년)은 만년에 자신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 은총에 눈을 뜨니
이제사 비로소
두 이레 강아지만큼
은총에 눈이 뜬다.
이제까지 시들하던 만물 만상이
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고
그렇듯 안타까움과 슬픔이던
나고 죽고 그 덧없음이
모두가 영원한 모습일 뿐이다.
이제야 하늘이 새와 꽃만을
먹이고 입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공으로 기르고 살리심을
눈물로써 감사하노라.
아침이면 해가 동쪽에서 뜨고
저녁이면 해가 서쪽으로 지고
때를 넘기면 배가 고프기는
매한가지지만
출구가 없던 나의 의식(意識)안에
무한한 시공이 열리며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소중 스럽고
모든 것이 아름답다.
(구상.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
누구든지 은총에 눈을 뜨게되면 세상이 이제까지 보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새롭게 보인다는 대단한 고백의 시입니다.
구상시인은 종교에 대한 심한 갈등이후에 이 세상의 하찮은 들꽃 하나도 거룩함이 깃 든 하느님의 피조물로 보이게 되고, 지난날 슬픔과 고통투성이로 보였던 삶의 편린(片鱗)들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축복과 생명이 깃들어 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껏 몸부림치며 고독하게 살아온 줄로만 알았던 자신의 삶에서 드러나지 않게 도움의 손길로 부추겨 왔던 하느님의 동반(同伴)에 눈물로써 감사할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많은 분들이 신앙의 눈을 떠서 자신의 의식 안에 무한한 시공이 열림을 보게 되기를 바라고, 또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고, 새롭게 보이는 것을 하찮게 보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대하며, 생을 아름답게 누리기를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신앙은 하느님의 진리에 동의하는 지성적 행위이다."(신학대전 2-2. 2-9)라고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힘있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교리나 성서의 내용을 듣든지 아니면 읽든지 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동의하는 것부터 믿음의 시작이 이며, 지성적 행위란 것입니다.
지성적 행위에서 안다와 믿는다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안다는 것은 오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보이는 세계에 대해 검증된 지식을 배워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는 이것을 "안다"라고 하는 반면, 믿음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으며 들리지 않아도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신비의 세계에 대한 체험이나 정보, 곧 종교적인 진리를 배워서 수용하게 될 때,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라고 말하지만, 믿음을 어떤 증거나 확증이 없이 무턱대고 믿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2. 믿음의 절정은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만 볼 수 있는 육체적인 눈에 의지하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에 의지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는 "신앙의 은총"은 "마음의 눈"(에페 1,18)을 열어줌으로써 계시와 내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거기에는 하느님의 계획, 신앙의 신비, 신비들의 상호 관계, 계시된 신비의 중심이신 그리스도와 이루는 관계에 대한 이해가 포함된다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3. 관계가 바뀔 것이다.
지성적인 믿음은 거기에서 그쳐서는 안됩니다.
이 믿음은 우리가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의지하는 믿음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과 이루는 긴밀한 일치로 초대"(가톨릭 교회 교리서 54항)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서적 믿음 또는 관계적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미국의 예레미야 덴튼이라는 사람은 월남전에 참전해서 베트남에서 7년이란 세월을 대부분 독방에 갇혀 포로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당시 미군 포로들 중에서 계급이 높은 사람이었는데, 그로 인해 그에게 가해진 고문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허지만 그는 그 고문을 잘 이겨내어서 전쟁이 끝난 후 미국으로 돌아와 엘라배마 주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당시의 회고록을 이야기하였는데, 그는 지옥과 같은 7년의 포로생활을 몇 개의 성경구절로 이겨냈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그를 붙드시고 힘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깊이 묵상함으로써 그 어려운 상황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생각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믿음은 강해집니다.(W.B. 프리엔 "기도")
"하느님이 계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것을 수긍하고 받아드리는 것을 "지성적 믿음"이라고 한다면, 그 하느님의 현존, 사랑, 예수께서 주시는 용서와 평화 등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느끼고 체험하도록 하는 것을 "정서적 믿음"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덴튼이 가졌던 믿음은 가슴으로 믿는 믿음이었으며, 그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 성구가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의탁의 마음을 강화시켰기 때문에 그는 모진 고문을 이겨내고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덴튼의 이 믿음을 우리는 "정서적 믿음"이라고 하며, 정서적 믿음은 교리나 성서를 통해 접한 "계시된 분", 즉 성부의 하느님, 성자의 하느님, 성령의 하느님을 가슴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다가가 의지하며 신뢰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서가 아니라 성서가 증언하는 그분을 믿는 것이요. 전통이 아니라 전통이 전해주는 그분을 믿는 것이며, 교회가 아니라 교회가 선포하는 그분을 믿는 것, 이러한 믿음을 "정서적 믿음"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적 믿음이 자신 안에 형성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을 체험하게 되고 그 사랑을 인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한올도 남기지 않고 내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도 바로 이러한 신앙생활이 될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으면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하셨거나, 하실 일, 또 당신의 선하심을 끝까지 믿게될 뿐 만 아니라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며, 마침내 사랑하게 되고 하느님과 친교를 맺게 됩니다.
"야훼만 믿고 살아라. 땅 위에서 네가 걱정 없이 먹고살리라."(시편 37,3)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4. 삶이 바뀔 것이다.
이 말에 대해서는 저의 신앙생활을 예로 들어서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저의 성격은 엄청 급했습니다. 아직 저의 성격 다 버리지는 못했지만 저는 불의에 대해서는 법보다 주먹이 빨랐습니다. 그리고 집에서도 아이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아이들이 잘못을 인정하기 전에 매질이 앞섰습니다. 물론 그 기에는 사업에 망하고 난 뒤의 겪고 있는 스트레스를 아이들에게 화풀이하는 습관도 배여 있었다고 해야 솔직할 겁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느끼지 못한 체 부모라는 이유로 폭행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지만 얻어맞지 않으려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애들이 어릴 때는 잘못했다고 하지만 성장하면서는 반항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때려도 "날 죽여라" 하고 이빨을 악물면서도 눈물만 흘리지 잘못했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이런 나에게 하느님의 성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애들이 큰일을 벌렸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아빠에게 맞아 죽었구나"하고 생각하면서 제가 집으로 들어서자 매를 들고 제게 왔습니다.
분명 매질을 해야할 제가 "너희들 뭐 잘못했는지 알아? 인정해?"
애들은 처분만 바란다는 식으로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아빠, 너희들에게 엄청 실망했어, 난 너희들이 제일 예쁜 공주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너희들은 망나니라도 보통 망나니가 아니야, 또 이런 일 반복할 꺼야?"
애들은 멍청해져 버렸습니다. 제가 재차 반문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고개를 가로 저으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했지만 제가 "돌아가. 다시는 이러한 일 없기를 바래, 그리고 성장하는 예비숙녀의 모습으로 예쁘게 자라주기를 바란다. 가서 자라" 그러나 애들은 일어나질 못합니다.
저의 신앙생활에서 애들은 저의 변화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혹시 아빠 정신병원에 가야할 정도가 아니냐고 의심할 정도로 변해갔습니다. 그리고 매사 짜증나든 생활이 즐거움으로 변하고 부족한 생활이었지만 가정 안에는 평화가 머물고 웃음이 생겨나다 보니 기쁨이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14세기에 스페인의 한 마을에는 기도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는 수사가 살고 있었습니다. 동료수사들은 이 수사와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수사가 이런 기적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수사는 평소 생활 중에서 극도의 고행을 하며 보속을 한다거나 금식과 금육을 재를 지키면서 묵상에 잠기는 등 빼어난 성덕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료수사들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서 수도원장에게 말씀을 드리고 수도원장은 그 수사를 불러 자초지종 묻게 되었습니다.
"어찌된 건가? 자네가 기도로 기적을 일으키고 있다는 소문이 정말인가?"
수도원장의 질문에 수사는 겸손되게 답을 합니다.
"저도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병든 이 앞에서 "하느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라고 했을 뿐이고,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라는 마음으로 행동했을 뿐인데" 이런 이야기가 돌고 있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수도원장은 그 수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다가 "오! 주님"하시며 성호를 그으시며 수사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이 수사님은 모든 일을 하느님 뜻에 따르는 믿음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W. B. 프리엔 [기도])
이 수사가 보여준 것은 믿음이 의지로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의지적인 믿음이란 말 그대로 기대하고 어떤 결과를 의지로써 굳게 믿는 것을 의지적 믿음이라고 합니다.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 신앙 안에 키워온 어떤 꿈, 좀더 거창하게 표현해서 "비전" 같은 것이 현실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고한 신념, 이것이 바로 의지적인 믿음이며, 이것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고 계획하고 기도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을 굳게 믿는 신념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믿음이 굳건하게 하도록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정서적 믿음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돈독해지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게 되고 가족간에 또 형제간에 생각하는 관점도 달라지게 만들고, 의지적인 믿음은 실현불가능한 일도 하느님 안에서 기적과 같은 일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내게 위대한 소망이 있다면 이 소망을 확증해주는 것이 의지적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미래의 사실들을 현재의 사실들로 느끼는 것이고, 이 믿음을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며, 증거라는 말은 "확신" 혹은 "신념"을 뜻하는 것으로써 하느님과 그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은 하느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처럼 굳게 믿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믿음은 신자의 영혼으로 하여금 미래를 현재처럼 느끼게 해주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방황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힘껏 전진해 나갈 수 있습니다.
혹 이 말씀에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저는 강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믿음을 올바로 이해하면 흔들림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앞으로 여러분도 세상의 셈 법으로 매사를 결정하려고 하지말고 좋은 것 나쁜 것 모두를 하느님께 봉헌해버리고 당신이 바라는 삶을 내가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해 보십시오. 분명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고 모든 매사가 짜증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하느님께서는 주실 것입니다.
눈앞에 열리게될 새로운 세계
1. 안목이 바뀔 것이다.
여러분은 이제부터 교리를 배우면서 믿음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점점 신앙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이고, 저는 여러분들이 그냥 남들 따라 장바구니를 들고 무엇을 살까 목적도 없이 시장에 가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여러분의 주님을 찾을 수 있도록 안내할 것입니다.
믿음의 공부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아주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받으리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을 바로 알아야 하고 믿음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 즉, "믿음을 알 수 있도록 지도해줄 교사"가 필요하지만 우선적으로 여러분 스스로가 믿음을 바로 받아들이려는 "지성적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를 "지성적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일찍 청년시절로 동경으로 유학을 가서 종교학을 전공하면서 자신이 같고 있던 모태신앙(母胎信仰)과 동양 유수의 종교, 이를테면 유불선(儒佛仙)의 사이에서 처절한 갈등을 겪어내고 마침내 자신은 천상 가톹릭 신자임을 선언하고 살았던 구상시인(1919-2004년)은 만년에 자신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 은총에 눈을 뜨니
이제사 비로소
두 이레 강아지만큼
은총에 눈이 뜬다.
이제까지 시들하던 만물 만상이
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고
그렇듯 안타까움과 슬픔이던
나고 죽고 그 덧없음이
모두가 영원한 모습일 뿐이다.
이제야 하늘이 새와 꽃만을
먹이고 입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공으로 기르고 살리심을
눈물로써 감사하노라.
아침이면 해가 동쪽에서 뜨고
저녁이면 해가 서쪽으로 지고
때를 넘기면 배가 고프기는
매한가지지만
출구가 없던 나의 의식(意識)안에
무한한 시공이 열리며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소중 스럽고
모든 것이 아름답다.
(구상.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
누구든지 은총에 눈을 뜨게되면 세상이 이제까지 보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새롭게 보인다는 대단한 고백의 시입니다.
구상시인은 종교에 대한 심한 갈등이후에 이 세상의 하찮은 들꽃 하나도 거룩함이 깃 든 하느님의 피조물로 보이게 되고, 지난날 슬픔과 고통투성이로 보였던 삶의 편린(片鱗)들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축복과 생명이 깃들어 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껏 몸부림치며 고독하게 살아온 줄로만 알았던 자신의 삶에서 드러나지 않게 도움의 손길로 부추겨 왔던 하느님의 동반(同伴)에 눈물로써 감사할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많은 분들이 신앙의 눈을 떠서 자신의 의식 안에 무한한 시공이 열림을 보게 되기를 바라고, 또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고, 새롭게 보이는 것을 하찮게 보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대하며, 생을 아름답게 누리기를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신앙은 하느님의 진리에 동의하는 지성적 행위이다."(신학대전 2-2. 2-9)라고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힘있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교리나 성서의 내용을 듣든지 아니면 읽든지 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동의하는 것부터 믿음의 시작이 이며, 지성적 행위란 것입니다.
지성적 행위에서 안다와 믿는다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안다는 것은 오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보이는 세계에 대해 검증된 지식을 배워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는 이것을 "안다"라고 하는 반면, 믿음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으며 들리지 않아도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신비의 세계에 대한 체험이나 정보, 곧 종교적인 진리를 배워서 수용하게 될 때,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라고 말하지만, 믿음을 어떤 증거나 확증이 없이 무턱대고 믿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2. 믿음의 절정은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만 볼 수 있는 육체적인 눈에 의지하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에 의지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는 "신앙의 은총"은 "마음의 눈"(에페 1,18)을 열어줌으로써 계시와 내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거기에는 하느님의 계획, 신앙의 신비, 신비들의 상호 관계, 계시된 신비의 중심이신 그리스도와 이루는 관계에 대한 이해가 포함된다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3. 관계가 바뀔 것이다.
지성적인 믿음은 거기에서 그쳐서는 안됩니다.
이 믿음은 우리가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의지하는 믿음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과 이루는 긴밀한 일치로 초대"(가톨릭 교회 교리서 54항)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서적 믿음 또는 관계적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미국의 예레미야 덴튼이라는 사람은 월남전에 참전해서 베트남에서 7년이란 세월을 대부분 독방에 갇혀 포로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당시 미군 포로들 중에서 계급이 높은 사람이었는데, 그로 인해 그에게 가해진 고문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허지만 그는 그 고문을 잘 이겨내어서 전쟁이 끝난 후 미국으로 돌아와 엘라배마 주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당시의 회고록을 이야기하였는데, 그는 지옥과 같은 7년의 포로생활을 몇 개의 성경구절로 이겨냈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그를 붙드시고 힘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깊이 묵상함으로써 그 어려운 상황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생각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믿음은 강해집니다.(W.B. 프리엔 "기도")
"하느님이 계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것을 수긍하고 받아드리는 것을 "지성적 믿음"이라고 한다면, 그 하느님의 현존, 사랑, 예수께서 주시는 용서와 평화 등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느끼고 체험하도록 하는 것을 "정서적 믿음"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덴튼이 가졌던 믿음은 가슴으로 믿는 믿음이었으며, 그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 성구가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의탁의 마음을 강화시켰기 때문에 그는 모진 고문을 이겨내고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덴튼의 이 믿음을 우리는 "정서적 믿음"이라고 하며, 정서적 믿음은 교리나 성서를 통해 접한 "계시된 분", 즉 성부의 하느님, 성자의 하느님, 성령의 하느님을 가슴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다가가 의지하며 신뢰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서가 아니라 성서가 증언하는 그분을 믿는 것이요. 전통이 아니라 전통이 전해주는 그분을 믿는 것이며, 교회가 아니라 교회가 선포하는 그분을 믿는 것, 이러한 믿음을 "정서적 믿음"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적 믿음이 자신 안에 형성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을 체험하게 되고 그 사랑을 인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한올도 남기지 않고 내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도 바로 이러한 신앙생활이 될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으면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하셨거나, 하실 일, 또 당신의 선하심을 끝까지 믿게될 뿐 만 아니라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며, 마침내 사랑하게 되고 하느님과 친교를 맺게 됩니다.
"야훼만 믿고 살아라. 땅 위에서 네가 걱정 없이 먹고살리라."(시편 37,3)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4. 삶이 바뀔 것이다.
이 말에 대해서는 저의 신앙생활을 예로 들어서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저의 성격은 엄청 급했습니다. 아직 저의 성격 다 버리지는 못했지만 저는 불의에 대해서는 법보다 주먹이 빨랐습니다. 그리고 집에서도 아이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아이들이 잘못을 인정하기 전에 매질이 앞섰습니다. 물론 그 기에는 사업에 망하고 난 뒤의 겪고 있는 스트레스를 아이들에게 화풀이하는 습관도 배여 있었다고 해야 솔직할 겁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느끼지 못한 체 부모라는 이유로 폭행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지만 얻어맞지 않으려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애들이 어릴 때는 잘못했다고 하지만 성장하면서는 반항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때려도 "날 죽여라" 하고 이빨을 악물면서도 눈물만 흘리지 잘못했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이런 나에게 하느님의 성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애들이 큰일을 벌렸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아빠에게 맞아 죽었구나"하고 생각하면서 제가 집으로 들어서자 매를 들고 제게 왔습니다.
분명 매질을 해야할 제가 "너희들 뭐 잘못했는지 알아? 인정해?"
애들은 처분만 바란다는 식으로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아빠, 너희들에게 엄청 실망했어, 난 너희들이 제일 예쁜 공주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너희들은 망나니라도 보통 망나니가 아니야, 또 이런 일 반복할 꺼야?"
애들은 멍청해져 버렸습니다. 제가 재차 반문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고개를 가로 저으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했지만 제가 "돌아가. 다시는 이러한 일 없기를 바래, 그리고 성장하는 예비숙녀의 모습으로 예쁘게 자라주기를 바란다. 가서 자라" 그러나 애들은 일어나질 못합니다.
저의 신앙생활에서 애들은 저의 변화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혹시 아빠 정신병원에 가야할 정도가 아니냐고 의심할 정도로 변해갔습니다. 그리고 매사 짜증나든 생활이 즐거움으로 변하고 부족한 생활이었지만 가정 안에는 평화가 머물고 웃음이 생겨나다 보니 기쁨이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14세기에 스페인의 한 마을에는 기도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는 수사가 살고 있었습니다. 동료수사들은 이 수사와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수사가 이런 기적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수사는 평소 생활 중에서 극도의 고행을 하며 보속을 한다거나 금식과 금육을 재를 지키면서 묵상에 잠기는 등 빼어난 성덕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료수사들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서 수도원장에게 말씀을 드리고 수도원장은 그 수사를 불러 자초지종 묻게 되었습니다.
"어찌된 건가? 자네가 기도로 기적을 일으키고 있다는 소문이 정말인가?"
수도원장의 질문에 수사는 겸손되게 답을 합니다.
"저도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병든 이 앞에서 "하느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라고 했을 뿐이고,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라는 마음으로 행동했을 뿐인데" 이런 이야기가 돌고 있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수도원장은 그 수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다가 "오! 주님"하시며 성호를 그으시며 수사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이 수사님은 모든 일을 하느님 뜻에 따르는 믿음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W. B. 프리엔 [기도])
이 수사가 보여준 것은 믿음이 의지로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의지적인 믿음이란 말 그대로 기대하고 어떤 결과를 의지로써 굳게 믿는 것을 의지적 믿음이라고 합니다.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 신앙 안에 키워온 어떤 꿈, 좀더 거창하게 표현해서 "비전" 같은 것이 현실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고한 신념, 이것이 바로 의지적인 믿음이며, 이것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고 계획하고 기도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을 굳게 믿는 신념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믿음이 굳건하게 하도록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정서적 믿음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돈독해지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게 되고 가족간에 또 형제간에 생각하는 관점도 달라지게 만들고, 의지적인 믿음은 실현불가능한 일도 하느님 안에서 기적과 같은 일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내게 위대한 소망이 있다면 이 소망을 확증해주는 것이 의지적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미래의 사실들을 현재의 사실들로 느끼는 것이고, 이 믿음을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며, 증거라는 말은 "확신" 혹은 "신념"을 뜻하는 것으로써 하느님과 그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은 하느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처럼 굳게 믿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믿음은 신자의 영혼으로 하여금 미래를 현재처럼 느끼게 해주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방황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힘껏 전진해 나갈 수 있습니다.
혹 이 말씀에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저는 강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믿음을 올바로 이해하면 흔들림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앞으로 여러분도 세상의 셈 법으로 매사를 결정하려고 하지말고 좋은 것 나쁜 것 모두를 하느님께 봉헌해버리고 당신이 바라는 삶을 내가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해 보십시오. 분명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고 모든 매사가 짜증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하느님께서는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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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섬돌선교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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