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유와 애정으로 가득찬 마음
지금까지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이 우리에 대한 자비로 가득 차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성서의 여러 대목에서 강조하고 있는 하느님의 마음의 자비를 통해 우리는 그분의 자비가 인간의 불행,
특히 인간의 죄 앞에서 느끼시는 그분의 신비스러운 고통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아담을 만나기 위하여 초조한 마음으로 에덴동산을 헤매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얼마 후 하느님의 마음은 인간들의 사악한 죄 때문에 깊은 상처를 받으십니다.
성서는 "너희 죄악 앞에서 내 간장이 녹는다." 라는 표현을 자주 되풀이하며,
히브리어로 어머니의 마음을 가리키는 라하민(rahamin)이라는 말과 병행하여 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호세아를 통하여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호세 11,8).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와 이사야도 같은 표현을 사용하십니다(예레 31,20. 이사 49,15).
인간의 불성실 앞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내에게 배반당한 남편으로 등장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무엇보다 겸손과 자비입니다(미가 6,8).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이 명하는 제사보다 자비의 실천을 더 기뻐하신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해
예언자들의 말씀을 기꺼이 인용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 극도에 이르렀을 때 깊이 상처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드러내 보이시고
인류를 위해 피 흘리시는 당신 마음의 고통을 밝혀 보여주셨습니다.
사랑의 신비인 그리스도의 마음
하느님의 이 신비스럽고 무한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마음 안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신비에 들어가려면 사도 바오로처럼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하느님 사랑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을 수 있는"*(에페 3,18) 힘을 구해야 할 것
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섬세한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 안에서 극도로 여리게 됩니다.
우리의 불행과 죄로 하느님의 민감하고 여린 마음은 아프시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 가득한 마음이
당하는 이 아픔을 복음서의 여러 대목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마르 1,41)와 나인의 과부의 외아들의 죽음(루카 7,13)과 같은 인간의 좌절과
슬픔 앞에서 '측은한 마음'이 드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목자 없는 양들처럼 버려지고 굶주림에 허덕이
는 군중을 보시고(마태 9,36; 14,14;15,32) 불쌍한 마음이 드셨습니다.
복음사가들은 그러한 사랑의 길과 끝없는 자비는 오로지 주님께만 속하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스어의 특별한 낱말[(splagkhna):심장, 동정심]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위에서 말한 대로, 여러 측면에서 죄 앞에서 더욱 민감하셨습니다.
특히 믿음이 없는 자들 앞에서 그러하셨습니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 하고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마르 9,19).
악령에 사로잡힌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라고 간청했습니다.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9,23)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마태오복음 23장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을 책망하시는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을
들어봅시다. "너희 위선자 … 회칠한 무덤!"
이 말씀을 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울분을 참지 못하시고 예루살렘을 보시고 탄식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마태 23,37).
성자께서는 사람이 되심으로써 인간의 죄에 가까이 계시고 싶어하셨습니다.
인간의 죄는 주님께 고통이었습니다.
이 고통은 수난 동안 겪으신 육체적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었습니다.
주님 존재의 가장 내면적 부분인 마음은 수난 전에 이미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창으로 찔린 주님의 심장은 그 이전에 겪으신 고통과 찢긴 마음이 구체화된 것일 뿐입
니다. 하느님의 무한하신 온유와 애정이 인간의 무디고 닫힌 마음과 직면할 때 어쩔 수 없이 십자가의
고통으로 표현됩니다.
그렇지만 이 십자가는 구원의 대상인 세상이나 인간의 죄의 결과가 여기에 잎서 우선적 '필요성'입니다.
하느님의 계획 안에 이를 처음으로 계획하신 분은 창조의 맏아들이신 그리스도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엄격함이 곧 온유 곧 부드러움을 이긴다는 말은 환상입니다.
온유는 화해를 알리고 완전히 화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고통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씀 하셨을 때
이 '필요'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을 의미하는 사랑의 신비의 중심에 있습니다.
인간 역사의 자명한 논거들을 송두리째 뒤엎는 이 신비의 중심에 하느님의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 것
입니다. 이 마음은 세상의 시작에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세상 마칠 때도 계십니다.
이는 언젠가 인간의 투쟁을 끝내고 패배를 딛고 일어서기 위해 하느님의 패배가 '필요' 하다는 말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
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8-29).
이 말씀은 온유와 연민이 어느 정도로 그리스도 실존의 본질을 이루는 필요 불가결한 요인인지를 확인
시켜주고 있습니다.
"나는 … 이다"라고 모세에게 하신 계시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당신 존재를 마음과 내면적 사랑의
신비로 정의하신 것입니다. 이 마음의 두 가지 특징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서
자크 드라포르트 신부 지음 / 이창영·바오로 신부 옮김 / 가톨릭출판사 펴냄
* 공동번역 성서임 - [주교회의 성경 :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
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주시기를 빕니다(에페 3,1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