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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중제5주간금요일(100212.금)

도구 Ludovicus 2010. 2. 12. 09:16

<연중 제5주간 금요일>(2010. 2. 12. 금)

 

<에파타!>

 

예수님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병자나 장애자를 고쳐 주시는 다른 이야기와 좀 다릅니다.

한 마디 말씀으로 죽은 사람도 살려내시는 예수님인데도

장애자를 고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동작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보통 이렇게 해석합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장애자이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있는 동작이 필요했다는 것.

그렇다면 예수님이 손가락을 장애자의 두 귀에 넣으신 것은

그가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 고쳐 주겠다, 라는 뜻이 될 것이고,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시는 것도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고쳐 주겠다, 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시는 것은

장애자를 고치는 권능은 하늘에서 오는 것, 즉 하느님의 권능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비로소 ‘에파타!’ 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죽은 사람에게 ‘일어나라!’ 라고 명령하신 것과 같습니다.

치유의 기적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에서 생깁니다.

여러 가지 동작을 하긴 했지만 치유는 말씀으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파도에게, 잠잠해져라, 라고 명령하시면 파도가 잠잠해지고,

바람에게, 고요해져라, 라고 명령하시면 바람이 멈추었습니다.

장애가 있는 몸도 ‘열려라!’ 라는 한 마디 명령으로 치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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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우리 인간들과는 달리, 눈도 하나이고 귀도 하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눈이 두 개라서 볼 것, 못 볼 것을 다 보고,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구분 못하고,

귀도 두 개라서 이쪽 말, 저쪽 말을 다 듣고 헷갈립니다.

물론 인간의 입은 하나인데, 두 귀로 서로 다른 것을 듣기 때문에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오직 한 가지만 보시고, 들으시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은 곧 진리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꼭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귀와 눈도 하나만 만들어주시지 왜 두 개씩 만드셨냐?

그렇게 만든 것은 하느님이지 않느냐?“ 라고.

입력된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로봇으로 살고 싶지 않다면

그런 시비는 걸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와 결정권을 주신 것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복음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주시는 내용은

단순히 장애자를 고쳐주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들어야할 것을 못 듣고, 올바른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하느님 말씀과 진리를 들려주어도 한쪽 귀로만 흘려듣고,

다른 귀로는 세속의 유혹에 귀를 기울이고,

그러면서 하느님의 진리는 말하지 않고 쓸데없는 말만 하는 사람,

‘귀먹고 말 더듬는 이’는 바로 그런 사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파타!’ 라는 명령은 곧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하라는 명령입니다.

 

복음말씀에서도 그 장애자가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냥 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에게 말을 ‘제대로’ 하라는 가르침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말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진실과 진리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의 최초의 범죄는 ‘거짓말’로 시작됩니다.

사탄의 말도 거짓말이었고, 하와가 사탄에게 한 말도 거짓말이었습니다.

사탄은 하와에게 열매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 하느님이 거짓말을 한 것이다,

라고 말하는데, 하와는 사탄의 거짓말은 믿고, 하느님의 말씀은 믿지 않았습니다.

하와는 두 귀로 제각각 다른 소리를 들었고,

그중에서 사탄의 소리를 진리라고 판단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로 한 일이니 하와 자신의 탓입니다.

 

하와가 사탄에게 한 말에도 거짓말이 들어 있습니다.

하와는 하느님께서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 라고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하느님은 따먹지 말라는 말씀은 하셨지만 만지지도 말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짓기 전에 먼저 거짓말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이것은 하와가 제대로 듣지도 않고 제대로 말하지도 않았다는 뜻입니다.

자기 의지로 장애자가 된 것이 아니라면 장애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진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심각한 영혼의 장애이며, 곧 죄입니다.

 

세상에는 정말 말을 잘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쓸 데 없는 말만 하는 사람, 거짓말을 하는 사람,

남을 이롭게 하는 말이 아니라 해롭게 하는 말을 하는 사람...

남의 말은 안 듣고 자기 말만 하고 자기 의견만 고집하는 사람,

반대나 지적이나 비판만 하면서 더 좋은 의견은 내놓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은 전부 다 말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장애자입니다.

들어야 할 진리는 안 듣고 엉뚱한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도 모두 장애자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에파타!’ 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명령이 신체장애자들에게는 ‘열려라!’ 라는 말이 되겠지만

영혼의 장애자들에게는 ‘열어라!’ 라는 명령이 됩니다.

귀를 제대로 열고, 입도 제대로 열어라, 라는 명령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을 하라는 명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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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유신독재 시대 때에 ‘행간을 잘 읽어야 한다.’ 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언론 탄압이 너무 심해서 기자들이 제대로 기사를 쓸 수 없었을 때의 일입니다.

독재자의 사전 검열 때문에 기사를 제대로 쓸 수 없었던 기자들은

기사 속에 숨은 의미들을 담았고, 독자들은 그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사의 행간에 숨어 있는 뜻을 눈치 채는 일이었습니다.

독재자는 국내에서 발행하는 신문과 잡지는 사전 검열을 했지만

외국에서 들어오는 신문과 잡지는 사전 검열을 못하는 대신에 까맣게 먹칠을 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그 당시 방송국에서 ‘백치 아다다’ 라는 소설을 드라마로 만들어서 방송했는데,

그 드라마의 시청률도 높았고, 드라마의 주제가도 크게 인기를 얻었습니다.

당시 국민들은 말을 못하는 서러움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그 당시 말을 할 수 없었던 국민들이 장애자입니까?

아니면 국민들의 입과 귀를 막은 독재자가 장애자입니까?

 

그 시절은 그 시절이고,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 언론의 자유가 백퍼센트 보장되어 있습니까?

가장 자유스러운 공간이라고 하는 인터넷 공간도 백퍼센트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아예 사이트 자체를 차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국민의 귀와 입을 막는 정권은 반드시 망합니다.

 

이제 우리의 교회도 반성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전에 신문과 잡지 등에 칼럼을 쓸 때,

제 글에 대해 태클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은 모두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였습니다.

 

‘순종’이라는 것에 대해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제는, 수도자는, 신자는 하느님과 예수님과 교회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에게 순종하는 것은 무조건 당연한 일인데,

교회와 장상에게 순종하는 것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습니다.

교회와 장상의 명령이 하느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을 때에 한해서,

라는 단서가 붙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와 장상에 대한 순종은 무조건적인 복종은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성인들도 서로 의견이 다르면 다투기도 했습니다.

사도들도 뭔가 잘못하면 서로 비판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베드로 사도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일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때로는 침묵이 곧 공범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와가 사탄의 유혹을 받을 때 아담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공범이 되었습니다.

(아담이 어디 다른 곳에 가 있었다고 생각할 근거가 없습니다.)

 

비판의 기준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비판의 목적은 하느님 나라의 건설입니다.

비판을 위한 비판, 분열을 목적으로 하는 비판은 안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비판이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지금 자기가 하는 말이 자기 혼자만의 생각에서 나온 말인지

정말로 하느님의 뜻과 가르침에 근거해서 하는 말인지,

그것을 날마다 계속 묵상하고 성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에 어떤 본당에서 겪은 일인데,

그 본당이 본당으로 승격되기 전에 공소로 있던 시절에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던 사람이 이런 주장을 하더랍니다.

자기가 성경을 읽어보니 십계명이 아니라 십일계명이더라고.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순진한 할머니들이 무척 혼란스러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 혼자만의 생각을 진리라고 착각하고 퍼뜨리지 말아야 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묵상으로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었다면 말을 해야 합니다.

독재자들은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지 말든지, 라는 태도를 좋아합니다.

‘말없는 다수’가 독재정권을 유지시킵니다.

사탄은 침묵을 지키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중세기 교회의 타락에는 다수의 침묵도 일조를 했습니다.

물론 종교재판이 무서워서 그랬겠지만, 침묵이 교회 타락의 공범인 것은 사실입니다.

 

에파타!

예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제대로 들어라!

들었다면 제대로 말을 해라!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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