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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중제5주간목요일(100211.목)

도구 Ludovicus 2010. 2. 11. 07:53

<연중 제5주간 목요일>(2010. 2. 11. 목)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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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방인 여인이 딸을 고쳐달라고 청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여인은 강아지들도 부스러기는 먹는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딸을 고쳐 주십니다.

 

(마태오복음에는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라고 칭찬하시는 말씀이 있는데,

마르코복음에는 칭찬은 없고,

‘네가 그렇게 말하니,’ 라는 말씀만 있습니다.

이 말씀은 ‘너에게 믿음이 있으니,’ 라는 뜻으로 생각됩니다.)

 

이 복음말씀을 읽을 때 좀 당황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차갑고 냉정한 거절의 말씀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딸을 고쳐달라고 왔는데... 자비로우신 모습은 보이지 않고... 왜?

또 ‘강아지들’이라는 표현도 마음에 걸립니다.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하는 어머니에게 ‘강아지’라는 표현을 쓴 것은

너무 모욕적이지 않은가?

예수님이 그렇게 사람을 모욕하실 분이 아니지 않는가?

 

어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은 거절도 아니고 모욕도 아니고

그냥 구원의 순서를 말씀하신 것뿐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구원은 우선 이스라엘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을 뿐이라고.

또 예수님의 말씀을 거절이라고 해석하지 않고

여인을 시험하신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시험?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니까 시험해 보았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시는 분이니까

‘시험’해보실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몰라서 떠보는 시험이 아니라,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모욕적인 표현을 통해서 시련(단련)을 주신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인이 ‘겸손’하게 그 모욕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주신 시험(시련)을 통과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결론은 같습니다.

여인은 믿었고, 믿음의 응답을 얻었고, 딸은 나았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하나씩 따져보겠습니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들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거절’이 맞습니다.

 

‘자녀들’이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뜻하지만,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는 그냥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됩니다.

 

‘강아지들’이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을 믿지 않고, 하느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개’ 로 표현하는 경우가 자주 나옵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표현이었습니다.

복음서와 묵시록에서도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마태 7,6)

 

그래서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들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믿지 않고, 하느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스스로 하느님의 자녀 되기를 거부한 것이고 하느님의 은총도 거부한 것이니

자녀들과 같은 은총이 내리기를 기대하지 말라는 거절의 말씀이 됩니다.

 

복음말씀에 그 여인은 ‘이교도’ 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인이 이교도라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강아지들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모욕적이긴 하지만

당시 관습을 생각하면 별로 특별한 표현도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교도들을 늘 그렇게 불렀으니까.

여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강아지들이라는 표현을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생각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거절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너는 우상을 섬기는 이교도이다.

그런데도 이제 나에게 와서 딸을 고쳐달라고 청한다.

이것은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가 뺏는 것과 같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먹고 싶다면 먼저 자녀가 되어라.

그렇다면 먼저 우상숭배를 청산해라.

우상숭배를 청산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라.“

이것이 예수님 말씀의 진짜 뜻입니다.

 

이것은 여인을 시험하는 말씀이 맞습니다.

몰라서 떠보는 시험이 아니라, 믿음을 단련시키는 시험(시련)입니다.

말하자면 여인에게 선택과 결정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여인이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우상숭배를 고집한다면

그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강아지라는 말의 뜻도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 말의 뜻은 이런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맞습니다. 저는 우상을 섬기는 이교도이고 강아지입니다.

그러니 감히 자녀가 되겠다고 말씀드릴 염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하느님을 믿겠습니다. 자녀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니,

처음부터 자녀였던 사람이 받는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이제야 믿기 시작하는 저에게도 나눠주실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여인이 이제부터라도 하느님을 믿겠다고 다짐했다는 표시는

바로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에 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키리에’, 즉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에서는 유일한 예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여인은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불렀다는 것은 ‘하느님’으로 부른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이제부터는 하느님을 믿겠다고 다짐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찾아오기 전까지는 우상을 섬기던 이교도였습니다.

처음에는 딸을 고치겠다는 생각만으로 예수님을 찾아왔겠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드셨습니다.

‘강아지들’이라는 모욕적인 표현까지 사용하셔서...... (일종의 충격요법?)

 

예수님은 원래 믿음 없는 사람들에게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향 나자렛에서도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는 항상 사람들의 믿음을 먼저 보셨고,

또 사람들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수준까지 도달했기 때문에

딸이 낫게 되는 기적의 은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흔히 그 여인이 모욕을 겸손하게 참았기 때문에 원하던 것을 얻었다고 해석하는데,

‘모욕을 겸손하게 참았다.’ 라는 것은 핵심이 아닙니다.

강아지 수준에 있는 자기 자신을 자녀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이 핵심입니다.

 

쉽게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세례를 받지 않은 비신자가 미사 영성체 시간에 영성체를 하겠다고 나오면

사제는 그 사람에게 성체 주는 것을 거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제가 아무리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정말로 영성체를 하고 싶다면? 그러면 신자가 되면 됩니다.

왜 신자들만 영성체를 하고 비신자에게는 영성체를 못하게 하느냐고

사람들을 붙잡고 불평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정말로 영성체를 하고 싶다면 ‘겸손하게’ 예비신자 교리반에 들어가면 됩니다.

“나는 이미 신학, 철학, 성서학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니까

새로 예비신자 교리를 공부할 필요가 없다.

그냥 바로 영성체를 하게 해 달라.“ 라고 말한다고 해도 통하겠습니까?

신학박사, 성서학박사 학위가 있다고 해도 성체를 줄 수는 없습니다.

먼저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싶다면 하느님을 믿어라.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은총을 내리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은총이 내린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은총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란 누구에게나 내리는 은총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스스로의 노력입니다.)

 

자녀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라도 먹을 수 있지 않느냐?

라는 여인의 말이 겸손을 나타내긴 합니다.

그러나 겸손했기 때문에 은총을 받은 것이 아니라 믿었기 때문에 은총을 받았습니다.

여인은 믿었기 때문에 겸손해질 수 있었습니다.

만일에 그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겸손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교도 여인이라고 해서 외면하실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실 정도로 단호한 분이셨습니다.

우상을 섬기던 여인이 어느 날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먼저 그 여인의 과거를 끊어버려야 할 필요를 보셨을 것입니다.

여인으로 하여금 우상을 버리고 제대로 하느님을 믿게 만든 것,

그것은 딸이 나은 것만큼이나 큰 은총이었습니다.

 

엄마는 우상을 버렸고, 마귀 들린 딸은 마귀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엄마와 딸이 모두 강아지 신세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승격되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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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Fr.송영진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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