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4주간 월요일>(2010. 2. 1. 월)
<“그냥 내비둬. 이대로 살래.” 라고 말하지 마라.>
예수님이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가셔서 악령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마귀를 쫓아내는 다른 이야기와 좀 다릅니다.
우선 이 이야기의 무대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호수 건너편입니다.
즉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믿지도 않았고 메시아를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은 귀찮은 불청객일 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마귀를 쫓아낸 것에 대해 두려워하기만 할 뿐
하느님을 찬양하지도 않고 예수님의 권능을 달가워하지도 않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들과 악령들의 모습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우선 악령들의 모습부터 보면, 그들은 있던 곳을 떠나기 싫어합니다.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이것은 악령들이란 자기 자신들도 변화를 싫어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사람들 속에 머무르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변화를 거부하게 하고
현실에 안주하도록 유혹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개혁, 변화, 쇄신, 회개 등을 거부하는 것은
악령의 유혹에 빠진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현실이 좋거나 나쁘거나 상관없이 그냥 변화를 싫어하는 것,
그것이 사람을 자꾸 타성에 빠지게 하고 타락하게 만듭니다.
마을 사람들도 변화를 싫어합니다.
갈릴래아 지역에서는 예수님께 더 머물러 달라고 청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대개는 병을 고치려는 목적에서였겠지만...)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이 마귀를 쫓아내는 권능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을 보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삶에 변화가 생기는 것을 싫어한 것입니다.
다른 마귀들을 더 쫓아내 달라고 하지도 않고 병자를 고쳐달라고 하지도 않고
그냥 예수님이 떠나주기만을 바랍니다.
돼지들마저도 악령들을 싫어해서 집단 자살을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악령들이 자기들 가까이 있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저 돼지들이 죽은 것만 아깝게 생각한 것일까?
마귀 들렸다가 예수님 덕분에 새 삶을 되찾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이제까지 사람들 속에서 살지 못하고 무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덕분에 악령들(마귀들)에게서 해방되자
예수님을 따라다니겠다고 나섭니다,
왜 가족에게 돌아가지 않으려고 했던 것일까?
왜 자기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했을까?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숭고한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일까?
예수님은 그가 따라가겠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따르겠다는 사람을 거절한 일은 다른 곳에서는 없었던 일입니다.
왜 그러셨을까???
저는 그 사람이 집으로, 가족들에게로 돌아가기를 두려워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돌아간다는 것이 현재의 상황에서는 그에게는 큰 변화입니다.
그는 그 변화가 두려운 것입니다.
마귀 들린 채로 살았던 날들이 좋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 상태에서 해방된 것은 분명히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인생의 큰 변화가 두렵고 싫은 것입니다.
마치 교도소 재소자가 석방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출소해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심리일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예수님 뒤를 따라다닌다면,
어떤 스트레스도 받을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가 따라가겠다고 나선 동기를 꿰뚫어보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순순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아셨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명령하십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그가 원래 바라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 되었든 예수님은 마귀를 쫓아낸 것 이상으로 그 사람을 제대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돌아다니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널리 알립니다.
말하자면 복음을 선포하고 다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인생을 제대로, 아주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날마다 새롭게 되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삶에 철저하게 안주하기만을 바라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가 어렵습니다.
죄의 경중을 따져서 큰 죄(대죄)와 작은 죄(소죄)로 분류할 때,
일상적인 일, 사소한 습관에 해당하는 죄는 보통 소죄로 분류합니다.
그러나 그 습관이 악습이 되고, 지속적인 일이고,
그 습관을 고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 소죄도 결국 대죄로 바뀝니다.
예를 들면 평소의 말투 같은 것, 약간의 게으름 같은 것 등.
그 자체로는 아주 작은 죄라고 할 수 있지만
그걸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대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든다면, 미사 시간에 조금 늦는 것을 죄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이 게으름에서 비롯된 일이고, 항상 반복되는 일이고,
그걸 고치려는 의지도 노력도 없고 몸에 배어서 장기간 지속된다면
그것도 언젠가는 대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살던 대로 살기를 바라는 것도 하나의 유혹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씻기를 싫어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번 목욕을 했다고 해서 죽을 때까지 목욕을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고해성사 한 번 보았다고 죽을 때까지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회개란 날마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 삶의 방향이 하느님 쪽을 향하고 있는가?
세파에 시달리고 흔들려서 그 방향이 조금 틀어진 것은 없는가?
안테나로 TV를 시청하던 시절에, 자주 안테나 방향을 맞추어야만 했던 것처럼
그렇게 삶의 방향을 날마다 점검하고 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느님은 죽은 우상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이십니다.
죽은 우상은 변화가 없으니 우상을 섬기는 우상숭배는 변화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느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은 살아있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살아있는 생활이란... 새로운 영양을 꾸준히 섭취하면서,
동시에 노폐물과 배설물을 꾸준히 버리는 생활입니다.
죽어버린 인생은 새로운 영양 섭취도 없고 배설도 없는, 그대로 딱 멈춰선 상태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신앙생활은 날마다 새로운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먹는 삶입니다.
동시에 우리를 낡게 하고, 오염시키는 여러 가지 노폐물은 계속 배설하는 삶입니다.
하루하루의 삶에서 저절로 쌓이는 노폐물과 배설물을 깨끗하게 처리하는 것,
그것이 바로 회개이고, 날마다 새롭게 되는 생활이고, 제대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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