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주간 금요일>(2010. 1. 29. 금)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다가 금방 실망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만 해도,
수많은 군중이 몰려들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병을 고치는 것을 볼 때만 해도
금방 뭔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정말 새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시간이 지나도 달라진 것은 별로 없고
몰려든 군중도 병을 고친 다음에는 그냥 가버리고
늘 그렇듯이 예수님과 제자들만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춥고 배고픈 생활이 이어졌을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와 같다.”
씨를 뿌렸으면 싹이 터서 자라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
싹이 터서 자란다면 곡식이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언젠가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낫을 들고 수확하실 날이 올 것이다.
또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지금은 아주 작고 보잘것없지만 언젠가는 큰 나무로 자랄 것이다.
처음부터 실망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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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 말씀을 하신 뒤로
지금 이천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럼 씨가 좀 자랐을까요?
싹이 터서 자라고 곡식이 익었을까요?
하느님께는 천 년도 하루 같다고 하니까
지금 이틀 밖에 안 지났군요.
이건 말장난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습니다.
전 세계 인구와 그리스도교 신자 수를 비교해보면
육분의 일이나 될까? 오분의 일일까?
이백여 년 전에 몇 명의 학자가 모여서 시작되었던 조선의 천주교,
지금은 오백만 명으로 성장했습니다. (많은 수의 냉담자를 포함해서.)
거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놀라운 성장입니다.
그러나 오천만 인구의 십분의 일일 뿐입니다.
아직은 그냥 씨앗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직 수확할 때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종말은 아직 멀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여간에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느긋하지 못합니다.
어떤 일의 결과를 서둘러 보고 싶어 합니다.
기도를 하면 즉시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고 재촉합니다.
물론 일촉즉발의 위기에서는 그럴 수 있지요.
그러나 사람의 인생이 항상 그렇게 급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그렇게 급하게 서두를 수 없습니다.
신앙의 결과, 신앙생활의 결과가 금방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결과주의, 실적주의에 집착합니다.
어쩌면 우리 교회도 제도적으로 그런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에 사무장도 없는 선교본당의 주임신부로 살 때에
제가 가장 스트레스를 받은 것은 각종 보고서들이었습니다.
매달 월말 결산서와 미사 보고서,
연말에 연말 결산서, 다음 해의 예산서,
교세 통계표, 사목활동 보고서, 선교활동 보고서,
그 외에도 시시 때때로 내야 하는 보고서와 공문들.
그중에서 사목활동 보고서를 생각하면 민망하기만 합니다.
저는 분명히 일 년 동안 죽어라고 일을 했는데,
휴가도 한 번 안 가고 본당에서 뭔가를 열심히 했는데,
보고서에 쓸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교구에서 요구하는 일은 하나도 안 하고
저 혼자만의 프로그램을 시행한 것도 아닙니다.
일은 열심히 했는데 보고할만한 결과나 실적이 없다는 것.
그저 씨를 뿌리는 심정으로 일하긴 했지만
보고서를 작성할 때마다 많이 난감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보고서가 아니라 소설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럴 일이 전혀 없겠지만 제가 교구장이 된다면
우선 서류들과 보고서들부터 대폭 줄이고 싶습니다.
제가 선교본당 시절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자취가 아니라
사무장 일을 다 해야만 했다는 것,
특히 그런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 일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쓸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실적을 요구하는 세상,
아마도 일반 직장인들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실적을 올리지 못하면 퇴출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을 것입니다.
실적이 없다는 이유로 신부들을 퇴출시킬 일은 없지만
그래도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전에 언젠가 한 번 강론에서 언급한 내용일 것 같은데,
어느 해 사목활동 보고서인지 선교활동 보고서인지, 어떤 보고서를 쓸 때,
제가 담당했던 교도소 사목 결과를 본당의 보고서에 함께 적어 넣은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일주일의 절반을 교도소에서 보내고 있으니
그 내용도 보고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군데 교도소의 영세자 수와 본당의 영세자 수를 모두 적었는데,
(물론 색깔이 다른 볼펜으로 본당과 교도소를 구분하긴 했지만)
교구청의 실무 직원이 제가 있던 본당으로 모두 통합해서 집계를 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발표가 되었습니다.
그해 연말에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말을 들었습니다.
본당 신자수보다 더 많은 수의 영세자 수!!!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느냐고 인사하는 사람,
자기네 본당 신부님이 강론 중에
가난한 선교본당인 ‘oo 본당’에서는 이렇게 놀라운 선교활동을 하는데
우리는 이게 뭐냐고 야단치는 말을 했다고 전해주는 사람...
저는 처음에는 일일이 내막을 설명했지만
나중에는 귀찮아서 그냥 웃기만 했습니다.
만일에 제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면
저는 별 것도 아닌 일을 부풀려서 잘난 체를 한 것이 될 것입니다.
신부로 살면서 터득한 것 중에 하나는
눈에 보이는 결과 때문에 지칠 필요가 없다는 것,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고 우리는 도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누군가 씨를 뿌리면
후임자가 와서 물을 주고 가꿀 것이고,
또 그 다음 후임자가 그 다음 단계의 일을 할 것이고,
그렇게 백년, 이백년 세월이 흐를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씨를 뿌리는 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인생에 복음의 씨를 뿌리고,
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씨를 뿌리고,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기 위해 씨를 뿌리고,
나중에 천국에 가기 위해서 오늘 자기 삶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추수를 하려거든 봄에 씨를 뿌려야 합니다.
씨를 뿌렸다면 물을 주고 가꾸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느긋하게, 믿음과 희망 속에서.
기도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고,
기대하고(희망하고)
기다리고(인내하고).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실망시키는 분이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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