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3주간 목요일>(2009. 12. 17. 목)
<족보, 하느님의 섭리, 그리고 사랑>
12월 17일의 복음말씀은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마태오복음은 아브라함에서 시작하는 족보를 기록했고,
루카복음은 예수님에서 시작해서 아담으로 끝나는 족보를 기록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메시아를 보내주셨고,
예수님이 바로 그분이라는 것이 족보를 기록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마태오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쓴 것이어서 아브라함에서 시작했고,
루카복음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쓴 것이어서 아담에서 시작했습니다.
이 족보는 다윗 왕실의 족보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라고 불리는 메시아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족보가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계획하신 대로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족보에서 주목할 점은 여자가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타마르’는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관계를 가져서 대를 이었다는 비정상적인 상황입니다.
‘라합’은 이방인 창녀입니다.
이것도 역시 비정상적인 상황입니다.
‘룻’은 과부였는데, 남편의 친척 남자와 재혼을 했습니다.
이것도 비정상적인 상황입니다.
‘우리야의 아내’는 다윗과 간통을 했습니다.
첫 아이는 죽었지만 두 번째 아이가 솔로몬 왕입니다.
이것도 비정상적인 상황입니다.
‘마리아’는 동정녀인데 예수님을 낳았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이것도 비정상적인 상황입니다.
비정상적인 상황의 여자들을 등장시킨 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서 메시아가 세상에 오신 것은
우연도 아니고, 인간의 일도 아니고,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족보를 십사 대씩 끊은 것도 실제 역사를 기록한 것은 아니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빈틈이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14는 하느님을 나타내는 7을 두 번 더한 숫자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일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부터 메시아를 약속하셨고,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실 때에도 메시아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메시아가 태어나셨습니다.
족보는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졌음을 증명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분, 메시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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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은진 송씨 회덕파 후손입니다.
회덕파의 시조는 유명한 학자이고 노론의 두목이었던 ‘우암 송시열’, 바로 그분입니다.
은진 송씨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 초쯤에서 끝나는데,
중국에서 고려로 귀화를 했는지, 이민을 했는지,
아니면 다른 성씨에서 분가를 했는지, 하여간에... 그건 모르겠고...
은진 송씨 회덕파에서 시조 외에 또 한 분, 유명한 분이 있는데,
을사조약 당시에 그 조약에 항의를 하고 자결을 해서
고종황제가 시호까지 내린 순국선열 ‘문충공 송병선’ 할아버지입니다.
국사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인물인데, 저의 고조할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순국선열의 직계 자손입니다.
지금 제가 저의 가문을 자랑하려는 것은 아니고...
천주교가 조선에 처음 들어왔을 때
천주교를 믿은 사람들은 주로 남인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남인과 노론은 서로 정적이었고, 천주교 박해는 노론이 앞장섰습니다.
그래서 저는 천주교를 박해한 노론 가문의. 거의 직계에 가까운 후손입니다.
그런 박해자 가문에서 천주교 사제가 생겼다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저의 가문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은 저희 집이었을 것입니다.
믿는 것은 그렇다 치고 신부까지 되었으니,
가문에서 여러 말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습니다.
하느님은 박해자 가문에서도 천주교 사제를 만들어내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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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는 노래 가사를 보면
태초부터 시작된 하느님의 사랑이 당신에게서 열매를 맺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어쩌다가 만나서
하룻밤을 같이 잤기 때문에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태초부터 하느님께서 사랑하셔서 세상에 내보낸 존재입니다.
예수님만 하느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분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계획과 사랑으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다 귀하고 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자기 자신을 천하게 생각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천하게 태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귀하게 태어났습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또 그만큼 인생을 신중하게 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저에게 따질 것입니다.
이렇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
이렇게 장애를 갖고 태어났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
이렇게 못생기고, 머리 나쁘고, 키 작고... 그런데도 그 말을 믿으라는 거냐?
성폭행의 결과로 태어났는데 그것이 무슨 은총이고 사랑이냐?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다른 나라가 아닌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이 고맙고 자랑스럽다고.
다른 집이 아니라 우리 집에서 태어난 것이 고맙고 자랑스럽다고.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로 태어난 것이 고맙고 자랑스럽다고,
잘난 것도 없고, 특출한 것도 없지만, 나는 그냥 나라고.
다시 태어나기도 싫고, 남과 바꾸기도 싫은 내 인생이라고.
자기 존재를 부정하고, 자기 인생을 부정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분명히 공평하게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불공평한 것은 맞습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도, 각자 다른 탈렌트를 주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각자 다른 기회, 다른 여건,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은총은 공평합니다.
덜 받은 것이 있으면 더 받은 것도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옹기장이의 비유로 그것을 설명합니다.
“아, 인간이여! 하느님께 말대답을 하는 그대는 정녕 누구인가?
작품이 제작자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로마 9,20)
인간의 기준으로는 불공평하게 보여도 하느님의 기준으로는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인생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는가? 를 불평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사실 예수님께서 왕실의 후손이라는 것은 빈껍데기이고,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살해 위협을 피해 피난을 가야만 했습니다.
아마도 활동하기 전까지는 요셉처럼 가난한 목수로 살았을 것입니다.
활동한지 3년 만에 십자가형으로 처형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약속하신 메시아의 지상 생애는 겨우 그런 정도입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도 그런 삶을 살았는데,
우리가 무엇을 더 바랄 수 있단 말입니까?
만일에 예수님이 로마 황실의 황태자로 태어나셨다면?
아마도 그리스도교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가 되었겠지요.
그런데 하느님은 그런 식으로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눈앞의 것만 보면 진짜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합니다.
더욱이 ‘사랑’과 ‘은총’은 보이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성탄절을 준비하는 지금,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면서 한 해를 보낸 것을 먼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성탄절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주는 날입니다.
하느님의 섭리와 사랑은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사람에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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