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3주일>(2009. 12. 13)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개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묻고 있습니다.
요한이 대답합니다.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새번역 성경은 그냥 ‘옷’이라고 번역했는데, ‘속옷’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당시에는 옷감이 무척 귀했습니다.
오죽하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속옷을 제비뽑기로 나눠 가졌을까?
하여간에 요즘의 속옷을 생각하면 안 되고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서 생각한다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지 말고 남과 나누라는 가르침입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선진국에서 먹고 남아서 버리는 음식의 양은
후진국의 굶어죽는 사람들을 다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전 지구적으로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먹을 것을 나누어 먹는 것, 그것이 회개입니다.
요한이 세리들에게 대답합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요한이 군인들에게 대답합니다.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정해진 대로만 받아라, 권력의 힘으로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하지 마라.
이것은 공무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정당하게 벌어서 정당하게 쓰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모으고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하는 것은 요즘에도 여전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신자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습니다.
돈 문제로 인한 범죄로 교도소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신자들이나 비신자들이나 비율에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경고합니다.
“그분께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성령과 불의 세례는 사람을 완전히 새로 태어나게 하고 새 생명을 주는 세례입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곧 심판과 벌이 될 것입니다.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실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쭉정이입니다.
아무리 주일미사 참례 잘하고, 헌금 잘 내고, 봉사활동을 잘해도,
마음속에는 이기심과 욕심이 가득 들어 있고, 사랑 대신 미움으로 살고 있다면,
그것은 쭉정이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쭉정이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불에 태우실 것입니다.
판공성사란, 과연 자신은 알곡인지 쭉정이인지 반성하는 일입니다.
쭉정이인데도 알곡이라고 우기면 대책이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쭉정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한다면 알곡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회개는 쭉정이의 속을 채워서 알곡으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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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우침, 반성, 고백, 회개, 후회)
루카복음 15장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보면,
작은 아들은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잘못을 고백합니다.
큰 아들은 자기가 잘 했다고 우기고,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 이야기에서 ‘회개’란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은 회개의 출발점입니다.
고백은 회개한 다음에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는 것입니다.
만일에 작은 아들이 잘못을 뉘우치기만 하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그건 회개가 아닙니다.
정말 많은 사람이 뉘우치기만 하고 회개는 하지 않습니다.
잘못했다고, 죄인이라고, 말은 잘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냉담자라고 털어놓으면서도 회개는 하지 않습니다.
어쩌란 말입니까?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으면서 잘못했다는 말만 하면, 그 말은 빈 말입니다.
만일에 아들이 집에 가보니 이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버렸다면?
그때 하는 것이 후회입니다.
회개할 기회를 놓치고 나중에, 뒤늦게 하는 것이 후회입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회개는 하지 않고 후회만 합니다.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죄를 짓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너는 후회할 짓 하지 마라.” 라고 충고하면서
자기는 후회할 짓을 계속합니다.
큰 아들의 경우를 보면, 그는 아예 회개 자체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가 나중에라도 집에 들어갔는지는 모르지만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회개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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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회개할 것이 없다, 그저 은총과 복을 받을 일만 있다,
라고 큰소리칠 수 있는 인간은, 지구상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성모님 외에는)
그런데도 정말 많은 인간들이 그렇게 큰소리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합니다.
그러나 회개란 남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입니다.
전에 평협에서 ‘내 탓이오’ 운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걸 차량 스티커로 제작해서 자동차에 붙이라고 권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스티커, 왜 차의 뒷 유리에 붙이는 것입니까?
운전석 바로 앞에 붙여야지, 뒤에서 따라오는 운전사만 볼 수 있게 뒤에 붙이면
그게 ‘네 탓이오.’ 이지, 어떻게 ‘내 탓이오.’ 가 됩니까?
그 스티커를 붙인 차들이 접촉 사고를 일으켜서 다투는 현장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 창피한 일입니다. 그런 스티커를 붙이지 말든지... 제대로 실천하든지...
고해성사 한 번 보는 것으로 대림 시기에 할 일을 다 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대림 시기란 지난 일 년 동안의 신앙생활을 점검하는 시기입니다.
점검해서 부족한 부분, 잘못한 부분이 있으면 바로잡는 시기입니다.
야고보서 2장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 2,15-17)
주일 미사 보편 지향 기도를 생각해 봅니다.
자주 등장하는 기도문들이 있는데,
세계 평화를 위해서, 조국을 위해서.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위해서, 기타 등등...
주일날 그 기도는 기도자만 하는 기도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바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세계 평화를 위해서 무엇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조국을 위해서 어떤 일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위해서 어떤 일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거의 대부분 주일날 기도자가 읽는(?) 기도를 듣는 것으로 그냥 지나칩니다.
그게 무슨 기도입니까?
행동이 따르지 않는 기도, 하느님께 일만 시키고 인간은 구경만 하는 기도......
야고보 사도가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꾸짖고 있습니다.
대림 시기는 죽은 믿음을 다시 살리는 시기입니다.
실천으로 죽은 믿음을 살려내야 우리 자신도 살아날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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