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1주간 금요일>(2009. 12. 4. 금)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예, 주님!”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마태 9,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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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믿는 대로 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표현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흉내 낸 것입니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르코 11,24 - 새번역)
“너희가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다 될 것이다.“ (마르코 11,24 - 공동번역)
새번역 성경과 공동번역 성서의 마르코복음 11장 24절의 번역을 보면
전체 뜻은 차이가 없는데,
두 번역 사이에 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번역을 좀 더 볼까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바라는 것들은 무엇이나 받은 것으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 것이 되리라.“ (개신교 한글 킹 제임스 성경)
“여러분이 기도하며 청하는 것은 다 받는다고 믿으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200주년 성서)
제가 가지고 있는 네 가지 번역본을 비교해 보았는데,
세 가지는 같고, 한 가지는 다릅니다.
문장을 두 개로 끊었느냐? 하나로 이었느냐? 의 차이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믿기만 하면’ 그대로 다 될 것이라고 이어서 번역했고,
다른 번역들은 ‘믿어라.’ 라고 일단 문장을 끊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문장 전체의 뜻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네 가지 번역을 천천히 여러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뭔가 차이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바로 시간의 차이입니다.
문장을 중간에 끊으면 다음 문장으로 가기 전에 호흡이 끊어지고
시간 간격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의 문장으로 이으면 시간 간격이 없습니다.
이것은 ‘믿는 것’과 ‘이루어지는 것’ 사이의 시간 간격입니다.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긴 세월 공동번역 성서에 길들여져 있었습니다.
‘믿기만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라는 예수님 말씀이 잠재의식에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믿어도 안 되는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된다.’ 라고 하셨는데,
실제 현실에서는 그게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내 믿음이 약한가?’ 라고 반성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다르게 해석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을 의심하지요.
어떻든 사람들은 믿음이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죽어라고 믿고 기도했는데도 결과가 바라는 대로 안 될 때가 많으니...
아주 가끔 기도한 대로, 바라는 대로 결과를 얻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그저 남 이야기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점점 믿음을 잃기도 하고, 기도를 덜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다른 번역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0주년 신약성서가 나왔고, 새번역 성경이 나왔습니다.
두 번역 다 문장을 중간에서 끊었습니다.
이제 믿는 것과 이루어지는 것 사이에 시간 간격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믿는다고 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다른 신부님이 이 글을 읽는다면 웃을지도 모릅니다.
“강론도 참, 별스럽게, 이상한 방식으로 전개하는군.” 하면서.
또 어떤 사람은 이럴지도 모릅니다.
“네 가지 번역을 비교하면서 아무리 다시 읽어도 차이를 못 느끼겠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천천히 네 개의 번역 문장을 비교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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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번역 성서의 번역을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 이 글의 주제는 ‘번역’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고,
믿음 속에서 살다가 믿음 속에서 죽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 말씀은 무조건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약속은 무조건 지켜진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믿는 대로 그대로 될 것이라는 약속도 지켜질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고, 저렇게 해석하고,
비틀고 덧칠하고 왜곡하고...
그래서 믿는 대로 안 되는 현실에 대해서 변명하고 해명하고...
다 부질없고 무의미한 짓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 말씀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 말씀대로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았다고 믿어라. 그대로 될 것이다.” 하셨으니
그대로 될 것이라고 믿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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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것’과 ‘이루어지는 것’ 사이에
시간 간격이 있음을 의식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저 종교와 신앙의 자유만이라도 얻기를 갈망했던
조선 시대의 순교자들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은 백년이나 지난 뒤였습니다.
백년!!!... 순교자들은 자신들의 믿음과 기도의 결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냥 믿음 속에서 죽은 것이지요.
이미 받았다고 믿었지만, 믿는 대로 되는 것은 보지 못한 것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들도 그랬고, 사도들의 제자들도 그랬고, 그 제자들의 제자들도 그랬고...
오늘날의 우리들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저 시력을 되찾고, 병을 고치고, 경제 사정이 호전되고, 시험에 합격하고,
사업이 회복되고, 가정불화가 해결되고... 그런 정도의 일상적인 일 말고,
궁극적인 신앙생활의 목표를 생각한다면...
몸의 병이야 의술이 발달하면 고칠 수도 있고,
다른 일들이야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고 도와주면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가 성실하게 노력만 하면 해결될 일도 있고...
그런 일들이야 믿음 없는 사람들도 다 잘 해결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정말 “믿음과 기도와 기적”을 일상적인 일에 몽땅 소모시켜야만 하겠습니까?
믿음의 그 큰 능력을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하고, 가장 궁극적인 일,
영원하고 근본적인 일을 추구하는 데에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루 이십 사 시간 믿음 속에서 사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바치는 기도에
하느님이 항상 바로 바로 응답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은 태도입니다.
그건 마치 말 잘 듣는 종을 부리는 것과 같은 태도입니다.
하느님은 필요한 시기에 적절한 방식으로 응답을 주실 것입니다.
믿음을 갖고 기도했다면 그것으로 된 것입니다.
그 응답이 언제 올지, 어떤 모습일지는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이루어짐 사이의 시간 간격을 의식한다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복음 말씀의 눈먼 사람 두 명은 즉시 응답을 얻었고 시력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거의 실명 직전까지 갔다가 시력을 되찾은 것은
기도하고 나서 십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즉시’와 ‘십년 후’는 세속의 기준으로는 아주 큰 차이가 있지만,
저 자신에게는(믿음의 기준으로는) 그다지 큰 차이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무조건 믿는 것입니다.
믿는다면 기도하면 되고, 기도했다면 기다리면 됩니다.
수많은 성인 성녀들이 믿음과 기도의 결과를 보지 못하고 그냥 죽었는데,
우리가 죽기 전에 자기 믿음의 결과를 볼 수만 있어도 대단한 은총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의 인생이란 생각보다 훨씬 더 길고, 먼 길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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