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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안드레아사도축일(091130.월)

도구 Ludovicus 2009. 11. 30. 07:53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2009. 11. 30. 월)

 

<부르심 - 성소>

 

마태오복음에서는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가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부르심을 받았고,

부르심을 받자마자 바로 따라나선 것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안드레아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고,

세례자 요한의 소개로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 안드레아는 예수님을 만난 그날 예수님과 함께 하룻밤을 지낸 다음에

(아마도 그 밤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했을 것입니다.)

자기 형 베드로에게 가서 자기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하고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서 소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오복음과 요한복음을 합해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안드레아와 베드로 형제를 보자마자 제자로 부르신 것은 아니고

만나고 나서 어느 정도 시일이 흐른 뒤에 부르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마도 두 형제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마음의 준비를 하는 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제자로 불러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즉시 따라나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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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제자로 삼으시는 장면을 보면,

인간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와 다릅니다.

 

세속에서는 제자가 먼저 스승을 선택합니다.

그 다음에 스승은 그 사람을 제자로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다시 말해서 학생이 먼저 어느 대학에 갈 것인지를 선택하고

그 다음에 입학시험을 치르는 것이 세속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먼저 선택하고 부르십니다.

제자들이 그분을 스승으로 모실 것인지 말 것인지는 제자들 자신이 결정합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성소 지망자들이 성소자 모임에 참석할 것인지는 자기가 결정하겠지만

그 성소 지망자들이 모두 다 신학교 입학시험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 성소자 모임에 참석하게 되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본당신부님들의 선발, 권유, 추천 등을 거치게 됩니다.

본당신부님들이 부적격자라고 판단한다면 성소자 모임에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성소 지망자들 중에서 신학교 입학시험을 볼 사람을 선발하는 것은 교구의 권한입니다.

대개의 경우, 적은 수의 인원만 선발되고

선발된 사람들에게만 입학 지원서가 주어집니다.

 

이제 그 원서를 작성해서 시험을 보러 갈 것인지 말 것인지는

성소 지망자 자신이 결정할 일입니다.

그러니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대개는 교구에서 선발할 때 이미 입학이 결정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부제품과 사제품을 받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신학교 측에서도 후보자를 선발하고,

교구는 교구대로 서품 대상자 선발 예식을 합니다.

 

신학교 전 과정을 잘 다녔으면서도 서품 지원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품 지원서를 쓸 자격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지원 자체를 할 수 없습니다.

 

제 친구들은 고심하는 척 하면서 시일을 좀 끌다가 서품 지원서를 제출했고,

저는 서류를 받자마자 바로 작성해서 제출했던 기억이 납니다.

 

서품식 예식도 그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사제단 대표인 총대리가 서품 대상자를 호명하고(부르고)

대상자들이 그 부름에 응답하면서 제단 앞으로 갑니다.

그러면 바로 서품식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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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르심은 특별히 선택되었다는 은총입니다.

그 부르심을 거부하는 사람은 은총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그 은총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다고 해서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되면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과 예수님을 따르라는 사명을 받게 됩니다.

사실 그 사명(임무) 자체도 은총입니다.

 

부르심은 사도들과 성직자들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도 해당되는 일입니다.

 

요즘 시기가 본당마다 정기총회를 하고 새 임원을 뽑는 시기인데,

예를 들어서 어떤 단체의 회장을 선출한다고 할 때,

그 직책을 맡기 싫어서 아예 회의에 참석을 하지 않거나

자기를 후보로 지명하지 말라고 미리 물밑 작업을 하거나

지명되면 후보 자리에서 사퇴를 하는 모습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 그런 행동들은 겸손해서가 아니라

책임을 맡기 싫어하는 책임회피의 모습들입니다.

성당에 다니면서 은총만 받으려고 하고 사명은 맡지 않으려는 모습들입니다.

 

만일에 그 직책이 이권이 걸려 있고 물질적인 이득이 생기는 자리라면,

또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는 자리라면,

그렇게 서로 안 맡으려고 할까?

오히려 서로 맡으려고 다투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전적으로 자기 시간을 내야하고 자기 돈을 써야 하는 봉사직인 데다가

귀찮기도 하고 책임지기도 싫고 욕먹는 것도 싫어서 그런 것인데,

그런 이유로 자기가 하기 싫어 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것이 과연 올바른 신자의 태도일까?

 

사명은 거부하고 은총만 원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사순절은 거부하고 부활절만 기다리는 것이 옳은 일인가?

봉사하기는 거부하고 봉사받기만을 바라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것은 거부하면서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려고 하는가?

 

아무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고, 아무 직책도 맡지 않고,

그냥 혼자서 조용히 성당에 다니면서

혼자서 조용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내버려달라, 라고 요구할 수 있는가?

정말 그걸 원한다면 광야로 혼자 나가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본당신부로 살아보니 정반대의 상황도 있었습니다.

본당신부로서 판단할 때 도저히 직책을 맡길 인물이 아닌데도

자기가 맡겠다고 먼저 나서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본당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직책을 맡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었고,

직책을 맡고 있으면 뭔가 그럴듯하게 보인다고 생각해서 맡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본당에서 어떤 대우나 대접을 받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었고...

제 경험으로는 그런 사람들에게 직책을 맡기면 늘 뒤끝이 안 좋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셨을 때 사도들은 모두 응답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았습니다(마태 19,22).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싶어 했지만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루카 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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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처음에는 제가 원하고 제가 선택하고 제가 결정해서 신학교에 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세월이 흐르면서, 그리고 신부로 살면서,

제가 원하고 선택하고 결정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결정하시고 선택하시고 부르셨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제가 잘나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만의 어떤 기준이 있었겠지요.

 

제가 신학교 입학하기 전에 교구 성소자 모임 참석자는 50여명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피정 참석자는 30여명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들은 모두 다 훌륭하고 거룩한 학생들이었습니다.

저 자신을 그들과 비교할 때 가장 부족하고 못나게 느껴졌습니다.

 

30명 중에서 신학교 입학시험을 볼 수 있었던 학생은 11명뿐이었습니다.

왜 제가 그 11명 중에 낄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학교 합격자는 9명이었습니다.

11명중에서 한 명은, 자기가 원해서 신학교를 지원한 것이 아니라

부모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고 자백(?)하는 바람에 면접에서 떨어졌습니다.

나머지 한 명은 왜 떨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9명 중에서 지금 신부로 살고 있는 사람은 달랑 네 명입니다.

다섯 명은 스스로 중간에 그만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계속 저를 부르신다고 느낍니다.

저는 스스로 자격이 부족하다고 느끼지만 응답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부르심은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계속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응답은 날마다 계속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체포될 때 사도들이 달아났던 일은

부르심에 응답했더라도 중간에 그 응답이 흔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여러 가지 사명을 맡기시기 위해 우리를 날마다 부르십니다.

어제 응답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응답해야 하고 내일도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자기가 받은 부르심의 은총에 응답하는 생활입니다.

날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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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Fr.송영진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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