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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중제30주간금요일(091030.금)

도구 Ludovicus 2009. 10. 30. 07:31

<연중 제30주간 금요일>(2009. 10. 30. 금)

 

<무엇을 할 것인가?>

 

옛날 옛날에

어떤 시골에서 마을 주민들이 단체로 서울 관광을 갔습니다.

그들은 일생 동안 동네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일행이 서울역에 도착하자 인솔자가 사람들에게 주의사항을 말했습니다.

"제가 풍선을 들고 앞에서 인솔할 테니까 풍선을 잘 보고 따라오세요." 라고.

 

그러고는 하루종일 서울의 유명한 곳을 돌아다녔는데...

 

저녁에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와서

인솔자가 사람들에게 서울 구경 잘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길을 잃어버릴까봐 온 종일 풍선만 보고 다니느라고,

 서울 구경은 하나도 못했구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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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라는 것이 앞의 이야기에 나오는 풍선 같은 것이었습니다.

풍선만 바라보다가 진짜 중요한 것은 보지 못하는 모습.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묻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유대인들은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몰라서 물으신 것도 아니고,

유대인들이 그 질문의 답을 몰라서 대답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데,

그들은 예수님께 반박하지도 못하고, 동의하지도 못합니다.

 

마음이 굳어질 대로 굳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주의의 무서운 점입니다.

 

십계명과 율법이 선포된 뒤에

처음으로 안식일 규정을 어긴 사람이 붙잡히는 장면이 민수기에 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람을 어떻게 처벌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십니다.

"그 사람은 사형을 받아야 한다.

온 공동체가 진영 밖에서 그에게 돌을 던져야 한다." (민수기 15,35)

 

그래서 온 백성이 그 사람에게 돌을 던져 죽였습니다.

 

구약성경의 판례만 생각한다면

예수님은 돌에 맞아 죽을 일을 너무 많이, 자주 하신 셈입니다.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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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참사 피고인들의 재판에서

판결문에 '법치주의' 라는 말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법치주의를 흔드는 탈법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유죄선고를 했습니다.

 

법치주의 ... 좋은 말입니다.

좋은 말인데 마음에 와 닿지는 않습니다.

 

좋은 말이긴 한데, 왜 그 말을 가난한 서민들에게만 적용하는지...

고위층과 상류층 인사들이 이런 저런 비리로 구속되었다가

특사니 뭐니 해서 금방 풀려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목격합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라는 말이 살아 있는 한

법치주의는 힘 있고 가진 자들만의 법치주의입니다.

 

법은 따뜻해야 합니다.

법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법은 공포의 대상이어서는 안 됩니다.

법은 모든 사람이 마음으로부터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운전을 하다보면

전방 몇 미터 지점에서 과속 단속 중이라는 안내문을 볼 때가 많습니다.

그런 안내문을 보게 되면 저절로 속도를 줄이게 됩니다.

 

옛날에는 경찰들이 숨어서 단속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요즘에는 숨어서 단속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도로교통법과 그 법의 적용은 그렇게 진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법들이 구시대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 법들을 집행하는 사람들도 구시대의 모습입니다.

만일에 법이라는 것을 정권 유지 수단으로만 생각한다면

그런 정권이 바로 독재정권입니다.

 

용산 참사 재판 결과에 대해 정치적인 판결이었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재판이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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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에서 안식일 규정을 어긴 사람을 사형시킨 것은

하느님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에 대한 처벌이었습니다.

아마도 율법 시행 초기였기 때문에 강력한 집행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천 년 전의 일입니다.

 

세월이 수천 년 흘렀는데도

유대인들은 여전히 민수기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낡은 사고방식을 예수님께서 깨뜨리십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안식일이란 무엇을 하는 날이냐? 라는 질문이 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란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다, 라는 생각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에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 '무엇'이 곧 '사랑'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킨다는 핑계로 아무것도 안 했고,

사랑의 실천도 하지 않았습니다.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것이 안식일 율법의 정신은 아닙니다.

 

안식일이란 제정될 때부터 사랑을 실천하는 날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안식일은 하느님을 위한 날이고,

그래서 거룩한 날이고,

아들과 딸과 남종과 여종과

집짐승과 이방인들도 모두 쉬는 날이었습니다.(탈출기 20,8-11)

 

하느님을 위한 날 -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사랑을 실천하는 날입니다.

거룩한 날 - 거룩함과 자비는 하나이니, 자비를 실천하는 날입니다.

아들, 딸, 남종, 여종, 가축, 이방인들이 모두 쉬어야 하는 날이니,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노예들, 가축들에게도 안식을 보장하는 날이고,

그러니 곧 사랑을 실천하는 날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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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안식일 대신에 주일을 지키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주일 미사 참례만 하면 주일을 지킨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주 낡은 사고방식입니다.

 

풍선만 바라보다가 서울 구경을 못한 사람들처럼

어리석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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