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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00돌 기획(1)-거사와 출생"

도구 Ludovicus 2009. 10. 25. 19:51

"[특집]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00돌 기획(1)-거사와 출생"

청년시절 빌렘 신부와 함께 황해도서 전교활동... 안 의사 의거에 대한 관련국 반응 및 평가


▲ 중국 하얼빈시 조선민족예술관 내 안중근 의사 진열실에 설치된 김재곤 작 '안중근상'. 평화신문 자료사진

▲ 조선민족예술관 내 안중근 의사 진열실 내에 설치된 안 의사 거사 장면 조각. 평화신문 자료사진



   '평화의 사도'로, '구국의 횃불'로 빛날 안중근(토마스, 1879~1910) 의사. 초대 한국통감을 지낸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를 안 의사가 처단한 지 26일로 꼭 100주년을 맞는다. 이에 안 의사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기념해 그의 의거와 삶, 신앙, 동양평화론을 되새기는 기획을 연재한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께 중국 하얼빈역.

 "탕, 탕, 탕-"

 3발의 총탄에 총리대신을 세 차례나 지낸 일본 정계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졌다. 을사늑약의 한을 안고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 의병을 일으킨 청년의 총탄이 69살 한국 침략 원흉의 가슴을 꿰뚫었다. 또 다시 울린 3발의 총성에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가와가미 도시히코(川上俊彦)와 궁내부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森泰二郞), 만철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가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청년은 러시아 헌병대에 붙잡혀 쓰러지면서도 가슴에 성호를 긋고 외쳤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크게 외쳤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총탄 3발에 치명상을 입고 열차로 옮겨진 이토 히로부미는 20여 분 뒤 절명했다. 그해 1월, 러시아 연해주 연추(크라스키노)에서 안 의사와 동지 11명이 왼손 약지를 끊어 구국 단지혈맹을 맺고 동의단지회를 결성, 조국의 독립 회복과 동양평화를 맹세한 지 9개월 만이었다.

 성명 안응칠(安應七), 나이 31살, 신분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이었다.

 붙잡히자마자 "독립전쟁 중 적의 괴수를 처단 응징했다"고 당당하게 밝힌 안 의사의 거사는 당시 한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등지에서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100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안 의사의 거사는 정당행위냐 암살이냐 논란이 분분하다. 신앙인으로서 사람을 죽인 것이 정당한지, 또 독립전쟁 수행인지, 단순 테러인지를 놓고 반응이 엇갈린다. 침략 당사자인 일본은 암살로 단죄하고, 일제 침략으로 국운이 꺼져가는 촛불과도 같았던 우리나라 백성들은 의거로 보는 견해 차이는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제3자 격인 중국이나 러시아의 반응이 의미심장할 것이다. 한국과 함께 일제 침탈을 받고 있던 중국은 당시 정당행위로 평가했지만, 러시아는 범죄 혹은 정당행위로 엇갈린 반응을 내놓고 있다.

 그래서 신해혁명의 주역 쑨원(孫文)의 반응이 특기할 만하다.

 "그 공(功)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나니 100살의 삶은 아니나 죽어 천추에 빛날 것이다."


   #갑신정변, 그리고 동학농민전쟁이 전기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 수양산 아랫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 마리아 사이 3남 1녀 중 맏아들로, 아명과 자는 응칠이었다.

 그의 인생 역정이 전기를 맞게 되는 것은 1884년 갑신정변과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다. 개화파였던 그의 아버지는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 유학이 무산돼 귀향했다가 수구파의 탄압대상이 되자 일가 식솔 70~80명을 이끌고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주한다. 자연환경이 빼어난 청계동의 어린 시절은 그의 성품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특히 엄하고도 따뜻했던 조부 안인수의 영향을 깊게 받은 그는 14살 되던 해 조부가 타계하자 반년간 앓아누울 정도로 상심했다. 어린시절 안중근에게 미친 조부의 그늘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래서인지 8~9년 가량 서당에 다니며 학문을 배웠으면서도 학문을 등한시하고 사냥을 즐기며 자연스럽게 말타기와 활쏘기, 사격술을 익혀 이름을 날렸다.

▲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1911년 2월 방한, 4개월간 국내에 체류한 노르베르트 총아빠스가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 안 의사의 집을 찾아 유족들을 찍었다. 안 의사 유족을 촬영한 사진으로는 가장 오래된 이들 사진 원본이 성 베네딕도회 한국 파견 100주년을 3년 앞둔 2006년 국내에 반입돼 최근 교회에 공개됐다. 사진제공=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 안중근 의사의 신앙의 모태가 된 청계동성당 내부 제대. 사진제공=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연합회 초대 수석아빠스인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가 1911년 청계동성당을 방문하자 신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청계동본당은 안중근 의사의 부친인 안태훈 베드로의 노력으로 세워진 청계동공소를 모태로 설립된 본당 공동체로, 안 의사 또한 1897년 1월 이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사진제공=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농민군과 전투 벌여 승리

 16살 되던 1894년 자신보다 한 살 위인 김아려(아녜스)와 혼인한 그는 곧 동학란이 발발하자 아버지 안태훈을 따라 농민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한다. 안태훈은 이때 노획한 쌀 500석(1000여 포)을 군량미로 쓴 게 문제가 돼 훗날 곤경에 처한다. 1895년에 이어 1896년 수구파인 전 선혜청 당상 민영준이 거듭해 군량미를 상환하라고 압력을 가하자 서울에 상경해있던 안태훈은 종현(현 명동)성당으로 피신, 성서를 읽고 강론을 들으며 입교를 결심한다.

 그해 7월 양곡 상환 문제가 해결돼 청계동으로 돌아온 안태훈은 귀향하며 지니고 온 교회 신심서적을 가족과 인근 주민들에게 나눠주며 의욕에 찬 전교활동을 시작한다.

 이에 청계동과 인근 마을에서 개종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아버지 안태훈(베드로)의 영향으로 1897년 1월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한 안중근은 이듬해 4월 청계동본당이 설립되자 빌렘 신부와 함께 황해도 여러 고을을 다니며 전교활동을 벌인다.

 이때 상황과 강연 내용이 그의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에 무려 16쪽에 걸쳐 상세히 기록돼 있다.

   #강연 내용 자서전에 수록

 "지금 세계 문명국의 박학다식한 지성인으로서 천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세상에는 옳지 않게 전하는 무리 또한 대단히 많은데, 이는 예수께서 미리 제자들에게 예언하신 것으로, '후세에 받드시 위선자들이 있어 내 이름으로 민중들을 현혹시킬 것이니 너희들은 삼가 그러한 잘못에 빠져들지 말라.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다만 천주교회의 문 하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바라건대 우리 대한의 모든 동포 형제들이 이를 크게 깨닫고 용기를 내어 지난날 죄와 허물을 깊이 참회함으로써 천주님 자녀가 돼 현세를 도덕시대로 만들어 다같이 태평을 누리다가 죽은 뒤에 천당에 올라 무궁한 영복을 함께 누리기를 천만번 바라고 바랄 뿐입니다."

 이처럼 청계동본당을 중심으로 교회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면서 그는 신자들의 총대(總代)로 추대돼 교회 안팎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서울에 사는 전 참판 김중환이 옹진군민의 돈 5000냥을 빼앗은 일과 해주부 지방대병영 위관 한원교가 옹진군민 이경주의 집과 재산, 부인을 강제로 빼앗은 일 등이었지만, 안중근은 뜻을 이루지 못한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전대식 기자 jfa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