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강론.묵상

[스크랩] 연중제19주일(090809)

도구 Ludovicus 2009. 8. 9. 08:21

<연중 제19주일>(2009. 8. 9.)

 

<나는 생명의 빵이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몸을 먹는 일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예수님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서 로마시대 때에는 신자들이 식인종들이라고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은

예수님과 완전한 결합과 일치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행위가 아니라 실제적인 일입니다.

 

예수님과 완전한 결합과 일치를 이루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력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고,

내가 예수님의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엇이든 존재의 목적과 의미가 있습니다.

그 목적과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각자 할 일이지만,

아무것도, 어떤 사람도 아무 의미 없이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이,

또는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이 인생이 허무하다고 말할 뿐입니다.

 

전쟁 중에는 자살률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세계 대전 때에도, 6.25 때에도

전쟁으로 죽은 사람은 많았지만 자살한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합니다.

장애인들의 자살률도 비장애인과 비교할 때 아주 낮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 뭔가를 얻었다가 잃은 사람들입니다.

처음부터 얻지 못했다면 잃을 것도 없었을 텐데...

 

그런데 그 얻었다는 것이 그다지 의미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얻어서 가지고 있어도 별로 의미가 없는데,

그것마저 잃어버리니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나로 존재하기 위해 추구해야 하는 의미,

내 존재의 목적을 바로 알고 찾아가야 합니다.

-------

 

예수님에게서 자기 존재의 목적을 찾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우리들입니다.

 

그것은 마치 처음에는 여기저기 다니면서 기웃거리고,

왜 살아야 하는지, 인생이란 무엇인지 묻고 다니다가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그래서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깨닫게 되고,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살기로 결심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그런 과정을 겪지 않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내적으로는 대체로 그런 과정을 겪게 됩니다.

 

처음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도들이 그랬습니다.

'나를 따라라.' 그 한 말씀에 홀려서 따라나선 것이 아닙니다.

따라 나설 준비가 이미 되어 있었기 때문에 따라간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그것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맨 처음에 제자가 된 사람은 안드레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안드레아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찾느냐?"

 

이 말씀은, 네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으로 해석됩니다.

그 질문에 안드레아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선생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이 말은 예수님의 삶을 보고 싶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와서 보아라."

 

안드레아와 또 한 명의 제자는 그날 그분과 함께 지냅니다.

그리고 제자가 되기로 결심했고,

자기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갑니다.

 

안드레아가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그 하룻 밤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무슨 대화를 했으며, 무슨 가르침을 들었을까요?

성경에는 아무 기록이 없습니다.

 

전후 상황을 볼 때,

안드레아는 예수님의 삶을 보고 그렇게 살기로 결심했을 것입니다.

교리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성경공부를 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곧 진리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깨달았기 때문에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말만 앞세우는 학자들은 신앙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자꾸 이론으로만 파고드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성체성사는 이론이 아닙니다. 삶입니다.

예수님과 일치하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삶입니다.

--------

 

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이상한 것들을 많이 들고 왔습니다.

일종의 보약들이지요.

 

주는대로 고맙게 받아먹긴 했지만,

치료제도 아니고 보약인데, 한 두번 먹는다고 당장 효과가 나타날리가 없습니다.

항생제 치료도 5주나 걸렸는데, 보약 한 두병에 금방 몸이 좋아질 수는 없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 한 끼 주면 우선 당장에 허기는 면하겠지만,

굶주림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꾸준히 먹어야 합니다.

 

영성체 한 번에 예수님의 생명력을 얻지는 못합니다.

꾸준히 긴 세월을 두고 먹어야 합니다.

 

결국 신앙생활이란 성실성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체가 기적의 음식이고, 하느님의 음식이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음식이라고 해도,

영성체 한 번에 그런 것들을 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음식의 영양분이 몸으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고,

다시 그것이 온전히 생명력으로 바뀌려면 더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성체성사의 생명력이 나의 생명력으로 바뀌려면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긴 시간 성실하고 꾸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우리는 성체의 생명력을 받아먹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면서도 죽고 말았는데,

겨우 영성체 몇 번으로 무엇을 얻기를 기대합니까?

-----------

 

사제 생활이 힘들어서 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고,

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힘들어 하는 것은 자주 봅니다.

 

신앙생활이 힘들다고 냉담하는 경우보다는

이미 마음이 식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힘들어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는 것이 힘들어서 삶을 포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삶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사람이 사는 것을 힘들어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삶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 그것은 그 자신 안에 생기가 없을 때 다가옵니다.

생기... 생명력.. 특히 하느님의 생명력을 잃어버릴 때,

실제로는 사는 것이 힘들지 않은데도 힘들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생명력을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헛된 욕망과 이기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생명력이 소모됩니다.

 

살 수 있는 사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살아남습니다.

 

하느님의 생명과 영원한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참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얻게 됩니다.

 

"사람이 한 번 죽으면 그만이지 영원한 생명이라는 게 다 무엇이냐?"

라고 비웃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결혼은 왜 하고 아이는 왜 낳습니까?

자기 이름을 남기려고 발버둥치는 건 또 무슨 이유입니까?

다 사라질 것이라면 자기 혼자만 조용히 사라지고 말 것이지,

대를 물려가면서 그 허무의 고통을 물려주려고 합니까?

종족보존본능  때문에 저절로 그렇게 된다고요?

다 사라질 허무한 종족은 왜 보존한답니까?

 

사실 하느님을 믿든 안 믿든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자기 혼자서 그것을 인정 안 하는 것뿐입니다.

 

영원한 것을 바란다면, 제대로 된 영원함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허무하고 유한한 것들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 Fr.송영진 모세
글쓴이 : Fr 송영진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