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오늘의 말씀

[스크랩] 2009년 7월 26일 연중 제17주일

도구 Ludovicus 2009. 7. 26. 06:52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9년 7월 26일 연중 제17주일

제1독서 열왕기 하권 4,42-44

그 무렵 42 어떤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 왔다. 그는 맏물로 만든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을 자루에 담아, 하느님의 사람에게 가져왔다. 엘리사는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하고 일렀다. 43 그러나 그의 시종은 “이것을 어떻게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엘리사가 다시 말하였다.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44 그리하여 그것을 사람들에게 내놓으니, 과연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이 먹고도 남았다.


제2독서 에페소서 4,1-6

형제 여러분, 1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3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4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6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복음 요한 6,1-15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저는 요즘, 매일 아침마다 보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습니다. 바로 일기예보 사이트입니다. 날씨가 그렇게 궁금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며칠 뒤에 우리 본당 Camp가 있거든요. 500명 가까운 본당 식구들이 이동하는 캠프이기 때문에 날씨가 걱정입니다. 비가 많이 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면, 좋은 의도로 시작했던 캠프가 엉망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캠프 가는 기간 동안 날씨가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수요일에 조금 흐리지만,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맑음으로 표시가 되더군요.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오늘 아침에 보니 수요일에 그 지역은 비가 온다고 되어 있더군요. ‘왜 날씨가 바뀐거야?’하면서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위안이 되기는 합니다. 캠프 기간 내내 비가 오는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이 세상은 내 뜻대로 되는 일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긴 내 앞 길이 항상 평탄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 번 고속도로를 생각해 보세요. 이 고속도로는 막히지 않고 빠른 시간 내에 목적지를 갈 수 있도록 만든 도로입니다. 그래서 신호등이 없지요. 또한 횡단보도도 없어서 일부러 멈출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만들었지만, 고속도로라고 해서 막히지 않을까요? 이 고속도로도 꽉 막혀서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 삶이 무조건 잘 되리라는 것은 어쩌면 지나친 욕심입니다. 고속도로가 막힐 수 있는 것처럼, 내 삶도 갑자기 막힐 수 있습니다. 믿었던 직장에서 해고당할 수도 있고, 믿었던 사람에게서 버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믿었던 자녀와 친구가 나를 슬프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뻥 뚫려야 정상인 것 같은 내 삶이 갑자기 막혀 있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막혀 버렸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려니’ 하면서 포기해야 할까요?

이때 우리들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경우 인간적인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의 안목으로 문제를 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오병이어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말씀하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필립보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생각하고 판단해서 대답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측면으로 생각하지도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어느 아이가 가지고 온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지요. 하느님의 측면에서 생각하고 행동할 때에만 가능한 기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 분명히 꽉 막힐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포기라는 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주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과 같은 커다란 기적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아이가 가져온 아주 작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와 같이 우리에게 아주 작은 정성만 있어도 주님께서는 우리 편이 되어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커다란 기적은 우리의 삶 안에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 기적들을 느껴 가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생활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서 참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진실로 부자인지 알고 싶다면 오늘밤에 가진 돈을 모두 잃는다고 했을 때 내일 무엇이 남게 될 것인지를 살펴보라(보에트커).



행복한 사람, 불행한 사람(‘좋은생각’ 중에서)

행복한 사람은 남을 위해 기도하고, 불행한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기도한다.

남의 칭찬을 자주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자기자랑을 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일을 보람으로 아는 사람은 행복하고, 의무로 아는 사람은 불행하다.

언제나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투덜대는 사람은 불행하다.

평생 고마웠던 일만 마음에 두는 사람은 행복하고, 섭섭했던 일만 마음에 담는 사람은 불행하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부드러운 사람은 행복하고, 자기에게 후하고 남에게 가혹한 사람은 불행하다.

자신의 잘못을 곧바로 인정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잘못했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은 불행하다.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걷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고개를 숙이고 걷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잘 된 이유를 찾는 사람은 행복하고, 안 될 이유만 찾는 사람은 불행하다.

아는 것이 적어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행복하고, 아는 것이 많아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겸손과 양보가 몸에 밴 사람은 행복하고, 교만과 거만이 몸에 밴 사람은 불행하다.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미워하는 사람이 많은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자기의 잘못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죽음이 삶의 연장이라고 태연히 받아들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죽음이 끝이라고 무서워하며 불안에 떠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할 일을 다 하고 천명을 기다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시작도 않고 요행을 기다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출처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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