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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말씀의 증거가 곳곳에 살아 숨쉬는 나라

도구 Ludovicus 2008. 11. 10. 21:08

말씀의 증거가 곳곳에 살아 숨쉬는 나라

기독교신앙의 근원지 이스라엘은 성경속의 모든일들이 사실임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주는 '증겅의 창고'다.지중해 동부해안에 위치한 고대 이스라엘은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교량적인 위치로세계 역사에서 중요한 역활을 담당했다.사람들은 이스라엘을 거쳐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고 좀더 시간이 지난 후에는 이주민과 군대,대상들이 이곳을 지나다녔다.
이스라엘에는 유물 사원 비문 각종문서등 문명의 많은 흔적이 남아있다.기독신앙과 유대교가 탄생하고 발전한 곳이 바로 이 성지 이스라엘이며 선지자들이 예언을 하고 성경이 만들어진 곳도 이곳이다.

기원전 3000년부터 1000년까지는고대 강국이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국가들이 이스라엘 만,북부지역을 분활 통치했다.그후 가나안 이스라엘 페르시아 로마 비잔틴 십자군 아랍 오스만터키인들이 이 지역에 거주했고 지금도 그들에 관한 유적이 남아있다.
독립 이전의 기나긴 기간에 이스라엘 사회는 이방인들이 남긴 문학작품이나 고대 마을,회당의 유적들은 그들이 지속적으로 이 지역에 살아왔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곳에 살았던 기독교인이나 회교도인 역시 그들의 문화적 유산을 많이 남겼다.

19세기 후반부터 종교 및 문화의 뿌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 지역의 독특한 문화유산에 대한 기원을 연구하는 여행가나 학자 성직자들의 발걸음이 잦아지고 있다.이스라엘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 역시 전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조그마한 나라지만 몇걸음만 떼면 고고학적 가치를 지닌 지역들이 산재한 곳이다.계속되는 발굴작업과 이 지역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풍부하게 하고 이것이 곧 위대한 신앙에 대한 이해로 이어질 것이다.

아기예수 죽이려 한 ‘헤롯왕’ 무덤 발견




헤롯왕의 궁전이 있는 헤로디움 전경

기독교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헤롯(Herod·기원전 74∼기원전 4년)왕의 무덤이 발견됐다고 이스라엘 일간지 하레츠가 8일 보도했다. 헤브루 대학의 저명 역사학자인 에후드 네처(Netzer) 교수팀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2㎞ 떨어진 주디안 사막의 헤로디움(헤롯의 궁전)에서 그의 무덤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무덤은 헤롯왕이 재임 중 건설한 왕궁 터가 있는 산 정상의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네처 교수는 “3주 전에 정교하게 조각된 붉은색 석회석관(石棺)과 제단의 잔해, 유골함 등이 발견됐으며 묘비를 찾기 위해 추가 발굴 작업 중”이라고 밝혔다. 석관 내에 유골은 없었다.

▲최근 발견된 헤롯왕의 무덤. /이스라엘 외무부 웹사이트

헤롯왕은 로마제국 통치 시절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유대 지방 통치자로 임명돼 34년간 통치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했고, 예루살렘 구시가 주위에 현재까지 남아 있는 ‘통곡의 벽’을 건설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그가 예수가 장차 자신을 몰아내고 ‘유대인의 왕’이 될 것을 두려워해 예수 출생 당시 베들레헴과 인근의 2세 이하 사내 아이를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하는 등 폭정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역사학자들은 그동안 헤롯왕의 무덤 위치와 장례 절차를 기록한 1세기 로마 역사학자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의 기록을 토대로 헤롯이 헤로디움에 묻혔다고 보고, 이 지역에서 1972년부터 발굴작업을 진행해 왔다. 하레츠는 이번 발견으로 이스라엘 최대의 고고학적 미스터리가 풀렸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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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의 요새, 마사다
엔보켁에서 사해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달리자 사해가 모습을 감추고 바닷물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작은 물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해의 북쪽과 남쪽을 연결해주는 수로이다. 사해는 이곳에서 끊어졌다가 수로를 통해 다시 북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북쪽 사해의 푸른 수면이 모습을 드러낼 쯤 차가 서쪽의 산악지대를 향해 진입했다. 마사다 국립공원(Masada National Park)의 웅장한 절벽 성채가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의 산들과 토양의 빛깔이 똑같아 그냥 지나쳐버리기 쉬운 천연의 요새이다.

마사다는 유대인 고위 성직자인 요나단(Jonathan)이 처음 세운 요새로, 유대왕인 헤로데스(헤롯왕, Herodes, BC37-BC4)는 도피처이자 겨울 궁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호화로운 궁전을 건설하기도 했다. 또 서기 70년 8월 예루살렘이 로마에 함락된 후, 유대인 지도자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Eleazar Ben Yair)가 이끄는 유대인 열성당원(Zealot) 960여 명이 피신해 3년 동안 로마에 저항한 곳이다.
당시 로마의 플라비우스 실바(Flavius Silva) 장군은 8천 명으로 구성된 로마 군단을 이끌고 마사다 요새 주위에 8개의 캠프를 둘러 세웠다. 험난한 지형 때문에 요새를 쉽게 정벌하지 못하자 로마군은 요새 서쪽에 나무와 흙을 이용해 거대하고 완만한 경사로를 쌓기 시작한다.
7개월 만에 경사로가 완공되고 로마군은 성벽을 부수는 도구를 갖춘 탑을 경사로 위에 옮겨왔다. 요새가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지도자인 벤 야이르는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로마군의 노예로 굴욕을 당하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가족들의 생명과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빼앗아 자유인으로서 영광되게 죽자."
로마군이 진격했을 때 요새 안은 고요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식수와 식량도 그대로 남겨놓았다. 마사다에서는 여인 2명과 어린이 5명만이 물웅덩이에 숨어 살아남았을 뿐이었다. 이 비극의 이야기는 유대인 출신 로마역사가인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에게 전해져 역사에 기록됐다.

케이블카를 타고 요새에 오르자 푸른 사해와 메마른 광야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벽면으로는 기다란 뱀이라도 지나간 것처럼 생긴 물길이 식수를 저장하는 웅덩이까지 이어져있다. 웅덩이의 물은 완전히 말라버렸지만 언제라도 비가 오면 이 안을 가득 채워줄 것 같다.
계단을 따라 오르자 경사가 완만한 평평한 모습의 정상이 펼쳐진다. 따가운 햇살이 내리비춰 누런 빛깔의 평지는 더욱 광활해 보였다. 2000년 전 유대인의 주거지와 맷돌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창고를 지나자 헤로데스가 지었다는 북쪽 궁전(Northern Palace)의 맨 위쪽 건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이곳에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헤로데스와 그의 가족들을 위한 침실과 전망대가 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멀리 사각형, 마름모꼴의 로마군 진지들이 아득한 사해를 배후로 삼아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전망대 바로 아래에는 둥근 형태의 궁전 연회장 흔적이 벼랑의 바위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다.
가파른 서쪽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 벼랑을 깎아 낸 길을 따라가 연회장에 도착했다. 둥그런 벽을 둘러 기둥이 있었다고 하지만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다시 아래쪽으로 내려가자 또 다른 사각형의 연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부 기둥은 무너졌지만 기둥 중에는 상층부에 아칸서스 잎을 양각한 코린트식 문양을 고스란히 간직한 것들도 있다.

동쪽의 계단 아래에는 온탕, 냉탕, 열탕을 갖춘 작은 목욕탕이 있지만 철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마사다 유대인의 최후의 날을 엿볼 수 있는 옷가지와 샌들, 무기 등의 유적과 해골, 여자의 땋은 머리카락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다시 정상으로 올라 서쪽 벼랑을 따라 가자 유대교 회당(Synagogue)과 비둘기사육장이 나타났다. 지금은 비둘기가 없지만 당시 이곳에서 키우던 비둘기는 식용으로 사용되었고, 배설물은 비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비둘기사육장 옆쪽의 전망대 아래로는 경사진 흙더미가 아래에서부터 요새의 성벽 아래까지 쌓여있다. 로마군이 이곳을 정복하기 위해 쌓았던 흙더미다. 그 뒤로는 로마군의 또 다른 진지 흔적이 남아있다. 이곳을 통해 진입하며 질러대던 로마군의 하늘을 찌를 듯한 함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마사다는 사해 서쪽 해변에 위치하고 있는 천연요새로서 전체가 자연 바위로 이루어졌다.  이 천연요새는 융기현상으로 생겨났으며, 사면이 모두 깊은 계곡으로 둘러 쌓여 있다. 마사다는 이런 독특한 지형 때문에 주변의 산들과 완전히 격리되어 있다. 마사다는 사방으로 거의 직각에 가까운 400m 높이의 절벽이 둘러있으며, 정상은 20에이커 정도 크기의 평평한 돌 바닥으로 되어있다. 마사다는 '요새'라는 의미의 히브리어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숨어 지냈던 '황무지의 요새'는 곧 마사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삼상 22:4; 24:22)

   마사다가 처음으로 요새화 된 것은 하시모니안왕조의 요나단 시대(기원전 103-76년)이다. 그 이후 헤롯은 권력투쟁의 와중에 잠시동안 마사다를 가족들의 피난지로 사용한 적이 있었다. 기원전 37년 헤롯이 로마의 후원으로 유다의 통치자가 된 후, 그는 마사다를 완벽한 요새로 재건하였다. 그가 이곳을 요새화 시킨 것은 외적의 침입이나 유대인의 반란과 같은 비상사태가 일어날 때 도피처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헤롯은 마사다 정상에 두 겹의 성벽을 쌓고 그 안에 훌륭한 궁전을 비롯하여 저수조와 창고들과 같은 부대시설을 건축하였다. 헤롯이 죽고 난 후 로마는 작은 규모의 군대를 이곳에 상주시키면서 마사다 요새를 지켰다. 유대인 역사와 관련하여 마사다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로마와의 제1차 유대인 전쟁을 주도하였던 열심당원들에 의해서다. 전쟁 초기 열심당원들은 이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로마군인들을 모두 축출하였다. 그러나 전쟁 말기에 예루살렘이 점령당하게 되자 1000여명의 열심당원들과 그의 가족들은 이곳 마사다로 옮겨와 로마와의 대결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때부터 마사다는 유대인항쟁의 상징이 되었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티토는 실바장군을 시켜 마사다에 항쟁을 계속하고 있던 열심당원들을 섬멸하도록 명령하였다. 로마군대는 3년 동안 마사다를 포위하고 정상공격을 시도하였지만 워낙 난공불락의 천연요새이기 때문에 쉽게 점령할 수가 없었다. 로마군대는 마침내 마사다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거대한 인공 축대를 마사다 서쪽편에 쌓았다. 그리고 73년 5월 2일 드디어 로마군은 인공축대를 사용하여 마사다 정상을 정복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로마군이 마사다의 정상을 점령하기 직전에 그때까지 남아 있던 열심당원들은 집단 자결을 결행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도자였던 '엘리아셀 벤야일'의 제안대로 로마의 노예가 되기보다 자유로운 몸으로 자결하는 편을 선택한 것이다.  정상을 정복한 로마군인들은 승전의 축배를 마시기 전에 마사다 정상에서 장엄하게 죽음을 맞이한 960여명의 열심당원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마사다에서 일어났었던 마지막 일들은 요세푸스의 유대인 역사책에서 잘 전해주고 있다.



가이사랴의 수로
헤롯왕이 세운 지중해변 항구 도시 가이사랴 지방에 남아있는 수로.

황금의 도시, 영원한 도시, 평화의 도시인 예루살렘은 3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역사의 중심에서 아직도 꿋꿋하게 살아 숨쉬는 이스라엘의 수도이다.

아무런 보잘 것 없는 풍경과 전무한 상태의 부존 자원을 가진 유대 광야의 동편 가장자리에 우뚝 솟아있는 이 도시를 성경은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시 125:2) 하였다. 이런 아무 쓸모없는 땅이 하나님께 선택함을 받았고, '일신교의 보루로서', '세계인의 성도' 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불모의 언덕에서 유명한 철학자들과 선지자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설교와 도덕적 계율들, 그리고 한 형제로서의 사랑을 가르치셨고 실수와 우상숭배로 인해서 눈 어두워진 이 땅의 사람들에게 바른 판단의 기준과 신앙적인 확신을 심어준 신앙의 틀을 짠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 (미 4:2)

이곳은 전인류의 절반이 종교적인 수도로 믿고 있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옛날의 영광이요 미래 희망의 상징이며, 기독교인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이 펼쳐진 곳이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생생하게 지켜본 도시이다. 또한 회교도들은 이곳이 선지자 모하마드가 승천한 곳이라 믿고 있다.

예루살렘은 신앙과 평화의 원천이며, 가장 신성한 도시인 동시에 테러와 전쟁의 피가 끊임없이 흘려진 곳이다. 즉, 칼이 오랜 동안의 역사를 거쳐오면서 이들의 자손들을 괴롭혀 왔던 것이다. 지구상의 어떤 도시보다도 많은 전쟁을 거쳐왔고, 사람들의 피로 바다를 이룬 적이 수없이 많았었다. 무려 50차례 이상을 포위 공격 당했으며, 36차례에 걸친 정복과 10차례의 심한 파괴를 당했다.

예루살렘의 시초는 고대사 속에 묻혀 있어 알 길이 없지만, '평화'라는 뜻의 '살렘'(salem) 이라는 이름으로 가나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창 14:18), 또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사람이라" (겔 16:3) 하였다. 사실상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곳이 된 것은 주전 10세기에 다윗 왕이 여부스 족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정복해서 그의 수도로 삼고 (삼하 5:6 ~ 10), 여호와의 언약궤를 이곳으로 옯겨온 (삼하 6:1 ~ 23) 이후라고 말할 수 있다. 이후 다윗성(City of David)이라고도 불리웠으며, 자신을 포함한 역대 왕들의 무덤이 되기도 하였다.

통곡의 벽(Wailing Wall)

유대인의 마음의 안식처요, 성지 중의 성지다.

그러므로 6년 전쟁 때 예루살렘성을 탈환하면서 통곡의 벽을 장악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조상들의 손때가 묻은 성벽에 각별한 감동을 느끼는 유대인들은 7세기경부터 기도의 구심처로 정하고, 세계의 어느 곳에 살더다도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여 왔다.

해마다 아브달 9일이 되면(성전이 파괴된 날로서 7-8월에 해당함) 유대인들은 파괴된 성전의 서벽에 모여 예레미야 애가를 읽으며, 옛날을 회상하고 통곡했다.

다윗성

다윗왕은 BC 1000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이를 스스로 다윗성이라고 불렀다. 본래 1만 3,000평 정도의 작은 성읍이던 것을 솔로몬 왕이 북으로는 성전산까지 확장하고, 서쪽으로는 시온산 언덕까지 개발, 주택지구를 조성하여 성의 면모를 갖추었다.

성전산

성전산이란 모리아산의 별명으로 불리다가 굳어진 이름이다. 일찍이 히브리 족장 아브라함이 이 산에서 순종의 제단을 쌓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으며 성군 다윗이 음행과 살인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올림으로써 관용받았다.

또,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던 것을 다윗이 50세겔에 매입하여 제단을 쌓았으며, 후일 솔로몬이 부왕의 유지에 따라 이곳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하였다.

70년 성전은 로마군의 방화에 소실 되었고, 637년 예루살렘을 정복한 이슬람 교도들이 성전의 폐허 위에 사원을 건설하고 성역화함으로써 성전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황금문(Golden Gate)

감람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내려가다보면 예루살렘 옛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의 동남쪽에 있는 성전산에는 바위돔이 있고, 그 동쪽 성벽에 한 쌍의 아치문이 보이나 돌로 메워져 있어 폐문되었음을 알수 있다.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여기로 입성하셨으며,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이 문을 통해 오실 것으로 믿고 있다. 제 2 성전 시대에는 성전의 통용문이었으나, 629년 십자가(True Cross)를 이 문으로 성안 에 옮긴후 폐쇄했다고 한다.

십자군시대에는 봄에는 종려주일, 가을에는 거룩한 십자가의 날이라 하여 이 문이 두 번 열려, 기독교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입성하는 행사를 벌였다.

2. 예루살렘 크리스천 구역

십자가 수난의 길

원명은 '슬픔의 길'이란 뜻인데, 예수께서 빌리도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신 후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신 길이기에 '십자가의 길'이라고도 한다. 18세기 이전에는 예수께서 멈추신 곳(station)을 7개처로 보았으나 1700년대부터 14개처로 늘어났는데, 그 모두가 역사적으로 실증되지는 않았지만, 이 길을 걸으며 14개처마다 멈추어 서서 고난의 의미를 새겨 보는 데 뜻이 있다. 지금도 매주 금요일 오후 3시에 십자가를 앞세우고 행진하는 순례행사가 열리고 있다.

제1처 ~ 제6처

로마 군인들은 가시나무 가지로 엮은 면류관을 예수께 씌우고 고관의 제복인 자색옷을 입힌 후 '유대인의 왕 만세'를 연달아 외치면서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리니 선혈이 낭자하였다.

빌라도가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을 유대인들 앞에 세우고, "에케 호모(이 사람을 보라)"하고 외치니 군중은,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대답하였다. 빌라도는 군중의 소요가 두려워 예수님을 내주었으며, 그들은 십자가를 예수께 지우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고 올라갔다.

오늘날은 제1처부터 제6처까지가 모슬렘 구역에 있다.

제1처 :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은 장소

사자문을 들어서서 100m쯤 가면 왼쪽에 있는데, 지금은 아랍인 국민학교가 되어 있으며, 예수께서 서셨던 자리에는 막대기를 세워 놓았다. 발굴자는 이곳을 빌라도의 법정 자리라고 주장하였다.

제2처 :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곳

아랍인 국민학교의 길 건너편에 있는 수녀원 지하층에서 발견되었다.

잘 다듬어진 포석으로, 예수께서 빌라도의 법정 밖에서 가시 면류관을 씌고 십자가를 지신 장소이다

제3처 :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처음 쓰러진 곳

쓰러지신 자리에 세워진 작은 폴란드 교회의 출입문 탱팡에는 예수님의 모습이 새겨져있다.

제4처 : 예수께서 어머니를 만나신 곳

마리아가 예수님을 바라보자 경련을 일으켰다고 하는 자리에 아르메니안 교회가 있다. 그 출입문의 탱팡에 예수님과 마리아의 상이 새겨져 있다

제5처 :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운 곳

오늘날 이 자리에는 9세기에 건립된 프란체스코 교회가 있다.

제6처 : 베로니카가 예수께 땀닦을 손수건을 건네드린 곳

베로니카 교회의 출입구로, 오른쪽 끝에 보이는 기둥이 있는 자리가 바로 제6처라고 한다. 가톨릭 전승에 의하면 베로니카가 돌려받은 손수건에는 예수님의 땀이 배어 그분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제7처 ~ 제14처

예수님을 뒤따르는 행렬이 굽이굽이 이어졌고, 그 중에서도 바싹 뒤따르던 여인들은 통곡하였다.

예수께서 여인들을 돌아다 보시고,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하고 위로하시며, 예루살렘의 재난과 파괴를 말씀하셨다.

오늘날은 제7처부터 제9처까지가 크리스천 구역에 있다.

제7처 : 골고다언덕을 행해가시다가 두번째로 쓰러진곳

제8처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경고하신 곳

제9처 : 예수님이 세번째 쓰러진 곳

제10처 : 성묘교회 내부 정상에 예수님이 못박히기 위해 옷을 벗긴곳

제11처 :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곳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벗겨 제비뽑아 나누어 가졌다. 빌라도 총독이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붙였고 군중은, "유대인의 왕이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하고 조롱하였다.

제12처 :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곳

제13처 : 운명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린 곳

성묘교회 내의 골고다에 이쓴 '마리아의 슬픔'제단으로,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받아 안은 자리에 마련된 것이다.

제14처 : 예수님의 기념 묘소로 예수님 무덤교회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예수님의 장례는 다음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약식으로 치러졌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무덤을 찾아가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들에게 뛰어가 알렸다.

그들이 무덤으로 달려가서 예수님의 머리를 쌌던 수건과 삼베가 개켜져 있는 것을 보고서야 시신이 없어진 사실을 믿었으나,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은 깨닫지 못하였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 밖에서 슬피 울고 있었을 때 예수께서, "여인아, 왜 우느냐"고 하셨다. 마리아는 동산지기인 줄 알고,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에나 두었는지 알려 주시오. 내가 모셔 갈테니"라고 하였다.

너는 가서 너의 형제들에게 내가 곧 아버지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전하라"고 하셨다.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알렸으나 반신반의하였다. 그때 예수께서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하시니 그들이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고 기뻐하였다.

안나 수도원

그리스 가톨릭 백의신부를 배출하던 신학원의 입구로, 이 문으로 성지 순례자들이 끊임없이 드나든다. 안으로 들어가면 정원이 있고, 정원 너머로 기적의 못 베데스다와 옛 교회 유적이 있다.

베데스다 연못

안나 교회의 후원 서쪽에 있던 저수지로, 주의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저어 물이 움직일 때 맨 먼저 들어가면 어떤 병에 걸렸더라도 낫는다는 소문을 들은 난치병자들이 모여들었다.

못가에는 행각 5채가 있어서 각종 병자들이 즐비하게 누워 못물이 움직이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예수께서 38년 된 병자를 보시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3. 시온산 아르메니아 구역

시온산(Mt.Zion)

시온산에서 초대 기독교의 성령운동이 시작됨으로써 예수님의 복음은 전세계로 퍼져 나갔으며, 메시야 왕국이 이 산에서 건설된다는 전통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유대 민족에게는 단합의 구심점이 되었다. 복음시대 이후 모든 기독교인들은 시온을 상징적인 본향으로 삼아 시온성이라 불렀고, 그 영광을 '시온의 영광' 이라고 하였다. 해발 770여 m의 고원지대이지만, 예루살렘에서 바라보면 구 예루살렘성 남벽에 잇닿은 시가지만 보일 뿐 산의 형태는 찾아볼 수 없다.

시온문

예루살렘성 남벽 서쪽의 시온산으로 통하는 문이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 알메니아 구역으로, 비쟌틴 시대의 중앙 대로인 카르도, 중세시대의 회당 등이 있고, 고대 성벽의 폐허가 있어 구약 성서시대를 보여 준다.

문 밖에는 다윗 기념묘와 마가의 다락방, 가야바의 집등이 있어 순례자들이 많이 찾는다.

다윗왕의 무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과 다윗을 조상으로 내세우며, 특히 다윗왕을 존경하여 그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시온산 마루에서 남쪽으로 50m쯤 비낀 곳에 있는 그의 무덤은 기념묘이지 실제 무덤은 아니나, 유대인들은 이곳에 다윗왕이 있다고 믿으므로 그들의 성소가 되어 있다.

석실안에 '다윗왕의 별'을 수놓은 남색 우단 천이 덮인 석관이 있고, 그 뒤에는 은으로 도금된 토라 통 2개와 등잔과 촉대가 세워져 있다. 뒷벽에도 역시 '다윗왕의 별'과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살아서 여기 있다'라는 글을 수놓은 우단 천이 쳐져 있다.

석관의 보에 수놓은 '다윗의 별'은 이스라엘 국기의 표상이 되어 있다. 유대 여인이 석관을 두 손으로 짚고 다윗왕을 부르며 기도하고 있다.

마가의 다락방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밤 제자인 마가의 어머니 집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잡수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써 그리스도의 봉사적 자세를 몸소 가르치셨다. 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부활 승천하신 뒤 제자들은 이곳에 자주 모였다.

가룟 유다 대신 맛디아를 제비뽑아 사도의 반열에 영입하였으며, 사도들과 마리아를 비롯한 제자들이 열심히 기도하던 중 마침내 오순절에 성령의 강림을 체험하고 방언을 말하게 되었으며, 예수님의 복음이 사도를 통해 처음으로 전파되어 나갔다.

고대 유럽 건축양식인 아치식 건물로, 십자군 시대에 중수되었다. 가운데에 있는 기둥이 벽기둥과 연결되어 곡선 천장을 이루고 있다.

베드로 통곡교회

마가의 다락방에서 동쪽으로 500m쯤 비탈길을 내려간 언덕에 있으며, 공식적인 명칭은 갈리간투교회 (St. Peter in Gallicantu Church)로 'Gallicantu'란 '닭이 운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잡혀간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바깥뜰에서 지켜보던 베드로는 가야바의 여종 으로부터 '너도 갈리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고 지적당하고, 또 다른 두 사람에게 고발을 당하고도 그 사실을 거듭 거듭 부인하였을 때 닭이 울었다.

그는 예수께서, "닭이 울기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문득 생각나서 밖에 나가 통곡했다. 이 교회는 1931년 가야바의 집터로 추정되는 자리에 세워졌다.

기혼 샘

'기혼'은 히브리어로 '물을 내뿜다' 또는 '처녀샘'의 뜻이다. 예루살렘성의 유일한 수원 이었으며, 예전에는 풍부한 지하수가 솟아 기드론 골짜기로 흘러 기드론 시내를 이루었다. 다윗왕의 아들 솔로몬은 이 샘가에서 부왕의 뜻을 따라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왕위에 올랐다.(왕상1:33-34)

지하에서 솟는 샘물이 허리까지 찬다. 3,000여년 전 여부스 사람들이 바위를 뚫어 이 물을 예루살렘성 안의 실로암못까지 끌어 들였다

히스기야 터널

BC 710년경 유다 왕 히스기야가 앗수르의 침공에 대비하여, 예루살렘 지역의 유일한 수원인 기혼샘의 입구를 돌로 막아 외부에서는 이용할 수 없도록 한 다음, 암벽을 뚫고 수로를 만들어 샘물을 성 안의 실로암못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적의 장기 포위를 불가능하게 하였다.

이 터널 수로는 기혼과 실로암에서 S자로 동시에 굴착하여 두 못을 연결하였는데, 길이가 535m이며, 고대의 공법으로서는 기술이 뛰어나 터널이 맞뚫렸을 때 오차가 30cm밖에 나지 않았다고 한다.

실로암 연못

다윗성의 서남쪽 구석에 만든 저수지로, 히스기야 터널을 통해 기혼샘의 물이 공급되었다. 물이 맑고 깨끗하여 성전 제단에서 사용하였고, 병을 고치는 신통한 물로도 알려졌다.

예수께서 소경의 눈에 침으로 이긴 흙을 붙여 주시고 실로암 못에서 씻으라 하시니, 소경이 말씀대로 하고 난 뒤 눈을 뜨게되었다. 옛날 유대인들은 명절 때면 이 못에서 <이사야서>12장의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를 읋었다.

1세기경 모래가 쌓여 히스기야 터널은 잊혀졌으나 기혼 샘물은 계속하여 스며들었다. 5세기경에는 못터에 '구세주의 빛'이라는 교회가 세워졌는데, 그 주랑 주변에는 병을 고치려는 환자들이 즐비하게 누워 있었다. 614년 교회가 파괴된 후 재건되지 않아 지금은 돌조각만 뒹굴고, 조그만 모스크가 못가에서 있을 뿐이다.

4. 감람산 예루살렘 서북지역

감람산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쪽, 기드론 골짜기 건너에 있으며, 예로부터 감람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여졌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감람산은 다윗왕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하여 맨발로 울면서 올라간 곳 이며(삼하 15:30), 솔로몬이 만년에 하나님을 떠나 우상의 신당을 세워 범죄했으므로 '멸망산'이라고도 하였다.(왕하 23:13) 신약성서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끝부분과 관련되어 있다. 베다니와 벳바게를 거쳐 감람산을 지나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막 11:1 이하)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원에서 쉬셨다. 또, 이곳 에서 마지막 만찬 후에 밤새워 기도하셨고, 가룟 유다의 입맞춤을 받으셨으며, 부활하신 후 승천하셨다.

1967년 6일전쟁으로 예루살렘이 통일수복되기 전만 해도 유대인들은 감람산에 올라가 성전산을 바라보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도하였다.

겟세마네 동산

감람산 서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동산으로, '겟세마네'란 '감람유(olive-oil)를 짠다'는 뜻의 히브 리어이다.

이곳에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밤새워 기도하며 번민하시다가, 가룟 유다의 배신의 입 맞춤을 신호로 로마군에게 잡혀가셨으므로 기독교인은 이 동산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피땀을 흘리면서 기도하신 자리에 만국교회가 있는데, 수령 2,000년이 넘는 여덟 그루의 감람나무가 돌담을 따라 둘러섰으며, 예수께서 잡히실 때 베드로가 칼을 뽑아 제사장의 종 말고(Malchus)의 귀를 자른 자리에는 동굴교회가 세워져 있다.

만국 교회

세계 14개국에서 모금하여 지은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이 이슥하도록 번민 하고 기도하신 겟세마네 동산의 바위 위에 세워졌으므로 고민교회 또는 겟세마네 교회라고도 한다. 교회 안에 예수께서 엎드려 기도하셨다고 하는 큰 바위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1924년 이탈리아 건축가 A.바를루치가 설계 건축하였다. 전면의 용마루에 십자가를 쳐다보고 있는 한 쌍의 사 슴은 다윗을 상징한다.

탱팡에는 예수께서 하나님과 인생 사이의 중보로서 알파와 오메가란 그리스 문자를 들고 있는 그림이 있고, 4개의 기둥머리 위에는 4복음서의 기자가 복음서를 펴들고 서 있다.

다메섹 문

예루살렘성 북쪽 성벽에 있으며, 토착민들이 많이 이용한다. 예루살렘성이 공격당할 때는 항상 제일목표가 되었기 때 문에 침략자들에게 자주 유린당하였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시장거리는 토착 아랍인.유대인 등과 관광객 이 어울려 난장판을 이루고 있다.

히브리 성경에 세겜이라는 곳이 아랍인들에게는 나블루스라고 불렸으므로 이 문을 유대인은 세겜문, 아랍인은 나블루스문이라고 불렀다. 헤롯 시대의 성문 기초는 십자군시대에 수축되었고, 동쪽 밑에 는 로마시대에 통용된 문이 있다.

동산무덤

다메섹문에서 북쪽으로 250m 지점에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골고다 언덕과 예수님의 무덤이 성묘교회 안에 있다는 설에 대해서, 19세기말 영국의 예루살렘 주둔군 사령관 C.고든 장군이 예루살렘의 지형적 구조를 들어 이곳을 곧 예수님의 무덤이라고 주장하기 전까지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1894년 영국인들은 고든 장군의 주장에 따라 이곳 을 보존하기 위하여 2,000 파운드를 내고 그 지역을 매입하였다.

동산 무덤에서 나블루스쪽으로 왕들의 무덤이 있다.

아인카렘

새 예루살렘의 중심부에서 서북쪽으로 국립중앙의료원(핫닷사)을 향하여 3Km쯤 가면 오른쪽으로 깊숙이 내려다보이는 골짜기에 있다. '아인 카렘'은 '포도원의 샘'이라는 뜻이며,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한 후 예루살렘 행정구역 에 편입되었다.

세례요한이 이곳에서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머니 엘리사벳에게 동정녀 마리아가 방문 하여 문안하였을 때 아이(세례 요한)가 뱃속에서 뛰놀았다고 한다.

엠마오

성경에는 예루살렘에서 25리(60스타디온, 11Km) 되는 곳에 엠마오가 있다(눅 24:13)고 하였으나, 이것만 가지고는 현 재의 위치를 단정하기 어렵다.

학자에 따라 예루살렘을 기점으로 북서쪽 15Km 지점의 쿠베이바(Qubeiba), 남쪽 12Km 의 알타스(Artas), 서쪽 11Km의 아부고시(Abu Ghosh), 혹은 서쪽 28Km의 라트룬(Latrun)을 엠마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에 글로바와 그의 친구가 엠마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 다는 사실이다.

에발산과 그리심산

에발산은 저주받은 산으로, 그리심산은 축복받은 산으로 성경에 예시되어 있는데, 실제로 오른쪽의 에발산은 메말라 나무가 없고, 왼쪽의 그리심산에는 수목이 울창한다.

세겜

에발산과 그리심산 사이에 있는 아랍인의 도시로, 사마리아 지방의 중심지며, 예루살렘에서 정북쪽으로 50Km쯤 떨어져 있다. 아랍인들은 나블루스(Nablus)라고 한다. 여기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어서 성지 순례자들이 반드시 찾는다.

사마리아

세겜에서 북쪽으로 14Km쯤 가면 세바스디아(Sebastia)라는 마을이 있다. 지금은 낙후된 아랍인들의 취락이지만 이스라 엘 북왕국의 수도 사마리아성이 있었다.

전통을 이어온 사마리아인은 400명뿐인 희귀민족으로, 그리심산에 모여 살고 있다.

야곱의 우물

세겜에 있는 그리스 정교회 구내에 있다. 깊이 35m나 되며 특별한 약효가 있어 찾는 이가 많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 인과 대화하신 바로 그 우물이라고 전해지며, 수가성은 여기에서 동쪽으로 2Km쯤 떨어져 있다.

벧엘

에발산과 그리심산 사이에 있는 아랍인의 도시로, 사마리아 지방의 중심지며, 예루살렘에서 정북쪽으로 50Km쯤 떨어져 있다. 아랍인들은 나블루스(Nablus)라고 한다. 여기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어서 성지 순례자들이 반드시 찾는다.

5. 예루살렘 남부지역

베들레헴

베들레헴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곳으로, 헤브론과 함께 유다 지파의 역 사적 중심지이다.

초입에는 야곱의 아내이며 요셉의 어머니인 라헬의 무덤이 있어, 성서의 역사적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해발 770m의 언덕위에 자리잡은 이곳에는 감람나무가 많으며, 구유의 광 장을 중심으로 하여 탄생교회가 있고, 언덕을 내려서면 목자의 들판에 동굴과 교회가 있다. 또 다 윗왕의 출생지로, 그후 수천년 동안에 주인과 주님들이 송두리째 바뀌어 지금은 아립인의 주거가 되었다.

성탄절이 세계적 명절이 되어 있는 오늘날, 베들레헴에서는 교파에 따라 12월25일을 비롯 해서 1월6일, 1월19일에 축하행사를 가진다.

능선의 큰길을 따라 남쪽으로 28Km쯤 가면 마므레, 곧 아브라함과 관계가 깊은 헤브론에 당도한다. 이곳에 있는 수령 1,000여년의 상수리나무를 아브라함 의 제단과 거처로 지목하고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아브라함이 은 400세겔을 주고 사서(창 23장) 아내 사라를 안장한 막벨라 동굴이 있으며, 후일에 아브라함, 이삭, 리브가, 레아도 여기에 묻혔다. 원래는 헤롯왕 당시에 지어진 유대인의 거대한 성소였는데, 그위에 아브라함을 기리는 회교사원이 덧지어져 있다.

예루살렘 남쪽 9Km에 있는 인구 3만의 도시로, '베들레헴'은 벧(Beth,집)과 레헴(Lehem,떡)을 합친 '떡 집'이란 뜻의 히브리어이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고, 사무엘 제사장이 다윗에게 기름부어 왕권을 위임한 곳이며, 또 여기에서 예수께서 탄생함으로써 선지자 미가의 예언 이 성취되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내 게로 나올 것이라."(미 5:2) 베들레헴성의 위치는 지금과 같지만 현재의 베들레헴보다 규모가 작았으며, 여전한 것은 감람나무 와 목자의 들판, 그리고 동굴등이 남아 있어, 구세주 탄생의 유래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예수님 탄생교회

정면의 벽돌이 형형색색인 것은 여러 세기 동안 파괴와 건설이 반복된 흔적이다. 외적의 침입에 대 비하여 말이나 마차를 타고 들어올 수 없게 하기 위해 입구를 2단계에 걸쳐 축소했는데, 처음에 아 치형으로 줄였고, 다시 장방형(0.7m x 1.2m)으로 좁혔으므로 머리를 숙이고야 들어갈 수 있다.

교회안에는 예수님의 탄생동굴이 있고, 왼쪽에는 카타린 교회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그리스 정교회 와 아르메니안 교회가 연결되어 있다.

헤브론

베들레헴 남쪽 28Km에 위치하는 요단강 서안의 대표적인 도시로, 약 4만의 아랍인이 살고 있으며, 세계에서 최초로 건설된 성의 하나이다. [창세기]에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의 숲 근처에 살았다고 했는데,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원주민 헷족속 에브론에게서 막 벨라(Machpelah)굴을 사서 가족 매장지로 사용하였다.

마레사

하산 터널 동쪽 3Km 지점에 있는 평원 마레사는 선지자 엘리에셀의 고향이며, 유다 지파의 9개 성읍 의 하나로 르호보암왕이 요새를 쌓은 곳이다. 동북쪽으로 벳 세메스를 경유하여 예루살렘으로 통하며, 서남쪽 6Km에 라기스가 있다. 이 평원에 산재하는 동굴은 옛날에 주거지와 카자콤베로 이용되었는데, 비둘기가 많이 살고 있어 비둘기 동굴이라고도 한다.

라기스

마레사 서남쪽 6Km 지점에 있는 고대 유다 지방의 중요 도시로, 유다 왕국의 역사와 관련이 깊은데, 이중 성벽과 삼중문으로 구축된 요새이며 남방 방어선의 요충지였다. 그러나, BC 701년 히스기야왕 때 앗수르의 왕 산헤립에 의해 멸망되었으며, 1932년 이래 발굴이 계속되어 이때 전사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의 뼈가 커다란 동굴에서 1,500,구 이상 발견되었고, 히브리어가 새겨진 예레미야 시대의 토기도 출토되었다.

벳 구브린

예루살렘 서남쪽 52Km 지점에 있는 옛 도시로, 로마 통치시기에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전방기지였다.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93~211)가 이곳을 방문하고 주거자유지역으로 선포함으로써 '자유의 도시' 라고 부르게 되었고, 중동지역에도 널리 알려져, 3~4세기경 탈무드 지혜문학에 자주 언급되었다. 십자군시대에 기독교가 번성했으며, 12세기에 이름이 기벨린(Gibelin)으로 바뀌기도 했다.

아스글론

벳 구브린 서쪽 30Km, 텔아비브 남쪽 45Km 지점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만도시로, 성경에는 아스그론 으로 표기되어 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유다 지파에게 분배했으며, BC 12세기경 해양민 족 블레셋인이 몰려와 정착하고 이스라엘군과 빈번히 충돌했다. 블레셋인이 번영함에 따라 지중해 연 안에 가사, 아스돗, 에글론, 가드, 아스글론의 5대 성읍이 형성되었는데, 그 중에서 이곳이 상업도시로 가장 번창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이 바사(페르샤)를 토벌하면서 헬레니즘화되고, 로마 시대에 와서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으로 번영하였으며, 로마의 보호 아래 BC 104년에 독립하여 자유도시가 되었다.

바위산에 의해 원형으로 둘러싸였고, 앞은 지중해를 향해 열려 있다. 해안선을 따라 길게 펼쳐진 해수 욕장, 로마 시대의 공중목욕탕, 주랑, 여신상과 신전, 도시의 북쪽에서 발굴된 인공호수등 유적과 국 립공원이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 브엘세바

고대 이스라엘 땅의 경계 -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삿20:1, 대상21:2, 삼상3:20) - 중에서 가장 남쪽의 이 도시는 아브라함이 그랄 왕 아비멜렉과 계약을 맺은 증거로 판 우물을 이름하여 브엘쉐바라 하였는데, 이는 히브리어로 '맹세의 우물' 이라는 뜻이다. (창 21:30~31). 또 아브라함은 거기서 에셀 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창 21:33, 22:19).

이스라엘 족장시대의 족장들 - 아브라함, 이삭. 야곱, - 의 활동지로 활발하게 등장하고 있으나 그 후의 브엘세바는 많은 사건을 낳지 못하였다. 이는 BC 10세기에 살았던 시삭이 이스라엘을 점령한 후 이집트의 카르낙 신전의 벽면에 새겨 놓은 가나안의 여러 정복 도시들 가운데 브엘세바가 빠져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방의 땅의 수도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무엘이 늙은 후 그의 아들들이 브엘세바의 사사가 된 기록이 남아있다 (삼상8:1~2). 고고학적으로 이 텔 브엘세바 (Tel Beer Sheva) 는 BC 4세기 페르시아와 AD 2 ~ 3 세기 로마에 이르러 그 역사를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고대 도시와는 다른 위치에 세워진 현대의 브엘세바는 1900년 이후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스라엘의 3대도시로 확장되어 있다. 초대 수상을 역임한 벤 구리온 (Ven Gurion) 이 세운 대학이 자리잡고 있어 사막 연구로 유명하다.

이 도시를 중심으로 한 네게브 지역에는 많은 베두인 (Beduin) 들이 있어 역사의 오랜 기간동안 유목민으로서의 삶을 지켜오고 있다. 이들은 가축을 기르며 여러 곳을 떠돌아 다닌다. 어떠한 종교적 혹은 정치적 속박도 용납하지 않은 채 혈연관계의 사회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들의 엄격한 규율이나 '피의 복수법', 또는 손님을 융숭하게 대접하는 일 등에 관한 습관은 고대 이스라엘의 족장시대의 삶의 형태 (삼하 13장, 창 34장, 창 18장 ) 와 매우 유사하여 중요한 관찰과 연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매주 목요일마다 열리는 베두인 시장은 관광객의 인상적인 구경거리 중의 하나이다.

6. 갈릴리 북부지역

헤르몬 산

이스라엘 북방의 안티레바논 산맥은 서남쪽으로 뻗어내려 헤르몬산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는데, 해발 2,950m의 최고봉에서의 전망은 장관이다. 동쪽으로는 시리아의 다마스커스가 발밑에 보이며, 서쪽으로는 레바논의 두로 항을 비롯하여 지중해 연안을 끼고 악고, 하이파, 갈멘산이 전개되고, 남쪽으로는 갈릴리 평원과 호수, 그리고 구비구비 흐르는 요단강 골짜기와 사해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헤르몬산 밑에서 남쪽으로 펼쳐진 표고 1,200m 의 골란 고원(Golan Heights)은 요단강 동쪽 50Km까지 이어지는데, 이곳이 중동전쟁때의 격전장이다. 헤르몬산 서쪽 능선을 따라 13Km쯤 가면 바니아스(가이사랴 빌립보) 폭포가 있으며, 부근에 사도 베드로가 신 앙을 고백한 언덕이 있다.

가이사랴 빌립보
헤르몬산 서남쪽 13Km 지점에 있으며, 헤르몬산의
눈이 녹은 물이 지하에 스며들었다가 다시 솟아 요단강의 원 류가 되는 큰 샘이 모여 있다. 현재명은 바니아스(Baniyas)이다. 그리스시대(BC 333~63)부터 삼림의 신인 판(Pan) 을 위한 신전이 있었으며, 지진으로 파괴된 신전터에 뒹구는 돌에 그리스 문자가 남아 있다. Caesar를 기념하여 가이사랴로 명명하였으므로 이때부터 가이사랴 빌립보가 되었다. 헤롯왕의 아들 빌립 이 그 자리에 다시 신전을 세우고 로마 황제 아구스도(Augustus 신약성서에 의하면 이곳에서 사도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 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하였다고 한다. 삼림이 우거지고 수원이 풍부하며 토지가 비옥하여 풍요로운 정경이 에덴 동산을 연상시키는데, 1967년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점령하기까지는 시리아에 속하였다.

골란 고원
국경 수호를 위한 절대 요충지로, 이스라엘이 수많은 군인의 피를 흘리고 시리아로붜 빼앗아 합병한 영토이다. 이스라엘 정부가 정착촌을 세워 입주시키고 있으며, 1만여 명의 드루즈(Durze)족과 소수의 아랍인이 같이 살고 있다.

하솔
갈릴리 호수 북쪽 16km지점에 있는 고대 가나안의 수도로, 여호수아가 하솔왕 야빈과 격전을 벌인 곳이다. 이스라엘이 승리는 하였으나 완전정복하는 데는 실패함으로써 원주민이 재기하여 주도권을 장악하고 이스라엘 사람들 위에 군림하였다. 사사시대에 와서 여사사 드보라가 이끄는 바락 장군의 군대가 전멸시킨 후 완전히 정복하였고, 솔로몬왕 때 갈릴리 북방 요새로 강화되었으며, 그후 앗수르 왕 디글랏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1928년부터 발굴된 유적에서 BC2600년경의 주거 및 성곽이 드러났다.

갈릴리
남북의 길이21km, 동서의 폭14km, 넓이 170km로 하프 모양이며, '얌 긴네렛', '디베랴'또는 '게네사렛 바다'라고도 한다. 깊은 곳은 수심이 약 50m이고 지중해의 수면보다 212m나 낮다. 일대에는 겨울철에 비가 약 500mm나 내리고,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비옥하고 키브츠가 밀집해 있어 인구가 조밀하다. 주변에는 성서에서 낯익은 지명으로 가버나움, 팔복산, 디베랴, 다브가, 거라사 등이 있고, 여기에서 예수께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제자로 부르셨으며 광풍을 꾸짖어 잔잔히 하셨다. 또, 일곱 비유를 가르치시고 이 호수 위를 걸어가셨으며, 부활하신 뒤 맨 먼저 호숫가에 나타나사, 제자에게 배의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라 하여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하셨다.

가버나움
갈릴리 호수 북단에 있는 작은 어촌이다. 고대 가버나움은 세관과 회당을 갖춘 큰 도시였으나, 지금은 헐린 가버나움 회당과 베드로가 살던 집터와 몇몇 주거지 이외는 마을의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고 잡초만 무성한 거친 들판이 되었다. 이곳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으며, 많은 병자를 말씀으로 치료하시고, 천국복음을 설교하셨다.

타브가
'타브가'는 아랍어이며, 히브리어로는 '엔세바(Ein sheva)인데, '7개의 샘'이란 뜻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갈릴리 호수 동쪽 벳세다 언덕에서 일어났다고 전해지지만 기념교회는 15세기 이후 이곳에 현존한다.

오병이어 교회

예수님께서 5000명을 먹이신 기적을 기리기 위해 주후 4세기에 비잔틴 시대 교회 건축 터에 세워진 것으로, 동물 모자이크는 옛 생물의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원래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장소는 누가복음 9장에 “벳세다 고을의 빈들”로 나와 있으나, 현재 벳세다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팔복교회

갈릴리 호수 서쪽 팔복 산에 위치한 이 교회는 에수님께서 8개의 복을 가르치신 장소(마태복음 5장)에 세워진 것으로, 8복을 상징하는 8각형으로 건축되었고, 교회 내부 창에는 팔복의 말씀이 라틴어로 스테인드 글라스를 장식하고 있다.

베드로 수위권교회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 갈릴리 호숫가(다브가)에 검은 벽돌로 지었다.

교회 안에 바위 하나가 보존되어 있는데,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실때 올라서셨거나 제자들과 식사하셨던 곳으로 전해진다. 뜰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새긴 동상이 있다.

고라신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디베랴에서 로슈피나와 게네삸을 지나 동쪽으로 가면 가버나움에 닿는다. 이곳에서 북쪽 5km 지점의 언덕 위에 고라신 마을이 있다.

예수께서 이곳 주민에게 하늘나라에 대해 가르치시고 기사와 이적을 많이 행하셨으나 받아들이지 않아 크게 꾸짖으셨다.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11:21)

거라사
걸거사(Gergesa)라고도 하며 현재 지명은 쿠르시(Kursi)다.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 건너편 거라사인의 마을에 들르셨을 때 군대귀신이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신 곳으로 유명하다. 무덤과 언덕에서 밤낮으로 소리지르던 군대 귀신이 쫓겨날 때, 언덕에서 방목되던 돼지 떼에 들어가서 언덕의 비탈길을 내리달아 호수에 빠져 몰사하였다. 1967년 6일전쟁 후 도로공사를 하다가 큰 규모의 비잔틴 양식의 교회 유적이 우연히 발견되어 발굴작업이 벌어졌다. 교회 우물과 기둥, 벽체의 일부가 발굴 정리되어 있다.

나사렛

이스르엘 평원 북쪽 해발 375m의 언덕 위에 있는 도시다. 이곳에서 마리아가 천사에게서 예수님을 잉태할 것이라는 기별을 들었고,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사셨기에 '나사렛 예수'라는 말이 생겨났다.

가나

예수께서 첫 번째 이적을 행하신 곳으로 더 잘 알려진 갈릴리 지방의 가나는 매우 작은 마을이다. 나사렛에서 북동쪽 8Km에 위치한 이곳 가나 마을에 혼인 잔치가 있어 초대되신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다. 지금도 이 마을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결혼식 장면은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주고 있는 즛하여 좋은 구경거리가 된다.

예수는 왜 그의 첫 기적으로 결혼식장에서 포도주를 만든 것일까?  예수는 과연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 (눅 7:34) 이었는가?  예수의 이 기적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요한은 예수를 태초부터 계신 이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가 이 땅에 오심으로 이미 하나님 나라는 실현된 것으로 이해하는 신학을 가지고 예수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므로 요한은 예수의 가나 혼인 잔치를 천상의 어린양의 혼인 잔치 (계 19:6 ~ 10)의 선험적인 사거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무화과 나무 아래서의 만남으로부터 예수의 제자가 된 나다 엘은 바로 이 마을 출신이다. 현재 카톨릭의 프랜시스컨 교회와 희랍 정교회가 각각 하나씩 서 있어서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을 기념하고 있다.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계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 하였나이다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시니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 2:1-11)

수태고지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해 준 자리에 1955년 착공하여 1969년 준공되었다. 경내에는 세계 각국의 화가들이 그린 민족 고유의 성화가 걸려 있다.

다볼산

이스르엘 평원 중심에 있는 높이 560m의 둥근 산이다. 4세기경부터 예수님의 변화산이라는 전승이 생겼으며, 사사시대에 여사사 드보라와 하솔 장군 시스라가 이곳에 집결하여 대전을 벌였다.

이스르엘 평원과 목화밭에서 올려다본 풍경으로 산 아래에는 드보라 마을이, 산 위에는 교회가 보인다.
4세기경 비쟌틴 시대에 건립되었으나 파괴되고, 십자군 때 재건된 성과 교회가 모슬렘에 의하여 또 부셔졌다. 1911년 프란체스코 교회당과 수도원이 건립되었는데, 다볼산 예수님 변용교회라고 한다.

므깃도
이스르엘 평원의 서남쪽 끝에 위치하며,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자 전략적 요충이다.
제국의 군대가 치열한 전투를 치른 격전장을 가리켜, 최후의 전쟁터 아마겟돈(Amageddon)이라고도 부른다. 솔로몬왕은 군사요지로 강화하고 행정 중심지로 건설했으며,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아마겟돈은 'Har Megiddon'이라는 히브리어를 그리스어로 옮긴 것인데, 므깃도산을 뜻한다.

갈멜산
해발 552m로, 석회석과 백운석으로 이루어졌고, 샤론과 에스드라엘론 평원 사이에 성벽처럼 우뚝 솟아 있으며 수목도 무성하다. 산 아래로는 기손강이 흐르고 주변에는 동굴이 많다. 갈멜산 중 무라가봉 정상에는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와 대결했던 것을 기념하는 카르멜회 계통의 수도원이 있다. 1150년경부터 시작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290년경 모슬 렘에 의해 파괴된 것을 1866년 재건한 것이다.

7. 여리고 사해 남부지역

쿰란

여리고 남쪽 20Km 지점의 사해변에 있다. 1947년 사해 사본(Dead Sea Scrolls)이 발견되어 고고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하여, 1951년~56년에 프랑스 고고학자 R.드보와 영국의 고고학자 G.L.하딩이 정밀 하게 발굴하였다. 사해 사본을 기록한 에세네파 사람들의 주거지역으로, 의자와 책상과 함께 잉크가 말 라버린 잉크 스탠드가 있는 기록실이 발견되었다. 쌍둥이 언덕의 동굴에서 사해사본이 발견되었고, 반경 1Km이내에 있는 11개의 동굴에서 600여 편 의 사본을 찾아냈다. 이 중 두루마리 형태로 보존된 것이 10편이고 나머지는 수천 개의 조각들로서, 사본의 내용은 4분의 1이 구약성경이고 나머지는 쿰란 공동체가 쓰던 규율집, 구약주석, 신학문서 등이다.

사해

최장 길이 85 Km, 최장 폭 17Km  표면적 약 1,015 평방 Km 인 사해는 그 수면이 지중해보다 398m나 더 낮다. 즉 지구 표면 중에서 가장 움푹 들어간 곳이다. 구약에는 염해(Yam Hamelach = Salt Sea 창 14:3)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생물이 전혀 살지 않기 때문에 사해(死海) 라고 불리며 염도가 약 33%로서 세계적으로 염분이 가장 많은 물이다.

 

따라서 사람이 사해에 들어가면 손발을 휘젖지 않아도 몸이 저절로 둥둥 떠 있게 된다. 혹시 손발을 휘젖다가 물방울이라도 튀어 눈에 들어 간다면 눈이 쓰라려서 그 고통을 견디기가 힘들 정도이다.

보통 바닷물이 4-6 퍼센트의 염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사해물은 그 5배나 되는 것이다.

사해가 그렇게 많은 화학물질을 포함하고 있는 이유는 그 물이 흘러 나갈 구멍이 없기 때문이다.  요단강 등 주변에서 유황과 질산 성분의 물질들이 함유된 약 7백만 톤의 물이 매일 쏟아져 들어 오는데 빠져 나갈 구멍은 없고 요르단 계곡의 뜨거운 열기는 수분을 증발시킴으로써 여러 가지 화학물질 등 고체 성분만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사해의 포타슘 매장량은 전세계가 이곳에서 나는 것만 쓰더라도 100년을 쓸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포타슘은 비누, 비료들을 만드는데 쓰인다.사해 주변에는 사해 물을 분석해서 광물질을 추출해 내는 공장 들이 있다.

사해의 물은 피부병에 특수한 치료 효과가 있다고도 한다. 또한 이곳의 검은 흙은 신경통 등에 특효라고 전해진다. 세계 각국에서 치료차 사해에 오는 사람들이 있고, 이 근처에는 이들을 위한 특수 병원도 있다.

사해 지역에 위치하였던 도시로는 소돔, 고모라, 아마드, 스보임 (창 10:19) 이 있으며, 이 도시의 왕의 목록도 이어 기록되어 있다 (창 14:2), 소알 (창 13:10) 또한 이 지역의 도시였다. 성경의 보도에 의하면 이 지역은 "물이 넉넉하여 ..... 여호와의 동산" 같았으며, 이는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다" 고 해석하고 있다. (창 13:10, 사 1:10, 마 11:23~24)

고대에 이곳에 많은 물이 있었음은 고고학적으로도 확인된다. 아주 오래 전에는 적어도 사해의 물이 해발 -225 m 까지 채워져 있었으며, 19세기 연국인들에 의해 탐험되었을 때에도 현재의 수위보다 12 m 나 높았었다. 오늘날에는 갈릴리 호수로부터 흘러내려오는 요단강과 요르단으로부터 내려오는 야르묵 강의 물을 차단하여 조정하고 있기 때문에 수면이 자꾸만 낮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또, 여름철 하루 평균 수분 증발률 (25 ㎜)도 수면이 낮아지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 사해에는 보통 바다의 염분 농도보다 무려 10배가 넘는 26 ~ 33 % 의 소금이 녹아, 거의 포화상태에 이르러 여름철에는 바다 위에 결정 (結晶)으로 떠있는 많은 소금은 마치 바다에 핀 꽃이나 얼음처럼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불의 부력이 매우 커 사람이 물에 들어가 누우면 모의 절반 가량이 저절로 물 위에 떠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이다.

※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 염해에 모였더라 (창 14:3)

※ 너희 남방은 에돔 곁에 접근한 신 광야니 너희 남편 경계는 동편으로 염해 끝에서 (민 34:3)

※ 그 경계가 또 요단으로 내려가서 염해에 미치나니 너희 땅의 사방 경계가 이러하니라 (민 34:12)

※ 또는 아라바와 요단과 그 가요 긴네렛에서 아라바 바다 곧 염해와 비스가 산록에 이르기까지의 동편 지경이니라 (신 3:17)

마사다

마사다는 히브리어로 성채(요새)의 의미를 지니며 사해의 서쪽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이 는 주변유대광야의 산들과는 고립되어 있으며 높이가 400m이고 정상은 길이 600m 가장 넓은 곳의 폭이 250m인 평지를 이루고 있어 천해의 절벽 요새이다.


서기1세기 유대인 역사가였던 요세푸스가 기록한 유대전쟁사에는 마사다가 헤롯왕의 요새인 동시에 유대인들이 로마에 항거했던 ‘유대전쟁’ 최후의 비극적 견적지로 묘사되어 있으며, 오늘날 그 실체가 알려지게 된 것은 고고학자 이갈 야딘(Yigal Yadin) 교수의 1963-1965년간에 걸친 발굴작업을 하면서부터였다.


서기66년 로마제국에 항거하는 제1차 유대인 반란이 일어나고 70년 8월 티투스장군은 예루살렘은 공격해 함락시킨다.

이때 유대인 지도자 엘리아잘 벤 야이르가 이끄는 유대인 성다원(Zealot)들 약 960명이 마사다요새로 피신하여 로마에 대한 저항운동을 계속한다. 그러나 로마군단은 마사다의 험난한 지형 때문에 쉽게 정벌하지 못하고 장장 3년 동안이나 공격을 계속하던 끝에 엄청난 토담을 쌓아 마사다 요새에 접근한다. 이로써 마사다의 수비벽이 무너지고 로마군단의 진격이 확실시되자 지도자 벤야이르는 ‘내일아침 로마군에 잡혀서 온갖 수모를 겪느니 차라리 오늘밤 자유인으로서 영광되게 죽자’고 마지막 연설을 했다.

이 말에 감동한 각 가족의 가장들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직접 칼로 찔러 죽인다음 모든 남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열명을 추첨하고 그들이 나머지 사람들을, 다시 한명을 뽑아 아홉명을 죽인 후 그도 최후로 자결하였는데, 요새푸스의 유대전쟁사 252-406p에 의하면 노파 1명, 어린이 5명, 엘리아제르 친척노인 1명 모두 7명이 생존하여 이 이야기가 전해졌다 합니다. 3년 동안 한맺힌 포위작전에 대한 영광의 대가를 바랬던 로마군은 960구의 시체 앞에 망연자실했으며, 그 비극적인 전설 같은 사실은 오늘날까지 전승 승화되어 이스라엘인들의 불멸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마사다는 현재 이스라엘 장병들의 선서식장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마사다는 기원전 2세기 마카비아왕조의 대제사장이었던 요나단이 요새화하고, 기원전 103-76년 알렉산델 안네우스가 진지를 구축했으며, 기원전 43년 헤롯대왕이 아버지 안티파텔을 암살한 후 기원전 37년 유다임금이 될 때가지 유다인을 피해 도피처로 사용하였다 한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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