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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위령의 날 (둘째 미사) - 방효익 신부님

도구 Ludovicus 2008. 11. 2. 10:54

오늘 제1 독서(집회 3,1-9)는
의인들과 악인들의 운명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집회서의 저자는 의인들과 악인들의 운명을 비교하면서
생명과 죽음,
풍요로움과 황폐함,
장수와 단명, 그리고 평화와 파멸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에
의인들은 마치 벌 받는 것처럼 늘 고통 속에서 살고 있으며,
악인들은 늘 편안하고 잘 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시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의인들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현세에서 겪는 어려움은
오히려 더욱 커다란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단련을 시키는 것이라고 하면서 의인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의인들은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뜻을 깨달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궁극적인 희망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제2 독서(로마 5,17-21)는
하느님의 은총이 죄의 결과인 죽음을 지배한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들이라는 중요한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그분을 통하여 얻게 된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영원한 생명의 주권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기능이란 원래 신앙생활을 도와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 자체에만 매달리는 나머지
율법이 오히려 사람을 죄와 죽음으로 몰고 가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율법을 완성시키신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른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불순종의 대표자였고 그리스도는 순종의 대표자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불순종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짐,
즉 죽음으로 이끄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순종은 하느님께로 나아감,
즉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이 순종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순종이며, 우리의 구원을 위한 순종입니다.

오늘 복음(마태 11,25-30)은
마태오 복음의 보석이며,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종합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찬미기도(25-26절)와 아들의 지위에 관한 선언(27절),
그리고 구세주의 부르심(28-30절)입니다.

찬미기도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하늘과 땅의 주인, 즉 역사의 주인이시며 창조주로 부르면서 찬미를 드립니다.
그리고
율법학자들과 묵시문학자들과 같이
사회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다니 1,4),
자기들에게 하늘에서 특별한 것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이들(에세느파와 율법학자들)을
소위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이라고 하시면서
하느님께서 그들에게는 무엇인가를 감추신다고 합니다.
반대로
오히려 철부지,
사회에서 약자로 취급되는 평범한 사람들,
즉 여자들과 갈릴레아 사람들,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무엇인가를 드러내주셨다고 감사를 드립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감추시고 드러내신 이것이란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늘나라의 신비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단순한 이들만이 하느님의 계시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들의 지위에 관한 말씀에서
철부지들에게 보여주신 하늘나라의 신비는
다름이 아니라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알지 못하고,
아들의 부활을 통하여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27절).
이렇게 하늘과 땅과 저승에 관한 모든 권한을 아들에게 넘겨주셨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구원에 대한 아버지의 전권이 아들에게 맡겨졌기 때문에
오직 아들을 받아들이는 이들만,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알고, 아들이 아버지를 알듯이(요한 10,14-15),
하느님 아버지를 알게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 없으며,
구원의 상태란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확인해주시듯이
이와 같이 하느님과 우리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에 대한 참된 지혜는 선물이기 때문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시지 않으시면,
하느님 아버지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지혜 9,17).

구세주의 부르심은
지혜문학의 전통에 입각해서(집회 24,19-22; 51,23-29)
하느님을 원하는 이들,
하느님의 지혜를 깨우치지 못한 이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보시고
이들에게 보내는 새로운 형식의 행복선언입니다.

멍에란 원래 외국인에 의한 지배 때문에 살게 되는 노예 생활을 말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지혜의 멍에,
율법의 멍에, 그리고 하느님의 멍에(예레 2,20; 5,5)라고 하면서
수많은 조항의 율법들을 무거운 짐이나 구속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마태 23,4)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결코 겸손하거나 온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일만 하고,
윗자리와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 불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마태 23,5-7).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마태 23,3)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는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가르치신 것을 실천하시기 때문에
당신이 주시는 멍에는 편하고 가볍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멍에를 멘다는 것은
그분의 가르침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분의 가르침에 순종할 때
우리는 그분과 함께 하느님 나라,
즉 평화와 고요함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께로부터 구원에 대한 전권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
즉 아드님은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찾게 되면
하느님께서 기쁨이 되어 주신다고 합니다(집회 6,28).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궁극적인 희망을 간직한 채로
길이신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교회는 오늘을 위령의 날을 정해놓고
혹시라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의 길을 찾지 못한 연옥영혼들을 위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출처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글쓴이 : 구절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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