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1 독서(이사 22,19-23)는
이스라엘에 메시아가 오게 되는 시대를 예언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메시아의 시대에 있을 일을 예언을 한 것은
기원전 609년에 이집트의 파라오 느코에 의해
석 달 동안 예루살렘에서 다스린 여호아하즈가 폐위되고
여호아하즈의 형제인 엘야킴을 여호야킴이라는 이름으로 바꾸면서
유다와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는 때입니다(2역대 36,2-4).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이름을 말하지는 않지만
집에 관한 것들을 가지고 메시아가 오게 되면 이루어질 일들을 말해줍니다.
메시아가 유다 집안의 아버지가 될 것(21절)이라고 한 것은
궁궐에서 최고 높은 사람의 공식 직함이기 때문에
임금을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또한
메시아가 다윗 집안의 열쇠(22절)를 가질 것이라고 한 것은
궁궐의 관리가 지닌 권력과 최고의 권위의 상징입니다.
메시아께서 궁궐(하늘나라)을 열고 닫는 모든 권한을 가진다는 것입니다(묵시 3,7).
메시아가 말뚝처럼 단단한 곳에 박힐 것이라 했는데(23절)
천막을 땅에 고정시키는 것으로서
하느님을 섬기는 공동체가 땅에 굳건하게 서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궁궐에서 사용하는 모든 복장과 권력과 권위를 메시아에게 비유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2 독서(11,33-36)는
로마서 9-11장에 나오는 구원의 역사에 대한 결론으로서
구원의 신비에 놀란 나머지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우신 계획의 심오함을
세 가지로 설명한 뒤에
그에 대한 세 가지 질문을 나중에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영광송으로 이 단락의 끝을 맺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버리신 것 같지만
구원을 위한 것이었음을(로마 11,32) 깨우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풍요로움의 무한함,
하느님의 지혜의 탁월함,
그리고 그분의 지식의 심오함을 찬미합니다.
하느님의 이러한 무한함과 탁월함과 심오함에 대한 깨달음은
성령께서 계시해주시는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것입니다(1코린 2,10).
그래서
구원의 신비를 스스로 알아서 슬기롭다고 여기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로마 8,25).
구원에 대한 “하느님의 신비롭고 또 감추어져 있던 지혜”는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1코린 2,7)
그러나
하느님의 구원에 대한 결정은
하느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간 오만한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는 이들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울 것입니다(로마 8,20-22).
구원에 대한 판단이 헤아리기 어렵고 알아내기 어렵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1,24)
그러나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우리와 상관없이 초자연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역사 안에서,
그리고
우리 공동체 안에서 작용하면서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께 보답을 드린 적이 없어도
무상으로 이루어주시는 구원을 위한 초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에 보답을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의 작용을 느끼지도 못하고,
하느님은 나에게서 멀리 계신 분으로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심오함 때문에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마태 16,13-20)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중요한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최북단에 도작하셨을 때
제자들에게 당신을 사람의 아들로 칭하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세 번씩(마태 10,23; 13,37.41)이나 말씀하셨으나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했음을 아시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대답을 합니다.
먼저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으로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활동을 시작하시자
헤로데 역시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세례자 요한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마태 14,2.5).
다음으로 엘리야라 한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고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마태오 복음서에만 예레미야가 세 번 언급되는데
왜 예레미야가 메시아처럼 오실 것이라 생각했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누구라고 하는지 개인적인 답을 요구하십니다.
시몬 베드로는 마치 대변인인듯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이라는 것은
신앙고백인 동시에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분이시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시몬과 베드로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함께 나타나면서 강조됩니다.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행복을 선언하시는데
그가 관심의 핵심적 대상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오직 베드로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볼 수 있고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마태 13,16) 다른 제자들에게도 해당되는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당신께서 바위 위에 세우신 교회와 함께 계실 것이기 때문에(마태 28,20)
아무도 그 교회를 흔들거나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결국 어떤 세력도 당신을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거대한 궁궐이 세워지면
거기에 들어가기 위해 문을 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대문 열쇠를 가진 사람은 문지기이든지 봉사자입니다.
그래서 큰 궁궐에는 거룩한 문지기가 있다는 생각은
고대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베드로가 하늘나라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문지기로 생각하는 것이며,
선택된 이들을 들어가게 해주는 봉사자라는 것입니다.
열쇠를 가지고는 열고 닫는다고 하지 매고 푼다는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악마들은 묶어놓고(마르 3,27)
억눌린 이들은 풀어준다는 메시아의 사명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매고 푼다는 말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말씀은 먼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입니다.”(마태 23,13)
다음으로
베드로 사도의 사명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증하는 것은 물론
생명으로 이끄는 문을 열어주는 역할(마태 7,13-14)을 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하고 분부하신 것은
이 사실을 아직은 제자들만 알고 있어야 할 때임을 말해줍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대로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짐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를 위한 구원계획을 가지고 계셨고,
때가 차자 그 계획을 이루신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의 심오함 때문에
바오로 사도는 찬미와 영광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하느님의 이런 권능과 계획을
아무도 허무를 수 없다는 의미에서
예수님께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런 심오한 구원의 가르침을 보존하고 전파해야 할 의무가 있고,
그런 일은
예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심오한 계획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우리를 위한 주님의 생각을 아시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시려면 그분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읽으면서
그분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쓸 때 그분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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