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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어둠이 빛을>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도구 Ludovicus 2008. 7. 2. 05:38

2008년 7월 1일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조영만 세례자요한 신부님‥‥‥‥
<어둠이 빛을>
유능한 선장일수록 물길과 맞서지 않습니다. 
물길을 지혜롭게 타고 흐를 줄 압니다. 그래야 배도 살고 자기도 살립니다.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커다란 배의 선장님은 이 물길을 잘 읽지도 못하고 물길을 따라 흐를 줄을 모르십니다. 
물길 이기는 배가 없는 법인데 그 물길을 자꾸만 거스를려고만 하니 배가 뒤집어지고 절단이 나는 것입니다.
서울 시청 앞에서의 시국미사에 참여하고 돌아온 길입니다. 몸도 복잡하고 마음도 복잡했습니다. 
일단은 살면서 가장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5만명이 내지른 함성과 박수, 과히 사제가 이런 환호를 받을 자격
이 있는가? 되물어볼 정도의 환대였습니다. 이제껏 정의구현사제단이 가는 곳에서 항상 대접받은 것은 손가
락질이었고 욕이었습니다. 전경들에게 터져가면서도 새만금을 갔고 평택을 갔고 낙동강 물줄기를 갔습니다.
가장 약한 곳이고 가장 큰 아픔이 있는 곳에 고통을 함께 지기 위해서, 그 이유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빼곡이 들어선 그 많은 군중들이 마치 예수님을 등에 앉힌 조랑말을 위해 길을 터주듯 사제들이 
그 넓은 광장을 가로지를 때까지 박수를 쳐주셨습니다. 아마 살면서 가장 큰 환대를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살면서 가장 큰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사제들의 단식 기도 천막에는 사제들의 촛불 참
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입에 담기도 힘든 욕을 아침부터 와 끌어 붓기 시작합니다. 행패를 
부리는 사람도 있었고 협박과 침뱉음, 심지어 어떤 할아버지는 천막 안에 들어와 “동물원에 왔으니 동물들 구
경이나 하고 가야겠다.”며 모욕을 주십니다. 그분이 가시고 어느 신부님이 그러십니다. 평생 들을 욕 한꺼번
에다 들었으니 우리 모두는 오래 살꺼라고, 쓴 웃음을 지으십니다.
보잘 것 없는 사제들을 두고 환호성을 지르게 만든 힘도 두려움에서 기인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자기들의 외
침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저 공권력에 의해 입막음 당해야 한다는 절망이 가져다 준 두려움, 그 한 복판에 
사제들이 등장하자 신자건 신자가 아니건, 박수를 치고 환성을 지른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사제들을 두고 그 중후하신 연세들이 질풍 같은 욕을 퍼붓게 만드는 힘도 결국 따지고 보면 두려
움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나라의 혼란을 염려하고 국가의 기강을 걱정하는 애국심에서 나온 불만들이겠지만, 
사실 혼란과 기강을 어지럽힌 것은 사제들이 아니라, 촛불들이 아니라 권력자들 아니었습니까?
질서와 기강, 그리고 안보 등등의 단어들은 누구를 위한 단어입니까? 그것들은 백성들을 위한 단어가 아니지 
않습니까? 권력자들이 보다 손쉬운 통치를 위해 가장 불의한 체육관 대통령이 법질서 확립을 내세우고 삼당 
야합으로 권력욕에 물든 노익장 대통령이 나라의 기강이 어쩌구저쩌구를 떠들었으며 밀린다 싶으면 터지고 
나오는 안보의식이 어쩌구를 통해 결국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국민을 말 잘 듣는 충견으로 길들여온 것 
아닙니까?
이 또한 두려움입니다. 사실 지금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촛불을 드는 것이고 또 반대편은 두려움 때문에 촛불
을 끄려고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어둠입니다.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어둠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죽음이라는 어둠, 고통이라는 어둠, 
상처와 상실이라는 어둠, 어쩔 수 없는 것이 인간이요, 인간의 본질인 두려움입니다.
오늘 제자들이 겪은 것도 풍랑이 아니라 어둠입니다. 고대 사람들의 시선에 물의 끝에는 낭떨어지가 있다고 
믿던 시절 캄캄한 밤에 큰 물 위에 일엽편주 하나에 의지해 풍랑에 시달린다는 것은 총체적인 두려움에 휩싸
여 있음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그 어둠 한 거운데 유일한 빛으로 제시됩니다. 그분의 말씀이 이 뜻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 8,23) 성경은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하고 
고백합니다.
바람과 호수가 무슨 잘못을 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들의 정체가 어둠, 곧 두려움이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
이라는 어둠을 깨치시는 빛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제껏 세상은 어둠이 지배해 왔지만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하셨습니다. 어둠의 위세가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정의를 불의로 바꾸고, 비폭력을 폭력으로 바꾸고, 모든 권력을 총 동원해서 어둠이라는 
두려움을 조장해 그저 입 막으면 그게 평화요, 그게 민주질서의 회복이라 획책을 한다하여도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들이 바른 양심을 찾고 공권력이 공동의 선을 보호하고 닫힌 마음을 활짝 열어젖힐 때까지 빛은 항상 그 어
둠 한 복판에서 빛날 것입니다.
단식으로 실실 얼굴이 노숙자가 되어가는 신부님들을 두고 떠나지 못해 니미적 거리고 있는데, 자신을 천주교 
신자라 하시는 어떤 아저씨가 “신부님들이 성당을 안 지키고 여기 앉아 있으면 어떻하냐?” 야단하시는 통에 
제가 총대를 매고 “예, 성당 지키러갑니다.” 하고는 가방을 들고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그 아저씨에게 한 말씀을 더 드렸습니다. 
“형제님, 사제는 성당을 지키는 개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성당에는 저 대신 성당 지키는 개 양양이가 있어
서 든든합니다만은, 성당 지키러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자들이 시대의 어둠에 침묵하는 신앙인은 아니 되도록, 
신자들 지키러 내려갑니다.” 하고는 돌아서는데 마음 한켠이 또 묵직해집니다. 
어둠을 이깁시다. 그리고 빛이 됩시다.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이 없습니다. 정녕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과 
함께 사는 신앙인이라 한다면 더욱 그러합니다. 아멘.


출처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글쓴이 : 五餠二魚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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