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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부활 제5주간 화요일 가해-요한 14,27-31 평화

도구 Ludovicus 2008. 4. 22. 08:45

부활 제5주간 화요일 가해-요한 14,27-31 평화를 준다


  찬미예수님!

  우리는 매일 미사 중에 서로 평화를 빌어줍니다. 또, 성경 전체에서 ‘평화’라는 낱말은 무려 207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은 평화롭습니까? 말이 쉽지 도대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무엇이고, 세상이 주는 평화는 무엇입니까? 사실 저도 이것을 말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냥 흔히 하는 전라도 사투리로 “거시기가 쪼까 다르당께요” 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제가 체험한 평화를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저는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살면서 소중한 것들을 배우고,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입니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살면서 항상 기쁘고, 평화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힘들고, 지치고, 의욕이 사라지고, 맥이 빠질 때가 있습니다. 특히, 어떤 힘든 사건과 마주치게 되면 마음이 괴롭습니다. 저의 목표가 사제이고, 사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고, 그러기 위해서 신학교에서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온갖 시련은 결국,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다가 겪게 되는 것들이었습니다. 신학교라는 닫쳐진 공간 안에서 의무적인 기숙사 생활을 하며, 싫든 좋든 누군가를 만나야했습니다. 그 힘들다는 군대도 2년이면 끝나지만, 신학교는 군대를 합하면 최소한 10년을 그렇게 살아야 하니 힘든 일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특히 처음 저학년 때는 견디기가 쉽지가 않아 몇 번이고 신학교를 그만두려고 짐을 쌌다 풀었다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 중에 하느님도 원망해보고, 제발 저에게 평화를 주시라고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제 마음에 평화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주위가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람들도 그대로고 생활방식도 그대로였습니다. 그것은 작은 체험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시련이 지나고 나서 내 자신을 잘 들여다보면, 힘들었던 그만큼 성장해있는 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체험이 저절로 생겨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도 힘들다보니까,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하느님께서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하느님의 뜻을 찾다 보니 이루어진 결과였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일들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습니다. 고통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의도적인 고통이고, 또 하나는 영적인 고통입니다. 예를 들면, 음주운전을 해서 사고를 내놓고, 이것 또한 하느님의 뜻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의도한 고통입니다. 그러나 나는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생기는 고통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누군가와 대화 중에 어떤 말을 했는데, 나는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는데도 상대방이 오해를 하면서 빚어지는 불편한 감정들이 그렇습니다. 이런 고통은 신학적 용어로 ‘영적인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나에게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가?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저 사람과 더 친해지게 해주시려고 이러시는 걸까?” 라고 생각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어야합니다. 이런 체험들을 몇 번 반복한 뒤에는 또 다른 시련이 다가와도 쉽게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주님께서 나의 어떤 부분을 성장시키고자 하시는가? 이 사건을 통해 나에게 어떤 열매를 주시려고 하시는가?”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구할 때 그런 고통 중에도 우리 안에는 평화가 깃들게 됩니다.

  우리는 살다 보면, “그때 그렇게 된 것이 그때는 불행하게 느껴졌지만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잘 된 일이었는지 몰라.” 라고 말하면서, 그 고통의 시간도 사실은 은총의 시간이었음을 깨달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체험을 주시는 분이 바로 보호자, 성령이십니다. 보호자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때로는 쓰디쓴 것도 주십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의 매를 드는 것도 고통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각자에게 맞는 방식으로 시련도 주시고, 기쁨도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어떤 조건들이 채워져 그 조건들이 지속되는 시간만큼만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는 일시적이고 거짓된 평화가 아니라, 어떠한 악조건에서도 누릴 수 있고, 현세에서 뿐만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까지 누릴 수 있는 영원한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어떤 한적함이나, 산사에서 풍기는 평화스러움이 아닙니다. 나의 처지가, 사회의 분위기가 전혀 희망이 없게 느껴지고, 도피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올 때도, 하느님의 뜻을 생각함으로써 역경과 좌절을 극복하게 하는 평화입니다. 힘차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평화입니다.

  요즘 세상은 예수님 말씀만 따르다가는 바보가 되기 십상인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착하고, 순진하고, 무조건 사랑만 베풀며 살다가는 착한 척한다고 비난당하고, 남에게 속고, 배신당하기 쉬운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야만 하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많은 고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 때문에 내 삶이 너무 힘들어” 라고 불평만 하는 것은 우리의 자세가 아닙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그 고통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그것을 불행이고, 고통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기도한다면, 우리의 보호자이신 성령께서는 그것이 고통이 아니라 은총임을 깨닫게 해주시고, 평화라는 선물을 주십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직장에 나가야하고, 하루가 피곤하고 힘들어 지칠 때, 그런 현실이 마냥 짜증이 날 때, 그 현실로부터 도피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 안에서 나에게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으며, 그 뜻을 잘 찾을 수 있도록 성령께 기도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멘.

출처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글쓴이 : 행복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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