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오늘의 말씀

[스크랩] 2008년 3월 30일 부활 제2주일 가해

도구 Ludovicus 2008. 3. 30. 12:08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8년 3월 30일 부활 제2주일 가해

제1독서 사도행전 2,42-47

42 [형제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43 그리고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나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44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45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46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47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



제2독서 베드로 1서 1,3-9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4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 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5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6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8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9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요한 20,19-31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
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저의 인천교구 동창신부는 총 11명입니다. 다른 반보다 많은 편이라 자주 만나면서 사목적인 도움을 서로 주고받습니다. 또 친목이라는 이유로 일 년에 한두 번은 가까운 곳이라도 여행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번은 저의 급한 일로 인해서 이 여행에 함께 할 수가 없었습니다. 미안했지만 워낙 급한 일이다보니 도저히 참석할 수가 없었고, 동창들도 이해를 해주었습니다.

다음 달, 동기 모임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여행이 재미있었는지 계속해서 그 이야기뿐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소외감이 느껴집니다. 동기들은 바둑 복기(復碁)를 하듯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하지만 함께 하지 못한 저로써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꿔다놓은 보리자루 마냥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 대한 배려를 하지 못하는 동기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마음을 갖게 됩니다. 말은 안했지만, ‘이제 그 이야기 좀 그만하면 어디가 덧나나? 가지 못한 나 배 아프라고 그 이야기만 하는 거야?’ 등등의 생각을 품게 되더군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내가 함께 하지 않은 것으로 바로 내가 잘못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급한 일 때문인데 어떻게?’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어떻게든 함께 하지 못한 만큼 이에 대해서 손해 보는 것은 스스로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아무튼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한 내 자신, 그러나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조그마한 꼬투리도 크게 보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 안에 품고 있는 이기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기심으로 인해서 굳은 신뢰를 조성할 수 있는 믿음의 관계가 사라지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다른 제자들로부터 예수님 부활 소식을 듣고는 이렇게 말하는 토마스 사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이 말을 했다고 그는 불신의 대표주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다른 제자들도 처음에는 다 믿지 못했었지요. 마리아 막달레나의 말도, 엠마오로 가면서 예수님을 만난 제자의 말도 믿지 못했던 제자들입니다. 하지만 유독 토마스 사도만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불신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것이 그의 입장에서는 좀 억울하겠다 싶습니다.

더구나 그는 그렇게 믿음 없는 사람도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라고 말했을 때, 처음에는 인간적인 기준으로 말을 하기는 했지만 곧바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굳은 믿음을 표현하거든요.

문제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함께함을 통해 내 부족한 믿음을 채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혼자 생각하고 혼자 판단함으로 인해서 더욱 더 불신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 세계에서 나와야 할 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혼자의 삶이 함께 어울러져는 함께의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셨지, “평화가 너와 함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음을 기억하십시오.



겉으로라도 의심하지 말고 받아들이려 해보세요.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법(‘좋은 생각’ 중에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설득시키거나 마음을 얻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화려한 언변으로 상대방의 귀를 솔깃하게 할 수 있지만 진정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그것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의 힘이다.

로버트 케네디가 일본 와세다 대학을 방문하여 강연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반미 감정이 매우 높았는데, 케네디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말 한 마디도 매우 조심스러웠다. 냉담하고 차가운 분위기 속에서 연설을 마친 케네디가 강단을 내려오자 와세다 대학 학생들은 미리 준비라도 한 듯 케네디에게 심한 욕서로가 비난을 퍼부으며 일제히 “양키 고 홈! 양키 고 홈!”을 외쳤다.

하지만 케네디는 그런 학생들의 모습에 당황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강단에 올라섰다. 마이크를 잡은 케네디는 학생들을 향해 내가 아는 노래가 하나 있는데, 한 곡 부르겠으니 양해해 달라고 말했다. 그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한 쪽은 오히려 학생들이었다. 케네디의 낮지만 진중하게 부르는 노래 한 소절이 흘러나오자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야유를 퍼붓던 학생들은 어느새 하나 둘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고, 강당은 이내 하나의 목소리로 부르는 노랫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케네디가 부른 것은 바로 와세다 대학의 교가였다. 와세다 대학 학생들을 위해 준비한 노래는 그의 백 마디 연설보다도 강했고, 학생들의 가슴에 공감을 일으켰다. 이해한다는 것, 그것은 먼저 상대방에 대해 아는 것이다.

출처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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